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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여기 내 옆에 있어요 (23/105)


23. 여기 내 옆에 있어요
2022.06.18.


하준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택시 안.

수아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결혼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민철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그와의 이별 후 수아는 스스로 다짐했었다.

다시는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엮이지는 않겠다고.

다시는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랑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그것이 지레 겁먹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겁쟁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하준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형체 없는 마음이 언제 이렇게 커졌던 걸까.

민하준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지만 노력하면 될 것 같았다.

민철을 보낼 때도 그랬으니까.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던 그 시간도 결국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무뎌졌던 것처럼 하준과의 사랑도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프다는 지훈의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온통 그에 대한 걱정뿐이라니.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어쩌면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나지 않는 일.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일.

약 봉투가 들린 수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택시는 어느새 하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고, 택시에서 내린 수아는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후우…….”

깊은숨을 한번 들이쉰 후에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떨리는 손으로 13층을 눌렀다.

수아의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적막한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걸음을 서둘러 이내 하준의 문 앞에 도착했다.


“1, 2, 3, 4.”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와의 추억 속에서 비밀번호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열렸다.

함께 들어섰던 그 날처럼 집안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수아의 움직임을 인식한 센서 등이 켜지고 나서야 거실 바닥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수아는 망설임 없이 하준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하아.”

조심스레 문을 열고 침대로 향하는데,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가까이에서 바라본 하준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머리칼은 잔뜩 젖어 있었고, 푸른빛의 베개도 땀으로 흠뻑 젖어 짙은 남색 빛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고열로 인해 두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쉬기가 어려운지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10살 때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어.]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


[너한테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서 혼자 끙끙대고 있잖아.]

이제야 알겠다.

내 상처가 가장 아프다고 투정 부리면서 나는 당신에게 그보다 몇 배는 더 아팠을 상처를 안겨주었구나.

수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한참 동안 하준을 바라보던 수아는 일단 약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약과 함께 사 왔던 죽을 꺼내 그릇에 담아 다시 방으로 들어서던 그때.

하준의 입에서 흐릿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씨. ……씨.”

응? 뭐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그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대는데,


“……수아 씨. 수아 씨.”

정신도 채 들지 않은 하준은 그 와중에도 수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이렇게 아픈데도 나를 찾는 거야.

마음이 돌덩이가 얹어진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흔들었다.


“하준 씨. 일어나 봐요. 하준 씨.”

“으음…….”

간절히 원하던 수아의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하준의 눈꺼풀이 가늘게 열렸다.


“하준 씨. 정신이 들어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수아가 하준의 얼굴을 확인하려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멍하니 허공을 향하던 하준의 시선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했다.


“……수아 씨.”

탁하게 잠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수아 씨.”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듯 무거운 팔을 들어 손을 뻗으려다,

멈칫.

가늘게 떨리는 그의 손이 수아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에게 닿아보려, 그녀를 잡아보려 욕심을 내는 순간 그대로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더는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꿈이겠지. 꿈일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하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고마워요. 꿈에라도 와줘서. 꿈에라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수아가 멀어지려는 하준의 손을 서둘러 붙잡았다.


“하준 씨. 저 수아예요. 많이 아픈 거예요?”

도대체 열이 얼마나 나고 있는 것인지 손에서도 후끈거리는 온도가 느껴졌다.


“바보같이 왜 이러고 있어요. 사람 마음 아프게…….”

“미안해요. 미안해요.”

뭐가 그리 미안한지 연신 미안하다는 하준의 모습에 또다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다 낫기만 해봐. 지금보다 더 아프게 때려줄 거니까.”

 

*

침대에 기대앉은 하준의 시선이 죽에 바람을 불며 식히고 있는 수아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하준의 입술이 어렵게 떨어졌다.


“수아 씨. 저는…….”

“아 해봐요. 아.”

수아는 하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 가까이 수저를 가져다 댔다.


“일단 먹어요. 이야기는 죽이랑 약 먹은 다음에 해요.”

“…….”

하준은 힘겹게 입을 벌려 수아가 전해준 죽을 받아 삼켰고, 죽을 먹는 내내 수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요. 사람 민망하게.”

“아직도 꿈인 것 같아서요. 수아 씨가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서요.”

내가 뭐라고 이렇게 아파하고, 또 이렇게 좋아할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수아는 그저 수저 위의 죽에 바람만 불뿐이었다.

어느새 비워진 죽 그릇을 내려놓은 수아는 준비해둔 물과 약을 건넸다.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하준은 수아가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랐다.


