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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음은 흔들리고 (22/105)


22. 마음은 흔들리고
2022.06.14.



“하준이 상태는 어떤가?”

“일단은 해열제랑 수액 처치했으니까 열이 잡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현성의 물음에 떨어지는 수액의 양을 조절하던 한 원장이 답했다.


“제가 수시로 열 체크해볼게요.”

“그래. 지훈이 네가 고생 좀 해라.”

“고생은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상태 보고 연락드릴게요.”

가방을 챙겨 든 한 원장은 지훈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현성에게 인사를 전한 뒤 방을 나섰다.


“그 아가씨 이름이 수아라고?”

한 원장이 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자 현성은 그제야 오는 길에 들었던 수아에 대해 물었다.


“네. 이수아요.”

“하준이가 못하면 너라도 나서서 설득해보지 그랬어?”

지훈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파서 누워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설득도 연락이 돼야 하죠. 말하기 싫은 건지 제 전화는 아예 받지도 않아요.”

“통화가 안 되면,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면 되잖아.”

“네?”

현성이 건넨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지훈이 되물었다.


“통화가 안 된다면서. 그럼 회사로 직접 찾아가서 얘기해보지 그랬냐고.”

“회사에 저를 아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랑 수아가 만나고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잘못하면 공모전에 대한 공정성까지도 거론될 수 있어요.”

눈가에 힘을 주며 진지하게 말하는데,

잠시 생각하던 현성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키웠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직접 만나서 설득해볼 수 있겠네.”

“네? 그게 무슨…….”

“너 말이야. 이제 마케팅팀으로 복귀할 텐데, 그렇게 되면 수아 양이랑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하긴. 그렇겠네.

지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네가 옆에 있으면서 연애 노하우 같은 것도 좀 알려주고 그래.”

노하우랄 것까지야.

지훈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는데,


“하준이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화해를 해도 걱정이었는데, 이제야 안심이 좀 되네.”

현성이 지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는 톡톡 두드렸다.


“지훈이 네가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는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깨 위로 무거운 책임감 하나가 툭 얹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수아 씨. 좋은 아침입니다.”

수아를 발견한 민준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수아 씨. 혹시 아침에 회사 공지사항 확인했어요?”

“어떤 공지사항이요?”

민준이 공지사항이 떠있는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저희 팀에 새로운 팀장님이 오실 거라고 공지 떴잖아요.”

“오늘부터요? 이렇게 갑자기요?”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하룻밤 사이에 팀장이 교체된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놀라움에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갑자기는 아니고요. 저희 팀장님은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신 상태거든요. 새로운 팀장님이 뽑히면 처리해주신다고 하셨다는데, 어제 결정이 되었나보네요.”

얼굴 가득 물음표를 담고 있는 수아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민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 그렇구나.”

“안 그래도 좀 전에 정 대리한테 연락 왔는데, 벌써 출근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빨리 올라갑시다.”

“네.”

수아와 민준은 새로운 팀장이 지훈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모두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네며 사무실로 들어선 민준과 수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잠시 후. 파티션 위로 머리가 조금씩 보이더니 이윽고 팀장이라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점장님?’

이건 또 무슨 상황?

진짜 지훈 점장님이야? 아니면 그냥 똑같이 생긴 그거 뭐냐 그…… 그래! 도플갱어! 그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도플갱어까지 생각하고 있는 수아의 동공은 지진을 만난 듯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팀장님! 다시 복귀하신 겁니까?”

당황한 수아와는 달리 지훈이 마케팅팀 팀장이던 시절 함께 근무했던 민준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뭐 반가운 사람이라고 이렇게 격하게 반겨? 민망하게.”

“언제쯤 복귀하시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격하게 안 반기게 생겼습니까?”

“이렇게 목 빠지게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고, 감동인데?”

“진짜 잘 오셨어요. 환영합니다. 팀장님.”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은 그전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듯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수아만 굳은 표정이 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부회장인 하준 씨에 이어, 팀장님인 점장님?

도대체 나한테 왜들 이러는 거야.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던 그때.


“신입사원 이수아 씨? 저도 급하게 발령받은 거라 갑작스럽긴 하지만 같이 적응하면서 잘 지내봅시다.”

진짜 도플갱어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태연한 지훈의 모습에 수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모른척하시겠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나도 그깟 모른 척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마음이 담긴 뾰로통한 말투로 인사를 건넨 수아는 곧장 자리로 향했다.


‘원래 팀장이었다고? 그럼 점장님도 나를 속인 거야?’

수아는 밀려드는 배신감에 지훈의 파티션을 바라보며 눈으로 거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뭔가를 느꼈는지 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수아가 재빠르게 시선을 거뒀다.


“회의합시다.”

지훈의 말 한마디에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


“오늘은 제가 첫날이기 때문에 업무 파악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앞으로 진행될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부터 시작합시다.”

팀원들은 저마다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브리핑을 했고, 빠르게 내용을 파악한 지훈은 어떻게 진행하는 것이 더 좋을지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했다.


‘편의점에서는 매일 장난만 치더니…….’

차분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지훈에게서 지금껏 보아왔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회의는 어느덧 점심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팀장님. 첫날부터 너무 달리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직원들 밥은 먹여가면서 일을 시키셔야죠.”

