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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거두지 못한 마음
2022.06.11.


적막이 내려앉은 부회장실.


“하아…….”

소파에 기대앉은 하준이 연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수아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 생각할 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중얼거리다 이내 잡은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돌아서던 수아의 표정을 떠올렸다.


“설마…….”

밀려드는 불안감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생각할 시간이 아니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이대로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뜻이었을까.

설마 나…… 버림받게 되는 걸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눈앞이 빙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혹시나 부회장이라는 직책이 그녀에게 부담을 줄까 걱정스러워 말을 꺼내지 못했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아니야. 그래도 끝내자는 말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하준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불안감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희망의 끈은 놓지 않으려 애썼다.


“하아…….”

희망과 절망, 불안함과 초조함.

뒤죽박죽 섞여버린 감정들이 짙은 한숨에 실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박 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님. 마케팅팀 팀장님과 신입사원 이수아 씨가 오셨습니다.”

‘이수아.’

들려온 이름 하나에 좀 전까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박 비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수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회장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네. 어서 오세요.”

대답은 팀장을 향하면서도 하준의 시선은 수아에게 닿아 있었다.

나 좀 보지…….

나 좀 봐주지…….

고개를 떨군 채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수아 씨. 어제 시상식장에서 보셔서 아실 테지만, 이분은 저희 현성 그룹 부회장님이십니다.”

팀장의 말에 그제야 수아의 고개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공모전 수상으로 마케팅팀에 입사하게 된 이수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마치 서로를 모르던 때로 돌아간 듯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

차라리 원망이나 미움의 눈빛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어젯밤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한 걸까.

도대체 어떤…….


“부회장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데,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 네. 입사 축, 축하합니다.”

미안하다고, 당신을 속이려던 게 아니었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준이 뱉어낸 말은 고작 축하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감사합니다. 부. 회. 장. 님.”

“…….”

차갑게 내려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고막이 아닌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부회장님. 업무가 많이 바쁘실 텐데,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팀장은 자리를 마무리 지었고, 수아도 그런 팀장을 따라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부회장실을 빠져나갔다.

털썩.

문이 닫힘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빠진 듯 하준의 몸이 소파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 표정이 당신의 대답이겠구나.

그 목소리가 당신의 결정이겠구나.

간신히 붙잡고 있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부회장님.]

단어 하나가 목구멍에 걸린 듯 호흡이 가빠지더니 이내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

띵동.


“회장님. 최재현 전무님이시라는데요.”

최재현 전무는 현성과 함께 회사를 키워온 현성이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임원 중 한 명이었다.

인터폰을 확인한 가사도우미의 말에 신문을 읽고 있던 현성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사람이 아닌데.

현성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문을 열 것을 지시했다.

잠시 후.

현성의 건너편 소파에 앉은 재현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마케팅팀 이강혁 팀장이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그 이유가 병에 걸린 아이의 치료를 위해 급히 미국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재현은 평소 업무평가가 높은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터라 아이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를 미국지사로 발령 내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자네 눈에 들어올 정도면 능력은 이미 검증된 거고, 그런 인재를 놓친다는 건 회사로서도 손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흠…….

생각 끝에 현성이 말을 이었다.


“그럼 새로운 팀장을 서둘러 채용해야겠군.”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재현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진행 중인 뷰티라인 마케팅이 워낙 큰 프로젝트라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후임으로 왔으면 합니다.”

“능력이 검증된 사람? 그게 누군데?”

“그게……. 지훈이가 어떨지.”

재현은 지훈이 어떤 이유로 마케팅팀의 팀장을 그만두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훈이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자였으니 저도 이 팀장도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하긴. 지훈이라면 안심이긴 하지.”

재현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계속 맡아달라는 건 아니고, 이번 출시 제품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러니까 자네 부탁이라는 게 이 팀장 미국지사 발령이랑, 지훈이 마케팅팀 팀장 복귀. 이 두 가지라는 거지?”

재현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어려울 일이라고. 발령 건이야 바로 진행 가능 하고, 지훈이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보지. 아마 임시직이라고 하면 크게 거부하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사를 위한 일인데 감사는 무슨 감사야.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지 알고 걱정했다고.”

현성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재현 전무가 돌아가고 현성은 휴대폰을 들어 곧바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얼굴이 왜 저렇게 까칠해진 거야?’

인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수아의 얼굴엔 어느새 걱정스러운 표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제 끝내리라 독하게 마음을 먹었었다.

하룻밤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설마 밤새 한숨도 못 잔 건가?’

굳게 닫았다고 믿었던 마음의 문틈 사이로 못다 정리한 감정 하나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부회장님]

하준을 마주한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을 다잡으려 일부러 힘주어 부른 호칭이었다.

