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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러려고 (26/105)


26. 이러려고
2022.06.28.



[수아 씨. 우리 오늘 퇴근하고 마음껏 봅시다.]

날아든 메시지 하나에 수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제가 던졌던 말이 되돌아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데이트합시다.]

설마 그 뜻인 걸 모를까 봐 다시 보낸 건가?

수아는 피식 웃으며 알았다는 답문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둘씩 퇴근 준비를 하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수아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직원들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

점점 낮아지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확인하던 수아가 1층에서 내리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이수아 씨는 집이 저랑 같은 방향이던데, 집으로 바로 갈 거면 같이 타고 가죠.”

엘리베이터의 적막을 깨고 들려온 지훈의 목소리에 직원들의 시선이 수아를 향했다.


“아, 아니 괜찮습…….”

순간 당황해 거절하려는데,


“오. 수아 씨 좋겠다.”

“수아 씨. 태워주신다고 할 때 얼른 타고 가요.”

“그래요. 이런 기회는 그냥 덥석 무는 거예요.”

“그, 그럼 그럴까요? 감사합니다.”

수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지훈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 2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팀장님 운전 조심하시고요. 수아 씨. 내일 만나요.”

직장인의 행복은 퇴근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직원들의 걸음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아도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하다가 이내 지훈의 자동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하준이 오피스텔로 가는 거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같이 가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얘기 들었어.”

그 말을 하는데 어찌나 풀이 죽어 있던지.

혼자 보긴 참 아까운 표정이었는데 말이야.

그 표정이 다시 떠올랐는지 지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밀려 올라갔다.


“다른 직원들한테 들키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하준 씨 오피스텔은 회사에서도 가깝고,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으니까 거기에서 보자고 했죠.”

네 노력은 가상하다만, 너 혼자 애쓰면 뭐 하냐. 민하준은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지훈은 고개를 얕게 가로저으며,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잠시 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수아가 입을 열었다.


“어제는 감사했어요. 덕분에 하준 씨랑 이야기도 하고, 잘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야. 너도 큰 결심이 필요했을 텐데, 내가 더 고맙지.”

수아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준을 부탁하면서도 내심 미안했던 지훈이었다.


“그러고 보면, 팀장님은 하준 씨를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때마침 신호에 걸려 자동차가 멈추었고, 지훈이 고개를 돌려 수아를 바라봤다.


“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지훈이 눈썹을 올렸다.


“네. 어제 일도 그렇고.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그렇게 제 일처럼 나서서 도와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더구나 원래 친척도 아니었을…….”

앗.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순간 말실수를 한 것 같아 급하게 말을 이으려는데,


“아니야. 괜찮아. 사실인 걸 뭐.”

말과는 달리 지훈의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들렸다.


“많이 생각한다는 네 말, 부정은 못 하겠다.”

신호가 다시 바뀌고, 지훈은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워낙 품고 있는 상처가 큰 데다가, 속에 있는 감정을 내보일 줄을 모르는 녀석이라서 말이야.”

정면을 보고 있어 지훈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다.


“상처가 곪아 터질 때까지 속으로만 끙끙대는 녀석이라 어릴 때부터 수시로 속을 들여다보고, 챙기는 게 우리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어. 물론 지금도 그렇고.”

지훈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나 싶어 수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인간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

“말하자면 민하준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 같은 거네요?”

제가 한 말이 우스웠는지 말끝에 수아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런 셈이지. 어때? 동참할 생각이 있나?”

혹시나 부담을 가질까 가볍게 툭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그 말의 의미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럼요. 당연히 동참해서 같이 마무리 지어야죠. 무슨 프로젝트이든지 반드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회사에서 배웠습니다.”

“어떤 회사인지 마인드가 제대로 박힌 회사네.”

“제가 또 그 대단한 회사의 직원이지 말입니다.”

수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어느새 지훈의 차는 하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수아가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조수석에서 내리려는데,


“지훈이랑 같이 온 거예요?”

이미 도착해 있던 하준이 수아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오피스텔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그래서 오는 길에 태우고 왔지.”

지훈이 조수석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대신 답했다.


“어. 고맙다.”

“고맙긴.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라.”

지훈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어? 왜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가시지?”

수아는 도로로 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지훈의 차가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도 이 오피스텔에 살고 있거든요.”

아, 같은 방향이라고만 생각했지 같은 곳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중교통 때문에 힘들까 봐 걱정했는데, 지훈이랑 같이 와서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팀장님 덕분에 엄청 편하게 왔네요.”

“다음에는 그냥 회사에서 같이 출발하는 걸로 해요. 직원들한테 안 들키는 방법은 제가 찾아볼게요.”

출퇴근길의 상황이야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 없는 하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 지옥 같은 곳에 수아를 태우고 싶지가 않았다.


“하준 씨 마음은 알겠는데, 그러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팀장님 차 얻어 타고 오면 금방이에요.”

“그렇지만, 지훈이가 시간이 안 될 수도 있고…….”

