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녀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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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녀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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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녀와의 악연
2022.05.31.
공모전 최종 1인 수장자를 선정하는 날.
“최종 후보 5인의 기획안을 미리 보내드렸으니, 모두 확인하신 걸로 알고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박 비서의 말과 함께 회의실에 앉아 있던 임원들은 최종 결정을 위해 한 번 더 기획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투표를 통해 최종 1인이 선택되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이 기획안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며, 결과 발표는 예정대로 내일 오전 9시 회사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무리 인사와 함께 회의실에 모여 있던 임원진들은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그 시각 수아의 집.
어느새 내일로 다가온 공모전 수상작 발표일로 인해 수아는 아침부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다은아! 내일이야. 내일. 내일 결과가 나온다고!”
“나도 알아. 호들갑 좀 그만 떨어. 내 정신이 다 사납다.”
“긴장되니까 그렇지. 후하! 후하! 이러다 심장이 터지지는 않겠지? 결과 보기도 전에 병원에 실려 갈 수도 있겠어.”
“그렇게 해서 터질 심장이었으면 벌써 몇 번은 터졌어야지. 네가 면접 결과 기다린 게 벌써 몇 번인데.”
끙. 하여간 가끔 보면 타인 공감 능력이라는 게 전혀 없는 것 같다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도 태연한 다은이 얄미워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보던 수아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들었다.
“어디 가게?”
“말 나온 김에 잠깐 다녀오려고.”
“어디를?”
“좋은 곳을 가려면 좋은 정기를 받아야지. 안 그래?”
수아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빠르게 집을 나섰다.
잠시 후. 걸음을 서두르던 수아가 도착한 곳은 현성 그룹 본사 건물 앞이었다.
“현성 그룹에 입사하려면 현성 그룹의 정기를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쓰읍. 하아. 쓰읍. 하아.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를 사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숨을 들이쉬던 그때.
“혹시……. 이수아?”
수아는 자신의 이름이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누구……?”
“나야. 김지수. 명신대학교 같은 과였는데 기억 안 나?”
“아…….”
기억났다.
명신대학교 김지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이름 김지수.
겨우 잊고 살고 있던 김지수.
“아. 그, 그래. 지수였구나. 오랜만이다.”
“그러게. 우리 대학 졸업하고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잖아. 안 그래? 너무 반갑다.”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 따윈 없는 태도. 여전하구나.’
수아의 눈가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미안한데. 내가 어딜 가고 있는 중이라. 먼저 가볼게.”
“민철 씨랑은 요즘도 연락해?”
돌아서려던 수아의 몸이 지수의 물음 하나에 멈췄다.
“뭐?”
“민철 씨 말이야.”
“내가 왜 너랑 결혼한 사람과 연락을 한다고 생각해?”
듣지 말아야 할 말이라도 들은 듯 미간을 좁히며 날 선 말투로 묻는데,
그런 수아의 말이 우습다는 듯 지수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어머. 우리 결혼 안 한 거 몰랐구나? 나랑 헤어지고 너한테 다시 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
“내가 좀 바빠서. 먼저 가볼게.”
대답할 가치도 없는 그녀의 말을 애써 외면하며 수아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마음 한구석에 애써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순간이 된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
대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느닷없이 친구가 되고 싶다며 살갑게 다가왔던 지수와 자신의 5년 된 남자친구 민철이 따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걸까.
무슨 변명이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간 민철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수아야. 미안해. 진짜 딱 한 번이었어.”
거짓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던 남자친구는 지수와의 만남을 인정했다.
그렇게 횡설수설 변명하는 그를 두고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지수가 찾아왔다.
“민철 씨한테 들었어. 너 우리 사이 알았다며?”
우리 사이?
황당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민철 씨가 사과하고 붙잡아도 붙잡히지 마. 그 말 하려고 왔어.”
“뭐? 그게 무슨…….”
“설마 다시 만나려는 건 아니지?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말고 민철 씨 그냥 보내줘.”
“뭐? 구질구질? 어떻게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나는 그래도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친구? 나는 너랑 친구 한 적 없는데?”
지수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민철 씨 때문에 너한테 접근했던 거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길래 민철 씨가 그렇게 빠져 있는 건지 궁금해서. 나한테 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
“나보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네가 민철 씨 여자친구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마치 깨어진 유리 조각 같은 그녀의 날카로운 말들이 곧장 심장으로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사실 너같이 별 볼 일 없는 얘를 민철 씨 집안에서 며느리로 인정하시겠니? 나 정도는 돼야 성한 그룹 첫째 며느리로 인정해 주시겠지.”
“뭐? 지금 뭐라고…… 무슨 그룹?”
“너 설마 민철 씨가 성한 그룹 회장님 첫째 아들인 거 몰랐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지?”
“…….”
몰랐다. 전혀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계신다며 자기도 졸업하면 아버지 일을 소소하게 돕고 싶다고 얘기하던 게 전부였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정체를 알아버렸고,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실감했다.