뱃속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소리에 시계를 바라보던 팀원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미안합니다. 나머지는 식사 후에 진행하도록 하죠.“

지훈과 팀원들은 서둘러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 앉으려나?’

함께 앉기엔 왠지 껄끄러울 것 같아 수아는 지훈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그와 가장 먼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지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분 좋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이수아 씨는 식사 끝나는 대로 잠깐 저 좀 보시죠.”

어느새 식사를 마친 지훈이 수아를 향해 말했고, 동시에 함께 앉아 있던 직원들과 수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저요? 왜, 왜요?”

수아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거렸다.


“새로운 팀장과 신입사원의 면담이라고 해두죠.”

지훈은 웃는 얼굴로 폭탄을 던진 채 식판을 들고 유유히 멀어져 갔다.

아. 싫은데. 하준 씨 얘기하려는 거잖아.

겨우 다잡은 멘탈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부, 부르셨어요?”

수아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지훈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직원들 오기 전에 빨리 들어오시죠. 이수아 씨.”

“네…….”

수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느릿하게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멀어진 마음만큼이나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채로 불퉁하게 물었다.


“일단 미안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뭐가요?”

“나도 너를 속인 꼴이 되었으니까.”

“점장님이 팀장님이었다는 거요?”

“아니. 그건 속인 게 아니야.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팀장직은 내려놓았으니까.”

“그럼 뭘 속였다는 건데요?”

“사실 하준이랑 나는 친구가 아니라 친척이야.”

“친척이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되물었다.


“우리가 친구건 친척이건 너한테는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말하는 거야.”

“그거 얘기해 주시려고 부르신 거예요?”

하준 씨 얘기가 아니었구나. 안심하며 묻는데.


“하준이가 아파.”

갑작스러운 말에 수아의 시선이 급하게 지훈을 향했다.


“아파요? 어디가 아픈데요? 얼마나 아픈데요?”

수아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질문을 쏟아냈다.


“걱정은 되나 보다?”

“그, 그건…….”

잠깐 떨어졌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붙었다.


“네가 이해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네가 이해 못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어. 바로 하준이가 살고 있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세계가 바로 그거야.”

그래. 상류층 사람들의 세계.

내가 돌아서야만 했던 그 세계.


“하준이가 부회장이 된 순간부터 옆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접근하는 여자들이 많았어.”

“…….”

“자신의 배경만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준이는 항상 고통스러워했지. 그러다 너를 만난 거야. 부회장이라는 직책이 없어도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

“하준 씨가 부회장이라는 걸 알면 저도 다른 여자들처럼 돈에 눈이 멀 것 같았나 보죠?”

수아는 일부러 매정한 말투로 따져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저 두려웠던 거야.”

“그러니까요. 제가 다른 여자들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는 거잖아요.”

이미 엉킬 대로 엉켜버린 마음은 생각과는 다른 모진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지훈의 입술이 어렵게 열렸다.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준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인 것 같다.”

여전히 망설여지는 듯 지훈은 무거운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하준이는 10살 때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어. 그 후에 큰아버지. 그러니까 현성 그룹 회장님한테 입양되었고.”

“…….”

“그렇게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이후로 믿었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 지금도 그 트라우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입양아라고? 부모님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애써 담담한 척해보려는데 자꾸만 손끝이 떨려왔다.


“지금도 너한테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대고 있잖아.”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건데요?”

“어제 너 만나고 난 뒤로 갑자기 열이 나면서 쓰러졌어.”

“쓰러졌다고요?”

“응. 해열제를 맞았는데도 밤새 열이 떨어지지 않는 데다가 아직까지 정신도 못 차리고 있어.”

표정이 저렇게 굳어 있는 걸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아직 혼란스러울 너한테 이런 부탁하는 거 진짜 미안한데, 내가 급하게 출근하느라 하준이를 혼자 두고 나왔거든? 네가 좀…….”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왔다고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미간을 잔뜩 좁힌 수아가 언성을 높이며 말허리를 잘랐다.


“아니. 나도 출근은 해야 하니까. 그리고…….”

나보다는 네가 필요할 테니까.

말을 하려는데 타이밍 좋게도 잠깐의 티타임을 가졌던 팀원들이 하나 둘 회의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아 씨. 지금 제가 이야기한 부분이 실제로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직접 매장에 가서 확인해보도록 하세요.”

지훈은 직원들이 들으라는 듯 수아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시장 조사가 끝나면 오늘은 바로 퇴근하시고요. 보고서는 작성되는 대로 저한테 직접 제출하시면 됩니다.”

“네?”

갑자기 매장이라니? 시장조사라니?

당황한 수아의 시선이 지훈을 향하자 지훈은 찡긋하고는 빠르게 한쪽 눈을 깜빡였다.


“뭐합니까? 빨리 출발 안 하고?”

아. 하준 씨한테 가보라는 말이구나.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제야 지훈의 의도를 알아챈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벗어났다.


“팀장님! 오늘이 두 번째 출근인데 벌써 시장조사를 시키시는 거예요? 그러다 이수아 씨 도망가면 어쩌시려고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직원들과는 달리 지훈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수아야. 너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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