“그럼 버스 타고 오면 되죠.”

수아가 재빠르게 하준의 말을 가로채고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오든지 하준 씨를 만나러 오는 길은 그 자체로도 설레는 일이니까 전혀 힘들지 않아요.”

고백과도 같은 수아의 말에 굳어 있던 하준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그렇게 예쁘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또 반하게 되잖아요.”

“어디 오늘뿐이겠어요? 매일매일 반하게 해줄게요. 기대해요.”

수아가 턱 밑에 두 손바닥을 펼치며, 눈을 반짝였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마주 보는 서로의 눈길에 핑크빛이 가득했다.

*

하준의 차가 천천히 영화관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오늘 영화 봐요?”

“추천받은 영화가 있어서요.”

추천받은 영화라.

지금 상영 중인 영화가 어떤 게 있었더라.

로맨스? 액션? 그도 아니면 공포?

과연 하준의 취향은 어떤 것일지 상상하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셀프 티켓팅 기계 앞에 도착해 있었다.


‘화면을 터치하고 예매번호를 누르고…….’

영화관 관람 리뷰 글을 정독하고 온 하준은 처음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수아의 시선이 하준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며 영화의 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제목을 확인한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응? 이 영화…….

며칠 전 뉴스에서 나온 거 봤는데.

여름에 개봉하는 공포물과는 달리 봄에 개봉했는데도, 이례적으로 흥행하고 있다는 좀비 영화.

도대체 좀비 영화를 누구한테 추천받은 걸까.

궁금함에 눈썹을 움찔대다가 돌아선 하준과 눈이 마주치자 수아는 빙긋 웃었다.


“제가 팝콘 사 올게요.”

수아가 매점을 가리켰다.


“아니요. 수아 씨는 그냥 여기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음료는 어떤 걸로 마실래요?”

“극장에서는 당연히 콜라죠.”

극장에서는 콜라가 당연한 건가? 그럼 나도 콜라를 마셔야겠군.

수아의 말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하준이 눈을 키웠다.


“금방 사 올 테니까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요.”

하준은 수아의 어깨를 살며시 눌러 의자에 앉히고는 서둘러 매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콜라 두 잔이랑 팝콘 하나만 주세요.”


[음료는 두 잔, 팝콘은 하나. 무조건 하나!]

팝콘의 개수를 강조하던 지훈의 말을 떠올리며 하준은 주문을 마쳤다.

두 사람은 함께 영화관으로 입장했다.


“L 열, L 열, 아! 찾았…….”

하준이 팝콘과 음료를 들고 있는 탓에, 티켓을 들고 앞서 걷던 수아의 걸음이 멈췄다.

뭐지? 저 핑크 핑크한 의자는? 좌석 번호를 잘못 봤나?

수아는 티켓과 의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자리를 확인했다.


“그 자리가 맞는 것 같은데요.”

“네? 네. 그런 것 같네요.”

연신 눈을 깜박이던 수아가 덤덤하게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하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커플석에 앉았다.

*

자리에 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가 시작되었고, 사방에는 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부스럭 부스럭.

약속이나 한 듯 사방에서 팝콘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색함에 주변을 둘러보던 하준이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팝콘으로 손을 뻗었다.

……아!

순간 손끝에 닿은 것이 수아의 손이라는 것을 인지한 하준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었다.


“미, 미안합니다.”

당황하며 애꿎은 콜라를 쪽쪽 빨아대는데,

수아가 상체를 기울이며 하준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러려고 팝콘을 먹는 거예요.”

멀리 도망가 있는 하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수아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

하준은 차마 수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정면만 응시했다.

시야가 차단당해서일까.

입까지 맞춘 사이에 손잡는 게 뭐 별건가 싶다가도 예민해진 촉각으로 느낀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래서 팝콘은 무조건 하나만 사라고 했었구나.’

하준은 극장의 어둠 덕분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영화가 중반부에 접어들자 여기저기에서 좀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꺅!”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수아가 하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좀비 지나갔어요? 지금도 나와요?”

수아가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로 다급히 물어왔다.

좀비 따위 몇 마리가 튀어나오든 별로 놀랍지는 않은데, 이상하게도 수아의 움직임에는 온몸이 반응했다.

몸의 긴장을 늦춘 하준이 수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안 지나갔습니다. 계속 나오는데요.”

거짓말이었다.

좀비는 사람 한 명을 물어놓고는 이미 사라진 후였지만, 하준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아직도요? 지금도요?”

따뜻한 체온을 뱉어내며 자꾸만 묻는데, 하준은 이제야 지훈이 왜 이 영화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수아 씨랑 이런 영화를 봐야 하냐며 투덜거렸던 과거의 경솔함을 후회함과 동시에, 앞으로 지훈의 조언이라면 뭐든지 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선 순간이었다.


“이제 지나갔습니다.”

하준의 말에 수아가 실눈을 뜬 채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미,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수아가 급히 상체를 세우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번엔 하준이 수아를 향해 다가오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러려고 영화를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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