그래. 부회장.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이어질 수 없는 사이야. 흔들리지 말고 일에만 집중하자.

수아는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수아 씨. 점심 먹으러 같이 가요.”

옆자리에 앉은 희수가 말을 걸어왔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그제야 시계를 확인한 수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직원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업무 관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그나저나 수아 씨. 공모전 수상이라니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불현듯 들려온 칭찬에 수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대단하긴요.”

“이번 공모전 경쟁률 엄청 셌다고 하던데 그 경쟁률을 뚫고 수상한 거면 대단한 게 맞죠.”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아요. 뭐든지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많이들 알려주세요.”

“그래요. 혹시나 일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물어봐요.”

“네. 감사합니다.”

팀원들이 건네는 말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릇을 정리하고 팀원들을 따라 식당을 나서는 길.


“지금부터 남은 점심시간은 자유롭게 사용하면 돼요. 바람 쐬러 나갔다 오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니면 어제 못한 회사 구경을 해도 되고요.”

앞서 걷던 민준이 수아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아. 그럼 둘러보면서 부서 위치를 익히고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럼 둘러보다가 이따가 사무실에서 봐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수아는 가볍게 목 인사를 하고는 민준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잠시 후.


“여기가 홍보팀 사무실이구나.”

다른 부서로 심부름 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 부서별 층수와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데,

Rrrrr.

손에 들린 휴대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왔음을 알려왔다.

[지훈 점장님]

……아. 점장님.

하준 씨에게 어제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겠지.

목적이 분명한 전화였다.

망설이는 손끝으로 거절 버튼을 눌렀는데, 또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다은이]

발신인을 확인한 수아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 뒤 눈앞에 보이는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휴식시간인 거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회사들 점심시간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현성이라고 뭐 다르겠냐?]

“하긴. 그렇긴 하지.”

[회사 일은 어때? 잘하고 있어?]

“첫날인데 잘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긴장의 연속이지.”

[……만났어?]

망설이는 목소리로 건넨 주어 없는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응……. 만났어.”

[괜찮았어?]

“…….”

아무렇지 않게 괜찮았다 말하고 싶은데 수아의 입술은 움찔대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야. 너 괜찮은 거야?]

“……아니.”

그래. 내가 너한테 뭘 숨기겠냐.

수아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일부러 시선도 안 마주치고, 처음 본 사람처럼 엄청 차갑게 대했거든?”

[…….]

“근데 돌아선 순간부터 그 사람 까칠한 얼굴만 생각나고, 혹시 나 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자꾸만 걱정돼.”

[그렇게 바로 후회할 거면서 왜 그랬어?]

“……그래야 끝낼 수 있을 테니까. 하준 씨도 나도.”

어찌해도 숨겨지지 않는 슬픔이 고스란히 목소리에 담겨 나왔다.


 

*



“네? 이 팀장이요?”

최재현 전무가 전한 소식을 전해 들은 지훈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그래. 하루라도 빨리 가야 한다는데, 너도 알다시피 마케팅팀이 이번 제품에 얼마나 공을 들여왔냐? 이 팀장도 가긴 가야겠는데, 마음이 많이 쓰이나 보더라.”

“…….”

이대로 복귀를 한다면 현성 유통을 맡기 위해 진행 중이던 모든 일들을 멈춰야 한다는 것인데…….

지훈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계속은 아니고 이번 제품 자리 잡을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하던데.”

현성은 임시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계획보다 몇 달 미뤄진다고 현성 유통을 맡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알겠어요.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맞겠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던 그때.

Rrrrrr.

지훈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박 비서였다.

안 그래도 하준이 걱정되던 차였는데, 잘 되었다 싶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박 비서님.”

잠시 후. 박 비서에게 몇 마디 전해 듣던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하준이가요? 한 원장님께는 연락하셨어요? 제가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굳은 얼굴로 통화를 끝낸 지훈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발견했다.

아차.

박 비서의 말에 너무 놀라 현성과 혜선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지훈이었다.


“한 원장이라니? 하준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 아니 별일 아니에요.”

“별일이 아닌데 한 원장은 왜 불러? 숨기려고 하지 말고 말해. 어서.”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다그치듯 물었다.

하긴. 그렇게 놀라놓고 별일이 아니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긴 했다.


“사실은…….”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현성 백화점 이벤트 행사장으로 이동하던 중에 갑자기 열이 나면서 쓰러졌나 봐요.”

“쓰러져? 왜? 뭐 스트레스받는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어릴 적부터 큰 충격을 받거나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순식간에 고열이 나면서 가끔은 정신을 잃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묻는 질문이었다.


“그게…….”

“일단 가자. 가면서 얘기해.”

마음이 급해진 현성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투를 챙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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