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뒤늦은 고백
(27/105)
27. 뒤늦은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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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뒤늦은 고백
2022.07.02.
영화를 보고 나온 하준은 지훈이 예약했다는 루프탑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하준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저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통화하고 와요.”
하준이 휴대폰 액정을 살피는 사이, 수아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카페 유리문 앞에서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영업을 안 하나?
이상하게도 카페 안에는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봐서는 안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수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자 카페 직원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저기…… 혹시 오늘 영업 안 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지금 영업 중입니다.”
“아. 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래 혹시나 영업을 안 하시는 건가 했어요.”
수아의 말에 이런 일이 꽤나 여러 번 반복되었던 듯 직원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는 VIP 전용으로 100% 예약제이기 때문에, 예약자 외의 손님은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직원의 말에 수아는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하준이 예약을 해놓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약했는지 물어보고 같이 들어와야겠네.’
수아가 밖으로 나가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예약을 하지 않으셨으면 그만 나가 주시죠.”
아무나? 지금 아무나라고 했어?
수아가 반쯤 돌아간 발을 홱 돌렸다.
“저기요. 아무나라니요?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지나쳤나요? 저는 그저 저희 매장의 영업방침을 말씀드린 것뿐인데요.”
아놔. 이 여자가 진짜.
“오늘은 예약을 안 했다 치더라도 다음에는 손님으로 올 수도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미간을 좁히며 따져 묻는데,
“예약이나 하고 말하던지, 여기가 얼만 줄 알고…….”
직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봐요! 도대체 여기가 얼마이기에…….”
너무 평범해 보이는 옷차림 때문이었을까.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에 버럭 화를 내려던 바로 그때.
“얼마인지 알 필요 없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하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 언제 왔어요? 통화는 잘 끝낸 거예요?”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손님에게 가격을 이런 식으로 안내하는 것도 이곳 영업방침입니까?”
직원에게 물었다.
……설마 우리 대화를 다 들은 건가?
수아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뭐라고요?”
하준의 말에 마치 달려들기라도 할 듯이 직원이 언성을 높이던 그때.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사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하준을 향해 다가오더니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 예약은 없었던 걸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사를 받을 마음이 없는 하준은 시선을 돌렸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혹시 무슨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마치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하준이 매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직원분 말에 의하면 아무나 들이지 않는 것이 이곳의 영업방침이라더군요.”
직원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 아무나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장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불현듯 지훈이 예약전화를 걸어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장님. 그날은 현성 그룹 부회장님이 중요한 손님이랑 같이 갈 거니까 특별히 더 신경 써주셔야 해요.”
현성 그룹 부회장이라니.
관심받는 것을 싫어해 꼭 필요한 공식 석상이 아니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이지만,
완벽한 비주얼로 인해 옷이며, 신발이며, 가방이며, 심지어 넥타이핀 하나까지도 완판을 시켜버리는 소위 재벌계의 셀럽 중의 셀럽 아니던가.
그가 다녀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가게 홍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신이 나 있던 사장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실수를 했나 봅니다.”
“…….”
사장의 사과에도 하준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불편한 심경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김윤주 씨. 빨리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사장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직원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뵙고 실수를…….”
“사과를 왜 저한테 합니까?”
하준이 직원의 말을 자르며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아닌 수아에게 사과하라는 의미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일로 해고라도 당할 것 같았는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직원의 몸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수아는 비록 직원의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기에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혹시나 예약을 하지 않고 방문하더라도 좀 더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더 강조하고 싶은지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이곳의 영업방침이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니까요.”
말을 끝낸 수아가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만 가요.”
수아의 말에 하준은 곧장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 가요? 예약했다면서요. 그럼 위로 올라가야죠.”
“기분 상했을 텐데, 굳이 여기에 있을 필요 없습니다.”
“그건 그거고, 예약은 예약이죠. 저희 때문에 다른 예약도 못 받으셨을 텐데.”
“비용을 지불하면 되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준이 팔로 수아의 어깨를 감싸며 문 쪽을 향해 살짝 끌어당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에 안심한 수아와는 달리 사장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이대로 하준이 문밖으로 나가버린다면 지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이었다.
“사과받아서 이제 괜찮아요. 그리고 루프탑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올라가 보고 싶어요.”
“그래요. 수아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하아…….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사장의 입술 사이로 깊은숨이 새어 나왔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사장이 계단 위쪽으로 손을 뻗으며 길을 안내했다
“조심해요.”
하준이 수아의 허리를 살며시 받치며 시선을 맞춰왔다.
뭐든 다 얼려버릴 듯 차가웠던 좀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의 목소리는 봄 햇살처럼 따스했다.
내 편이 있다는 것.