“이제 조금 더 자요. 한숨 자고 나면 열이 좀 내릴 거예요. 우리 얘기는 그때 하는 거로 해요.”

눈만 깜빡이고 있는 하준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이마에 올릴 물수건을 가지러 일어서려는데,

하준의 손이 다급하게 수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요? 집에 가려고요?”

얼굴 가득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요. 열 좀 내리게 물수건 가지러 가요.”

“안 가면 안 돼요? 나 물수건 없어도 되는데…….”

마치 엄마에게 매달린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금방 올게요. 하준 씨 다 나을 때까지 어디 안 가고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볼은 볼 터치한 토끼처럼 벌겋게 익어 있고, 눈은 또 왜 이리 초롱초롱한 건지.

아픈 사람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금방 온다니까요. 숫자 100만 세요. 그 안에 올게요.”

“……50 안에 오면 안 돼요?”

“그래요. 50. 50 안에 올게요. 됐죠?”

“네. 꼭 50 안에 와야 해요. 지금부터 세요. 하나, 둘”

하준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수아는 욕실로 들어가 수건과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숫자를 세던 하준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서둘러 돌아와 살피는데, 고열 때문인지 약 기운 때문인지 어느새 잠이 든 하준은 쌕쌕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수아는 피식 웃으며 준비한 물수건을 이마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다른 수건으로 하준의 손과 얼굴, 목 부근을 차례로 닦았다.

몸도 닦는 게 좋으려나?

수아의 두 손이 하준의 잠옷 단추 제일 위 칸에서 멈췄다.


‘나는 간호를 하는 거야. 아무런 사심도 없어. 아픈 사람을 상대로 이상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수아는 두 손의 엄지와 검지만 세워 조심스레 단추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단추가 열리고, 겹쳐 있던 잠옷이 펼쳐지며 감춰져 있던 하준의 몸이 드러났다.


“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술을 비집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단단한 가슴근육과 탄탄한 복근이 땀에 젖은 채 하준의 숨결에 따라 영롱한 빛을 뿜으며 낮게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순간 정신이 번뜩 든 수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로 세차게 저었다.


“이건 마네킹이야. 마네킹!”

물에 적신 물수건이 하준의 가슴팍에 닿았다.


“음…….”

수건이 차갑게 느껴졌는지 하준이 미간을 좁히며 옅은 신음 소리를 냈다.


“조금만 참아요. 이렇게 해야 열이 빨리 내려요.”

수아의 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하준의 신음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



“으음…….”

하준은 아직 채 내리지 않은 열로 온몸의 뻐근함을 느끼면서도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려 방안을 살폈다.


‘수아 씨!’

자신의 방에 수아가 없음을 알아챈 하준은 덮고 있던 이불을 다급히 걷어내고는 거실로 뛰쳐나갔다.


“수아 씨! 수아…….”

“깼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수아가 급히 일어나 하준을 바라봤다.


“…….”

멍하니 수아를 바라보던 하준은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한품에 안았다.


“꿈인가 했어요. 수아 씨 손길도, 목소리도. 모두 다 꿈이었을까 봐 무서웠어요.”

여전히 뜨거운 숨결에 실린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꿈 아닌데. 다 나을 때까지 안 간다고 했잖아요.”

“그럼 안 나아도 돼요. 죽을 때까지 아파도 괜찮아요.”

하준의 말에 수아가 미간을 좁히며 맞닿은 몸을 떼어냈다.


“어허!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아.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기가 죽은 듯 몸을 움츠리는 하준이 귀여워 미소를 보일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바로 그때. 긴장이 풀렸는지 눈앞이 핑 돌더니 하준의 다리가 휘청였다.


“하준 씨 괜찮아요? 아직도 어지러워요? 그러게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나왔어요. 빨리 여기 앉아요.”

수아는 하준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물 좀 마실래요? 물 가져다줄게요.”

“괜찮아요. 여기 내 옆에 있어요.”

하준의 말이 주방을 향하려던 수아의 걸음을 붙잡았다.

잠시 동안의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하준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수아 씨…….”

“제가 먼저 얘기할게요.”

수아가 다급히 하준의 말을 막았다.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로 인해 깨어진 우리의 신뢰.

신뢰라는 단어에 하준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그래서 하준 씨가 저를 속였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에요.”

이제 헤어짐의 말을 하려나 보다.

하준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하준을 바라보며 수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기로 했어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하준의 고개가 획 들렸다.


“제가 하준 씨 용서해 주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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