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불안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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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안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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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안하긴 하지만
2022.06.21.
“제가 하준 씨 용서해 주겠다고요.”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내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내 결심과 두려움의 크기는 그에 대한 사랑과 비교될 정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뭐라고…….”
하준이 지금껏 피하던 시선을 다급히 맞춰왔다.
“마음 넓은 제가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준다고요.”
말을 마친 수아가 두 손바닥으로 하준의 양 볼을 잡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프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수아의 두 손에 잡힌 채 하준은 고개를 위아래로 격하게 끄덕였다.
“또 이렇게 걱정시키면, 그때는 진짜 안 볼 거예요. 알겠어요?”
“네. 네. 무조건 알았어요.”
하준은 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떠난다고 말하지 않아 주어서 진짜 고마워요.”
수아는 환하게 웃는 하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떠나보낼 수가 없다.
아니. 떠나보내기가 싫다.
언젠가 거대한 파도가 또다시 나를 덮쳐온다고 해도, 지금만큼은 후회 없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하준이 두 팔을 벌려 안으려는데, 수아가 손바닥을 보이며 제지했다.
“……?”
“한 가지 더 말해둘 게 있어요.”
“뭔데요?”
하준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팔을 멈춘 채로 물었다.
“회사에서는 절대 비밀.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해줘요.”
수아의 말에 좀 전까지 예쁘게 호선을 그리던 하준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왜요? 왜 비밀로 해야 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하준의 물음에 수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사람이 진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저는 이제 갓 취직한 신입사원인데, 부회장님이랑 연인 사이라고 알려져 봐요. 다들 고운 시선으로 보겠어요?”
“연인 사이요?”
삐져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입술을 말아 문 하준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진짜.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제 말 제대로 듣고 있는 거예요?”
버럭 높아지는 수아의 언성에,
“네. 제대로 듣고 있습니다. 계속하시죠.”
하준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가 여전히 볼을 붉히고 있는 탓에 미덥지는 않았지만, 수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려서 손해 보는 건 제 쪽이 아니라 오히려 하준 씨일 거예요. 일개 신입사원이랑 연관되어서 좋을 게 없어요.”
“저는 그런 거 상관없는데요.”
“제가 상관있어요. 어렵게 준비해서 들어간 회사에서 낙하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낙하산이라니.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선택한 단어가 너무 극단적이다 싶었는지 수아가 곧장 말을 덧붙이려는데,
“미안합니다. 제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아 씨가 말한 대로 할게요. 절대 비밀.”
하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며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입술 가득 웃음을 담은 수아는 소파에 기대앉은 채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톡톡 쳤다.
“제 어깨 진짜 비싼 어깨라 아무한테나 안 빌려주는데, 특별히 오늘만 빌려줄게요. 빌려 써 봐요.”
“고마워요.”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하준이 천천히 수아에게 기대왔고, 수아는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준 씨.”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하준은 가만히 수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준 씨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요.”
“…….”
“언젠가는 하준 씨도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거나 필요해질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눈을 키운 하준이 재빠르게 상체를 세우며, 수아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아니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절대!”
적잖이 당황했는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만약이란 것도 없어요. 내가 먼저 수아 씨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어요.”
너무도 단호하게 말하는 하준의 모습에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알겠어요. 알겠는데, 일단은 제 얘기를 먼저 들어봐요.”
끄응.
수아의 말에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말을 막으려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때는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요. 마음은 아프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비참하게 상처받는 것보다는 덜 아플 거예요.”
말아 문 입술이 벌어지고,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저야말로 수아 씨가 지금이라도 떠난다고 할까 봐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그래. 내 지난 사랑의 상처보다 짐작도 못 할 만큼의 큰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당신에게 더 이상 약속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알겠어요. 이런 아픈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요.”
수아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하준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준의 밝은 웃음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으나, 수아의 가슴속 불안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준 씨와의 비밀연애. 잘해나갈 수 있겠지?’
*
이른 아침.
협탁 위에 올려진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음…….”
수아는 요란한 알람 소리에 휴대폰을 찾으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지는 순간 헉!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하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준 씨가 왜 내 옆에?
분명 어제 하준이 잠드는 것을 확인한 뒤에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째서 우리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
설마 또?
수아는 펜션에서 하준이 잠들어 있던 침대를 찾아갔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욕구불만.]
불현듯 떠오른 한 단어에 수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음……. 수아 씨 잘 잤어요?”
수아의 움직임에 잠에서 깬 하준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물어왔다.
“어제 분명히 소파에서 잤는데, 제가 왜 침대에 누워 있는 걸까요?”
당황하며 묻는 질문에 하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불편할 것 같아서 새벽에 제가 침대로 옮겼어요.”
“아. 그랬구나.”
그날처럼 제 발로 걸어와 옆에 누운 게 아니었구나.
하준의 대답을 듣기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식은땀이 흐르던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순간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번뜩 뜨고는 협탁 위에 올려둔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
36.8도.