세상에 부딪혀 주춤대더라도 뒤로 밀려나지 않도록 이렇게 등 뒤에서 나를 받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마음이 든든해질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수아는 새삼 또다시 마음이 설렜다.
*
“우와.”
계단을 올라 루프탑의 모습을 확인한 수아가 눈을 키우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 조명들이 너무 예쁘네요. 이따가 사장님한테 어디에서 사셨는지 여쭤봐야겠어요.”
수아는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조명들을 그보다 더 빛나는 눈빛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기한가?
하준은 평소 크고 작은 파티에 참석하는 게 일상이라, 이 정도의 장식은 눈에 차지도 않을뿐더러, 지금은 그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큰 눈을 깜박이며 뛰어다니는 수아만이 보일 뿐.
어쩜 저렇게 쉬지 않고 조잘대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지 토끼 같은 수아의 모습이 귀엽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준 씨는 야경이 예쁜 곳을 많이 알고 있나 봐요. 지난번 레스토랑도 그렇고, 여기도 너무 예쁘네요.”
수아는 루프탑 끝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하준은 무언가에 끌리듯 수아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지막 걸음을 옮겨 수아의 등 뒤에 다다른 하준은 그녀를 한 품에 안았다.
놀란 수아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하준의 깊은숨이 느껴지고, 수아는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내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말을 못 한 것 같아서요.”
어깨를 감싼 팔이 내려와 수아의 손을 붙잡았고,
“……사랑합니다.”
숨겨지지 않은 그의 떨림이 등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신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태연한 척 말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이제야 말해서 미안합니다.”
하준은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저와 연인 사이가 되어줄래요?”
……사랑 그리고 연인 사이.
차마 내뱉지 못한 이 말들로 인해 그동안의 우리는 그저 애매한 관계일 뿐이었고, 확신 없는 관계로 인한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단어들을 몇 번 더 곱씹고 나서야 실감이 났는지 수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박동을 가라앉히려 수아는 길고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하준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럴게요. 제가 하준 씨 연인이 되어줄게요. 제가 하준 씨 많이 사랑해 줄게요.”
그 순간.
수아와 시선을 맞추던 하준이 손을 뻗어 수아의 목 뒤를 감쌌다.
하준은 천천히 손을 당기며 수아와의 거리를 좁혔고,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포개졌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수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그 틈 사이로 하준의 입술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준의 숨결은 수아의 입안을 헤집기 시작했고, 이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빈틈없이 맞붙었던 입술이 살짝 떼어지며 틈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여 다시 깊게 파고들었다.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놓았다가 능숙하게 이끌던 하준의 다른 한 손이 수아의 허리를 감싸왔다.
“하아……. 하준 씨…….”
정신없이 몰아치는 그의 움직임에 점점 숨이 가빠 왔다.
하준의 입술이 수아의 턱을 타고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수아 씨……. 사랑합니다.”
심장을 녹일 듯 부드러운 목소리 끝에 그가 미소를 짓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도 사랑해요.”
*
다음 날 아침.
“수아 씨.”
평소보다 더 달콤해진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으. 녹겠네. 녹아.
자꾸만 들썩이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수아는 조수석에 올랐다.
“잘 잤어요?”
하준이 묻는데,
잘 자기는.
지난밤의 고백과 키스의 여파로 밤새 피식거리며 웃느라 잠을 설치긴 했으나 뭐 어떠랴.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인 것을.
“네. 잘 잤어요. 하준 씨는요? 잘 잤어요?”
“그럼요. 다른 어떤 날보다 잘 잤습니다.”
대답과 함께 하준이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암묵적 연인 사이가 명시적 연인 사이가 된 1일이니까요.”
“오늘은 1일이라 한 송이고, 그럼 내일은 2일이니까 두 송이 줄 거예요?”
“주, 줄게요. 수아 씨가 원한다면 꽃뿐만 아니라, 뭐든 다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말만 해요.”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지 당황한 듯 하준이 말을 더듬었다.
당황하는 거 너무 귀여워. 귀여운데 멋있기까지 해.
하나만 해라. 하나만. 아주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농담이에요. 농담. 놀린 사람 민망하게 뭘 그렇게까지 당황을 해요.”
하준의 어깨를 톡 치며 웃는데, 여전히 그의 얼굴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연애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수아 씨를 웃게 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몰라요.”
진지한 하준의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그래도 노력할게요. 제 연인이 된 걸 후회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볼게요.”
어머. 이 남자 정말 어쩌면 좋니.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를 모습에 웃음을 간신히 참은 수아가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쪽.
입술이 짧게 붙었다가 떼어졌다.
“너무 애쓰지 말아요. 하준 씨가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