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마음껏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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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껏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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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껏의 기준
2022.06.25.
“부회장님. 마케팅부 민지훈 팀장님과 이수아 씨가 오셨습니다.”
지훈과 수아는 박 비서에게 짧게 인사를 전하고는 부회장실로 들어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수아 씨 왔어요?”
“저희 헤어진 지 한 시간도 안 지났습니다. 부회장님.”
수아는 어느새 문까지 다가와 반기는 하준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둘이 있을 때는 그 호칭 안 붙이면 안 돼요?”
부회장실에서 처음 만났던 날의 충격 때문일까. 하준은 부회장님이라는 호칭에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안 돼요. 둘만 있더라도 회사에서는 조심해야죠.”
둘이라니?
대화를 듣고 있던 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너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수아와 하준의 시선이 지훈에게로 향했다.
“자꾸만 둘, 둘, 거리는데, 여기 너희 둘만 있는 거 아니고 나도 있거든? 그러니까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
잔뜩 가시를 세우며 말을 하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시선을 빠르게 거둬갔다.
“수아 씨. 일 힘들지 않겠어요? 마케팅팀 힘들 텐데. 외근도 많고, 회의도 많고…….”
하준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아를 향해 물었다.
“그 마케팅팀을 이끌어가고 있는 내가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은 안 하냐?”
지훈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시장조사 핑계대고 이수아 보내준 게 누군데. 이런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애초에 생색내려 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아쉬울 게 없다는 듯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듯했다.
화났네. 화났어.
“그래. 민지훈. 네 덕이다. 고맙다. 아주 고마워.”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하준이 서둘러 말했다.
“그래도 아니 다행이다.”
옆구리 찔러 받은 절도 절이었는지, 지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겼다.
“수아 씨가 지훈이와 함께 있어서 안심이 됩니다. 지훈이가 은근히 일도 잘하고, 팀장으로서도 든든하거든요.”
기대하지 않았던 하준의 칭찬이 더해졌다.
“이미 알고 있죠. 어제 회의하는 것만 봐도 딱 알겠던데요? 어제 완전히 멋졌잖아요. 저 진짜 반할 뻔했다니까요.”
수아의 두 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분위기 맞춰 대화를 이어가던 하준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
“진짜예요?”
“네? 뭐가요?”
느닷없는 하준의 질문에 수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훈이한테 반했다는 거 말이에요.”
내가 언제 반했다고 했어. 반할 뻔했다고 했지.
그리고 그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
수아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담겼다.
“팀장님. 저 말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겠죠?”
“완. 전. 히.”
이 와중에도 질투를 해야겠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하준의 모습에 수아와 지훈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왜 웃는 거야?
자신의 발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 하준은 눈만 연신 깜빡거렸다.
“아 참! 그건 그렇고. 공모전 기획안 중에서 어떤 것 때문에 부른 거예요?”
그제야 하준을 찾아온 목적이 생각난 수아가 물었다.
“아! 그거요? 그러니까 그게…….”
하준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데.
“너는 그걸 진짜 믿었어?”
이번엔 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너는 하준이 질문에 웃을 처지가 아니었네.
“그냥 너 얼굴 한번 보려고 부른 거잖아.”
그걸 몰랐냐는 듯 지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말했다.
“진짜예요? 진짜 그래서 부른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이 사람이 진짜. 아침 내내 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수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따져 묻자 하준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는 이유 없이 부르지 말아요. 또 그러면 그때는 진짜로 화낼 거예요.”
지금도 화내고 있으면서.
“네…….”
하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팀장님. 이제 그만 가요.”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수아를 하준이 붙잡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이왕 이렇게 온 거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 돼요. 여기 오래 있으면 눈치 보여요.”
“누가 수아 씨한테 눈치를 줍니까?”
“부회장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신입사원에게 있어서 눈치란 누가 주지 않아도 스스로 봐야 하는 거랍니다.”
아씨. 말하고 나니 씁쓸하네.
“아무튼 우리는 이따가 퇴근하고 마음껏 보는 거로 해요.”
“마음껏이요? 마음껏이라면 얼마큼을 말하는 건데요?”
당신과 내가 생각하는 마음껏의 의미가 많이 다를 텐데.
하준의 눈빛에 약간의 음흉함이 섞였다.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당황할 수아가 아니었다.
“하준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아예 사라지기도 할 만큼의 양?”
수아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부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사라지기도 한다고?
그럼 퇴근하고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야?
별 뜻 없이 던진 수아의 말에 하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
수아는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바쁜 오전을 보냈다.
어느덧 찾아온 점심시간.
같은 팀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웅성웅성 소리와 함께 구내식당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자리가 없어 식당의 제일 안쪽에 앉아 있던 수아는 목을 쭉 빼고는 주변을 살폈다.
‘어? 하준 씨다.’
수아의 시선이 구내식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하준에게서 멈췄다.
“어머. 부회장님이시잖아.”
옆에 앉아 있던 같은 팀 희수의 말을 시작으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직원들의 말이 이어졌다.