“다행히 열은 다 내렸네요.”
“수아 씨 덕분이에요. 저 간호해 주느라 피곤했을 텐데 수아 씨는 잘 잤어요?”
“네. 저는 잘 잤어요. 하준 씨는요?”
예의상 묻는 말이었는데, 하준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저는 잘 못 잤는데요.”
“왜요? 저 잠버릇 그렇게 심하지 않은데?”
수아의 엉뚱한 대답에 하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수아 씨는 가만히 누워서 잘 자는데 저는 왜 잠을 잘 못 잤을까요?”
“그게 무슨…….”
말끝을 흐리던 수아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이내 수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머!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니 무슨 생각을 했길래 얼굴이 그렇게 빨개졌어요?”
“아, 아무 생각도 안 했거든요? 참나. 무슨 그런…….”
당황해하며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나던 수아의 시선에 시계가 들어왔다.
이미 출근 준비를 시작했어야 할 시간.
“악! 어떻게 해. 출근! 옷 갈아입으러 갈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수아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준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옷으로 갈아입어요.”
하준이 옷장 속에서 꺼내든 원피스 하나를 건넸다.
“어? 무슨 원피스예요?”
수아가 원피스를 받아들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사실 이 원피스는 수아가 서류접수를 끝냈다고 이야기하던 그때 그가 준비했던 선물이었다.
서류가 붙고, 안 붙고를 떠나서 준비하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며 전해주려던 옷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꽤 긴 시간 동안 주인을 찾아가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빨리 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아 씨 주려고 전에 사두었던 겁니다. 한번 입어봐요.”
원피스를 받아든 수아가 눈을 깜빡이며 하준을 바라봤다.
“……?”
수아의 눈빛을 이해하지 못한 하준은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옷 갈아입는 거 보고 있을 거예요?”
수아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아차! 수아의 얼굴을 보고 있느라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하준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하준이 급히 사과한 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제가 밖의 욕실을 사용할 테니까 수아 씨가 침실 욕실을 써요. 준비 끝나면 거실에서 봐요.”
하준이 방을 나서자 수아는 손에 들린 원피스를 살폈다.
단정한 디자인의 정장 원피스였다.
하준 씨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구나.
앞으로 옷을 구입할 때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최대한 서둘러 준비를 마친 수아가 거실로 들어섰다.
하준은 언제 준비를 마쳤는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수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하준을 향해 서둘러 뛰어갔다.
어느새 하준의 눈앞까지 다가온 수아는 고개를 바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때요? 옷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냐고 묻고는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도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네. 너무 잘 어울립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수아와 하준은 서로 웃어 보이며,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맞잡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
주차장을 빠져나온 하준의 차는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고, 회사가 가까워질수록 수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수아가 고개를 돌려 하준을 바라봤다.
“하준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 알고 있습니다. 절대 아는 척하지 않기. 절대 티 내지 않기. 맞죠?”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 수아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도 불안해. 불안해.’
저렇게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이면서 하는 대답이 불안감을 잠재울 리가 없었다.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요. 저는 저 앞에서 내려줘요.”
수아가 근처 인도를 가리켰다.
“여긴 회사에서 너무 먼데요? 회사 주차장에서 내려주면 안 돼요? 거긴 직원들도 별로 없을 텐데.”
“안 돼요. 그냥 여기에서부터 걸어가는 게 나아요. 저는 차도 없는데 주차장에서 올라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아…….
하준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수아 씨 이렇게 치밀한 사람이었습니까?”
당신이 너무 긴장감이 없는 거지.
여전히 불안함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어! 여기! 여기에서 내려줘요. 적당히 거리도 멀고, 인적도 드물고.”
“알겠어요.”
수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준은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따가 볼 수 있으면 봐요.”
아쉬운 하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차 문을 닫으며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와요.”
“알겠어요. 어서 가요.”
수아가 먼저 가라는 듯 손짓했고, 하준의 차는 천천히 수아의 곁을 지나쳐갔다.
조금 먼 곳에서부터 걸어오느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서두른 탓에 지각하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메시지 알림이 떴다.
컴퓨터와 연결된 메시지 알림 창을 클릭했다.
[하준이랑은 어떻게 됐어?]
지훈이었다.
수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지훈의 책상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수아를 보고 있었던 건지 지훈과 금세 시선이 마주쳤다.
수아는 마주쳤던 시선을 거두고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팀장님 덕분에 잘 해결했어요. 감사해요.]
메시지 입력을 마치 수아가 다시 시선을 올려 지훈을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역시 이수아.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
대답의 의미로 지훈도 슬며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Rrrrrr.
지훈의 책상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네. 마케팅부 팀장 민지훈입니다.”
지훈은 수화기 건너편 사람의 이야기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통화를 마쳤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아를 바라봤다.
“이수아 씨.”
“네?”
“부회장님께서 공모전 기획안 관련 사항으로 부르신다고 하시네요. 지금 저랑 같이 가죠.”
부회장님의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