그 후로 계속된 민철의 연락을 피한지 일주일 때 되던 날.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수아 학생 휴대폰 맞나요?]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네. 제가 이수아인데요. 누구세요?”
[나 민철이 엄마예요. 우리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학교 앞 카페에서 민철의 엄마와 마주 앉았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어제 민철이가 집에 와서는 이수아 학생이랑 결혼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결, 결혼이요?”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망설이며 말을 돌리던 그가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니. 당황스러웠다.
민철의 어머니는 무서우리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혼이 얘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 여자랑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
“연애만 하는 거라면 말릴 생각은 없어요. 그동안도 쭉 그래왔고. 그런데 결혼은 다른 문제죠.”
“…….”
“수아 씨도 살다 보면 느낄 때가 있을 거예요.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결혼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말을 마친 민철의 어머니는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우리 민철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줘서 고마웠어요. 이건 그 시간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줘요.”
흔들리는 시선이 봉투 위에 머물렀다.
너무나 소중했던 민철과의 시간이 돈으로 계산되어 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이렇게 봉투 하나에도 사람이 비참해지고 초라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고마워서 그런 거니까.”
“아니요.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민철 씨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 수아는 차마 만날 수도 전화 통화를 할 수도 없어 문자로 이별을 통보했다.
그날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일주일 동안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앓아누워야 했고.
혹시나 그와 마주칠까. 졸업을 하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이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
“뭐? 누굴 만나?”
“……김지수.”
집으로 돌아온 수아는 다은에게 지수를 만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 참. 그 이름 다시는 들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하필 만나도 걔를 만나냐?”
“그러게. 나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남의 인생 그렇게 말아먹더니, 잘살고 있는 것 같디?”
“결혼…… 안 했대.”
“뭐?”
“자기 결혼 안 했다면서 나한테 민철 씨랑 연락하냐고 묻더라.”
“민철이 얘기를 꺼냈어? 걔 진짜 또라이구나? 야! 그런 또라이 말은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너한테는 이제 하준 씨가 있잖아.”
하준 씨. 그래. 나한테는 하준 씨가 있지.
대단한 집안의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던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는 누구보다 평범한 회사원.
“그래. 기억할 필요도 없는 사람. 잊으면 그만이지.”
수아는 원래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그와 그녀를 기억에서 지워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도 수아는 알지 못했다.
또다시 그녀를 마주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
다음 날 아침.
수아와 다은의 시선이 컴퓨터 모니터에 꽂혀 있었다.
어떠한 대화도 오고 가지 않는 고요함 속.
그 고요를 깨는 것은 오로지 마우스와 수아의 손가락이 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소리뿐이었다.
8시 59분…… 9시!
드디어 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
“아으. 나 못 보겠어. 다은아. 네가 대신 봐줘.”
수아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를 옆으로 밀어냈다.
“후우. 후우.”
평소 망설임이라고는 1도 없는 다은도 긴장이 되었는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마우스를 클릭했다.
[수상자 접수번호 264972번.]
264972. 264972.
화면에 뜬 숫자를 중얼거리며 손에 들린 접수증과 비교하는 사이 수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접수번호 264972님. 현성 그룹 마케팅 아이디어 공모전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시상식은 본사에서 진행되며, 자세한 사항은 링크로 첨부하여 보내드리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아야! 됐어! 드디어 됐다고!”
“…….”
“야! 이수아! 반응이 왜 이래? 네가 수상자라고. 네가 1등이라니까?”
“……다은아. 나 볼 좀 꼬집어봐.”
수아의 말에 다은은 있는 힘껏 볼을 꼬집었다.
“아야!”
외마디 소리와 함께 수아가 볼을 감쌌다.
“아파! 엄청 아파! 이거 진짜 꿈 아닌 거야?”
“그래! 꿈 아니라고! 진짜라고. 진짜.”
“꺄아아악!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그제야 실감이 났는지 수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 진짜 축하한다. 이수아.”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전쟁과도 같았던 준비과정을 기꺼이 함께해준 친구.
다은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모전에 지원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란 걸 수아가 모를 리 없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듯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 엄마. 그렇다니까. 진짜로 합격했다니까?”
수아는 믿지 못하겠다는 부모님에게 한참을 설명하고 나서야 겨우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좋냐?”
연신 방글대며 웃고 있는 수아를 향해 다은이 물었다.
“어. 좋아! 아직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너무 좋아!”
놀랍고, 행복하고, 고맙고, 긴장되고, 기대되고.
수아는 초 단위로 변하는 감정들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저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저렇게 좋을까.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바라보는 다은도 덩달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준 씨한테는 전화 안 해? 전화해서 자랑해야지.”
“오늘부터 출장 간다고 연락 왔었어. 아마 지금쯤 엄청 바쁠걸? 그리고 하준 씨한테는 시상식하고 상장받으면 그거 보여주면서 자랑하려고.”
“하긴. 그것도 나쁘진 않네. 아무튼 드디어 대기업 취직의 꿈을 이루게 된 거 진짜 축하한다.”
“응. 고마워.”
그렇게 축하로 가득 찬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