“부회장님께서 구내식당에는 어쩐 일이시지?”
“그러게. 나 입사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오늘 복권 사야겠다.”
갑작스러운 부회장의 등장이 당황스럽긴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이렇게 어수선한데 하준의 표정은 햇살을 머금은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준은 어느 한 곳에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채 점점 거리를 좁혀왔고 그의 걸음은 목적지를 정해둔 듯 거침이 없었다.
‘설마 같이 점심을 먹겠다고 온 건 아니겠지. 아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또 그러려는 건 아니겠지.’
애써 부정해보려는데,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불안함을 잠재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아니어야 해.
수아가 주문인지 기도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는 사이, 하준은 어느새 수아의 테이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진짜 왔어.
너무 놀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수아와는 달리 하준의 표정은 얄미울 만큼 태연했다.
“이수…….”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하준의 입술이 벌어짐과 동시에 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의 말을 막았다.
“……?”
입을 나서지 못한 말을 삼키며 하준이 지훈을 바라봤다.
“부회장님께서 구내식당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여긴 도대체 왜 온 거냐? 이 눈치 없는 자식아.
“아. 직원들의 복지관리 차원에서 구내식당 체크를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수아 씨 보러 왔지.
“저희 현성 그룹 구내식당은 근처 회사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매우 잘 운영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지훈이 눈썹에 힘을 주며 턱을 살짝 오른쪽으로 꺾었다.
빨리 나가라는 신호였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다들 맛있는 식사하십시오.”
다들이라 말하면서도 하준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만 향하고 있었다.
“부회장님도 어서 가셔서 식사하시죠.”
“네. 그럼 이만.”
수아를 보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하준은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려 구내식당을 빠져나갔다.
[야! 민하준. 너 자꾸 이렇게 티 낼래?]
지훈은 하준이 식당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분명 메시지인데, 음성지원처럼 지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내가 뭘? 아까 말했듯이 나는 직원들 복지 향상을 위해 힘쓸 뿐이야.]
[복지 향상은 무슨. 이러면 수아가 불편해지는 거 몰라?]
[왜? 왜 불편해?]
[야 이 순진한 부회장 놈아! 제발 티 좀 내지 말자. 회사에서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며.]
[티 안 냈다니까.]
티를 안 냈다니.
지금껏 내려와 보지도 않던 놈이 식당에 온 것도 모자라서 수많은 테이블 중에서 하필 우리 테이블로 찾아온 건! 그건 티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가 따로 없었다.
[그냥 수아가 회사에 없다고 생각해!]
지훈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하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생각하라는 거야?”
하준은 눈썹 끝을 내린 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점심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책상에 앉아 있는 하준의 표정이 심각했다.
“부회장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결재서류를 전하기 위해 들어왔던 박 비서가 하준의 표정을 살폈다.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순간 박 비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지금껏 업무 이외의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개인적인 일이라니. 박 비서가 놀랄 만도 했다.
“그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네.”
하준의 말에 박 비서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발끝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하준의 시선이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향했다.
[데이트 코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좋아하던 수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지식이 많은 사람들의 힘을 빌려보려 함이었다.
정보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라면 문제인 걸까.
꽤 오랜 시간을 찾았는데도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부회장실의 문이 열렸다.
“이거 우리 마케팅팀 오전 회의자료.”
지훈이었다.
“어. 주고 가. 조금 이따가 확인할게.”
“너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미간은 좁아져 있었고, 시선은 모니터를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뭔데 그래?”
지훈이 재빠르게 모니터 화면을 살폈고, 가려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거였냐?”
“흠. 흠.”
하준이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보이는 두 볼은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뒤였다.
“너는 이런 문제가 있었으면 진작에 이 형님한테 찾아왔어야지. 일단 오늘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자.”
“극장?”
지금껏 한 번도 극장을 가본 적이 없는 하준은 극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들려왔다.
“여자들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하나?”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하준이지만 수아가 원한다면야 못 갈 이유는 없었다.
“그럼. 엄청 좋아하지. 극장에서의 로망 몰라?”
“극장에서의 로망?”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듯 하준이 눈동자를 키웠다.
하아…….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심각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하준의 모습에 지훈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 그게 바로 연인들이 극장을 가는 이유지.”
극장은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이 아니었나?
“그 로망이라는 거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는 건데?”
뭔가 대단한 내용을 기대하는 듯 하준의 표정이 진지했다.
“극장에서는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그러니까 그 로망이라는 게 말이야…….”
지훈은 숫자까지 붙여가며 하준이 극장에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하준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말을 종이에 받아 적었다.
극장의 로망이라는 거 쉽지가 않네.
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준은 혹시나 빼먹은 것이 있을까 적은 내용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퇴근할 때까지 수시로 보면서 잘 외워두라고. 알겠냐?”
“그래. 알았다.”
지훈의 과거 연애 경험들을 미루어볼 때 그는 분명 든든한 아군이었다.
하준은 주머니에 종이를 챙겨 넣고는 서둘러 수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아 씨. 우리 오늘 퇴근하고 마음껏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