13. 단추, 가슴,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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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단추, 가슴, 입맞춤
2022.05.14.
“이번 마케팅 공모전 관련 진행 사항입니다.”
정확히 30분 뒤 공모전 관련 회의가 진행되었다.
마케팅 팀장이 공모전 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하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이상입니다.”
끝을 알리는 마케팅 팀장의 말과 함께 하준의 입술이 열렸다.
“이번 마케팅 공모전은 블라인드 심사로 진행하겠습니다. 모든 개인 정보를 배제하고 실력 하나만 평가하는 방식으로 심사 기준 수정해서 다시 회의하도록 하죠.”
블라인드 심사이라니. 갑작스럽게 변경된 심사 방식에 당황한 팀장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순간. 하준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그렇게 당황들 하시는 걸 보니 따로 생각해놓은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
하준의 물음에 팀장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나 그것이 미소가 아니란 것쯤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팀장들이 시선을 떨구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하준이 갑작스럽게 심사방식을 변경한 것은 박 비서에게 전달받은 내용 때문이었다.
공모전 일정이 채 나오기도 전부터 임원들의 추천인 명단들이 팀장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소문.
시릴 만큼 차가운 말투로 하준이 말을 이었다.
“라인 타려는 머리 비우고, 추천인 명단 들린 손 비우고. 실력자 찾아낼 눈이랑 소신만 챙기세요.”
“…….”
“회의 마치죠.”
하준의 한마디에 팀장들이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한심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하준이 오른쪽 팔을 감싸 쥐며 눈가를 구겼다.
회의가 진행될 동안 잊고 있던 고통이었다.
“부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진통제라도 드릴까요?”
지훈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바로 진통제를 처방받아놓은 박 비서였다.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는 하준을 대신해 그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늘 지훈이었다.
내년부터 현성 리테일 부분을 맡게 되면서 업계 파악을 위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편의점 운영을 하고 있지만, 본사 마케팅팀 팀장으로 있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준은 예상했던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회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
어느덧 시간이 흘러 토요일.
수아는 벌써 몇 시간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편의점 계산대에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지훈의 편의점은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하고 있어,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렇게 주말 오후에는 심각할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아함. 손님은 없고, 매장은 조용하고, 햇살은 따뜻하고. 수면제가 따로 없네. 음…….”
이런저런 이유로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수아의 고개가 자꾸만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신분증…… 보여주셔야…… 음냐. 음냐.”
중얼중얼 잠꼬대까지 해가며 한참을 졸고 있던 그때. 띵동 벨 소리가 울리며 편의점 앞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벨 소리에 본능적으로 일어난 수아가 인사를 건네며 입 주변에 묻어 있을지 모를 침을 스윽 닦아냈다.
“야! 봤어? 장난 아니게 잘생겼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가서 말 걸어볼까?”
수아는 학생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껏 신이 나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연락처 물어볼까?”
“네가 가서 물어봐.”
“그런데,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맞나?”
“편의점 언니한테 물어보자.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면 여기 자주 올 거 아니야.”
여학생 무리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아를 향해 돌진하듯 달려왔다.
뭐, 뭐야 무섭게 왜 이래?
수아는 자신보다 키며, 발육상태며 뭐하나 빠지지 않고 월등한 여고생들의 돌진에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니!”
여학생 무리 중 가장 세련되고 예쁘장하게 생긴 한 명이 수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네. 손님.”
“언니. 저 앞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 여기 자주 오는 사람이에요?”
야외 테이블? 남자? 야외 테이블에 남자가 앉아 있었던가?
여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수아는 야외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어?”
여학생이 말한 남자를 확인한 순간. 수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하준 씨?
놀랍게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하준이었다.
언제 온 거지? 왜 저기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거야?
의아함에 하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언니! 저 남자 여기 자주 오냐고요!”
수아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여학생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요. 오늘 처음 뵙는 분인데요.”
굳이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라 둘러댔다.
“야! 이 동네에 안 사나 봐. 기회는 오늘뿐이라는 거지. 가서 연락처라도 물어보자. 가자. 가자.”
말과 동시에 여학생들은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나갔다.
수아의 시선이 그런 여학생들의 뒷모습을 좇다 이내 하준에게로 향했다.
우와.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감탄사가 수아의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패션잡지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했다.
머리칼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고, 책을 향해 살짝 내리깐 눈에는 섹시함 마저 흐르고 있었다.
꼬고 앉은 다리는 왜 또 저리 긴 건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꼰 다리가 바닥에 닿는 비현실적인 다리 길이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하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수아가 앞문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돌한 여학생들과 하준과의 대화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수아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더니 수아의 몸을 밀어냈고, 그대로 균형을 잃은 채 진열대에 이마를 부딪쳤다.
“아! 아야.”
“뭐야? 담배 하나.”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수아를 스윽 쳐다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배 이름을 말했다.
“5000원입니다.”
계산을 마치고 남자가 문을 나서자마자 다시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하준의 뒤로 마치 후광인 듯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을 번쩍 뜨려 눈가에 힘을 주는 순간. 좀 전에 부딪힌 이마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야.”
멍들려나? 다친 부위를 만져보려 손을 올리는데
탁. 소리와 함께 손목이 붙잡혔다.
“만지지 말아요.”
“네?”
“상처 났으니까 만지지 말고. 구급상자 어디 있습니까?”
“구급상자요? 여, 여기요.”
수아가 얼떨결에 구급상자를 꺼내놓자 어느새 계산대로 들어온 하준이 상자를 열어 연고를 찾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요.”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더니, 이내 차가운 소독솜이 상처에 닿았다.
“아야!”
“아! 미안해요. 많이 아픕니까?”
“아니요. 그것보다…….”
눈앞에 있는 당신 가슴 때문에 눈이 아프다고.
치료해 주겠다며 바짝 붙어있는 통에 수아의 시야 가득 그의 단단한 가슴이 들어왔다.
단단한 가슴. 단추, 입맞춤.
생각이란 것이 물과도 같아 흐르고 흐르더니, 결국 그와의 입맞춤까지 흘러가 버렸다.
민망함에 수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하준의 입술이 열렸다.
“사과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
“어제 일. 사과하고 싶지 않다고요.”
“…….”
“사과를 한다는 건 후회한다는 뜻인데 저는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만약 사과를 받고 싶다면…….”
[네가 좋은 사람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과…… 안 하셔도 돼요.”
[그 사람이 한걸음 다가올 때 적어도 뒷걸음질은 치지 마.]
“갑작스러워서 놀라긴 했지만, 하준 씨가 후회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그래. 지금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
“저녁에 수아 씨 집까지 데려다줘도 됩니까?”
“……네. 됩니다.”
오가는 서로의 대화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럼 저는 방해되지 않게 저쪽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은 창가로 걸어가 책을 펼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던 지훈이 창가에 앉은 하준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민하준!”
“…….”
이런. 민지훈. 자리에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반가워하는 지훈과 달리 하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웬일이야? 나 보러 온 거야?”
지훈이 하준의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아서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 보러 왔겠냐? 수아 씨 보러 왔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하준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야. 아무리 수아 때문에 왔다고는 해도 반가워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냐? 이 매정한 놈아”
“…….”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수아한테 확 다 말해버리는 수가 있다?”
하준이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러기만 해.”
“그러니까. 나도 반가워해 주라고.”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민지훈아. 됐냐?”
하준의 대답에 지훈이 웃음을 터트렸다.
“로봇이야 뭐야? 진심이 한 톨도 없어. 그래서 웃겨.”
20년 만에 찾아낸 하준의 약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훈은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만 웃지?”
깊은 호흡으로 분노를 억누른 하준의 어금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지훈이 웃음을 겨우 삼켰다.
그렇게 지훈을 향해 매섭게 흘기던 눈을 거두려던 그때.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하준이 눈을 번뜩 떴다.
“잠깐 사무실에 가서 얘기 좀 하자.”
“사무실? 사무실은 왜? 여기에서 하면 안 되는 얘기야?”
“회사 일로 얘기할 게 있어.”
“왜? 회사에 무슨 일…….”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 하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야. 같이 가.”
지훈이 곧장 그 뒤를 따랐다.
*
“할 말이 뭔데?”
사무실 소파에 앉은 지훈이 물었다.
“마케팅 공모전 진행 사항 전달받았지?”
“응. 블라인드 채용으로 진행한다며? 그게 왜?”
“회장님께서 이번 공모전 심사에 너도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심사?”
“응. 일단 회사 공지사항에는 올라갔고, 접수 기간은 2주로 마감할 거야. 길게 시간 끌어봤자 임원들에게 기회만 더 주는 것 같아서.”
하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현성이 출근하는 횟수를 줄이고, 대부분의 결정권을 하준에게 맡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임원들의 비리 행위가 많아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현성이라면 모를까 그들에게 하준은 그저 까마득히 어린 만만한 존재일 뿐인 것을.
“그래서 심사는 어떻게 참여하라는 거야?”
“일단 마감하는 대로 팀장들이랑 5명만 선정할 거야. 그 후에 임원 투표로 1명 선정할 거고.”
“그럼 나는 임원 투표하는 날 가서 심사하라는 거지?”
“응. 날짜는 결정되는 대로 알려줄게.”
“그래. 알겠어.”
대답과 함께 지훈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하준을 향했다.
자신이 없다고 일을 못 할 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음은 마음이 쓰였다.
지난번에는 회사에서 쓰러졌다는 박 비서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던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돌볼 줄 모르는 하준이기에 박 비서와 함께 수시로 하준의 상태를 살피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러질 못하니 늘 불안한 마음이었다.
덕분에 지훈의 통화량 부동의 1위는 늘 박 비서였다.
“수아 씨 이제 끝날 시간 됐지?”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응. 왜? 데려다주게?”
“그래야지.”
“오. 민하준 많이 발전했네? 여자 데려다주겠다고 기다리기도 할 줄 알고.”
“…….”
지훈을 향하는 하준의 눈빛에서 온갖 나쁜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알았다. 알았어. 눈으로 그만 욕하고 빨리 가. 가버려.”
지훈이 어깨높이로 올린 손을 허공에서 퍼덕였다.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서던 하준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누나. 이거 먹어봐. 친구가 줬는데 엄청 맛있더라고.”
“우와 맛있겠다.”
향하지 말아야 할 곳을 향해 수아의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