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만 알고 있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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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나만 알고 있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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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나만 알고 있는 비밀
2022.07.05.
“안녕하…….”
사무실로 들어서던 수아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제자리에 선채로 눈을 껌뻑거렸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무슨 일인지 사무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8시 30분. 시계를 확인하니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다들 어디 가신 건가? 수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자리로 향했다.
“어? 수아 씨 왔어요?”
때마침 사무실로 들어서던 민준이 아는 체를 하고는 자리에서 텀블러를 챙겨 들었다.
“지금 다들 휴게실에서 커피 마시고 있는데, 수아 씨도 같이 갈래요?”
“네. 가방만 정리하고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저는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정리하고 와요.”
민준이 먼저 출발했고, 수아가 그 뒤를 따랐다.
“수아 씨. 여기. 여기.”
휴게실에 들어서는 수아를 향해 희수가 손을 흔들며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에 자리가 있으니 빨리 와서 앉으라는 의미.
수아는 곧장 그녀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휴게실 안에서는 마케팅팀 직원들이 동그랗게 모여앉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들 여기 계셔서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구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기에 아침부터 이렇게 모여 앉아있는 걸까.
수아는 직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제 인사팀 팀장님 제대로 까이고 나왔다며?”
“그렇대. 아주 별명대로 아픈 데를 콕콕 쑤셔댔다던데?”
“어휴. 나는 간이 작아서 팀장은 하라고 해도 못 하겠다.”
“어디 팀장뿐이겠어? 작년 홍보팀에 입사했던 은미 씨 일 기억 안 나?”
“은미 씨……. 아! 기억난다. 기억나.”
앉아있던 직원들이 손뼉까지 쳐가며 반응했다.
“일 시키면 매일같이 잘 모르겠어요. 도와주시면 안 돼요? 헤헤거리면서 남자 직원들한테 일 떠넘기던 직원?”
“그래. 눈치 없이 그분한테까지 그 방법 써먹으려다 걸려서 몇 번 불려가더니, 결국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도망갔잖아.”
그분? 그분이 누구지?
자신이 휴게실로 들어오기 전 이미 시작된 이야기였기에 수아는 직원들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예요?”
수아가 희수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아. 우리 부회…….”
“수아 씨도 조심해요.”
아직 희수의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박민주 대리의 말이 겹쳐졌다.
“저요?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예요. 당연히 부회장님이지.”
“네? 부회장님이요?”
부회장님이라면 하준 씨를 말하는 건가?
대화 내용으로 보아 윗분 중 한 분일 거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그게 하준 씨 일 줄이야.
놀란 입술이 채 닫히기도 전에 민주의 말이 이어졌다.
“외모, 능력, 게다가 집안 배경까지 모든 걸 갖춘 완벽한 우리 부회장님한테도 없는 게 딱 하나 있거든요.”
그에게 부족한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딱하나요? 그게 뭔데요?”
수아의 물음에 민주는 곧장 말을 이었다.
“따뜻함이요. 성격이 얼마나 차가우신지 직원들 사이에서는 부회장실이 냉동실로 통한다니까요.”
옆에 앉아 있던 민준이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부회장님 별명이 송곳이에요. 송곳 중에서도 얼음송곳. 어찌나 아픈 곳을 쿡쿡 찔러대시는지.”
말하면서 무슨 장면이 떠올랐는지 민준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걸리지 않게 조심해요. 아예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따뜻함이 없다니. 얼음송곳이라니. 말도 안 돼.
그 사람 목소리가 얼마나 따뜻한데.
달콤한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미소는 또 어떻고.
그의 따뜻함이 자기 한정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수아의 입장에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별명이었다.
저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이때까지도 수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얼마 못 가 그 별명이 하준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임을 자신이 깨닫게 되리란 것을.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일어납시다.”
시계를 확인한 한 직원의 말에 모두들 빛과 같은 속도로 자리를 정리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수아도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오늘 팀장단 회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수아 씨도 함께 참석합니다.”
사무실로 들어서던 지훈이 전달사항이라며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네? 저요?”
팀장단 회의인데 왜 내가 참석하지? 수아의 반응에 민준이 의자를 슥 밀면서 다가왔다.
“원래 신입사원들은 팀장단 회의에 한 번씩 참여해요.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고, 업무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니까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뒤에 출발합시다.”
“네.”
오늘 하루 업무계획만 짜는데도 금세 10분이 흘렀다.
“이수아 씨. 이제 출발합시다.”
“네. 팀장님.”
수아는 책상 위에 올려둔 수첩과 펜을 챙겨 들고는 서둘러 지훈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수아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팀장단 회의는 어때요?”
“응? 뭐가?”
“회의 분위기 말이에요. 아침에 선배님들이 그러시는데 엄청 살벌하다면서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지훈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지. 그렇다고 살벌할 것까지야.”
“저는 오늘 그냥 팀장님 옆에 앉아만 있으면 되는 거죠?”
“그렇지. 오늘은 각 팀별 업무 상황 브리핑이 있으니까, 각 팀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듣기만 하면 돼.”
“네. 알겠어요.”
지훈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수아는 혹시 실수라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잠시 후 앞서 걷던 지훈이 걸음을 멈췄고, 동시에 뒤따르던 수아의 걸음도 함께 멈췄다.
도착한 건가?
고개를 들어 확인하려는데, 이미 지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티, 팀장님. 같이 가요.”
지훈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선 수아의 눈이 터질 듯 크게 벌어졌다.
긴 타원형 테이블과 각각의 자리에 설치된 마이크.
전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과 빔프로젝터까지.
텔레비전에서 항상 봐오던 회의실 모습 그대로였다.
지훈과 수아가 마케팅팀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민지훈 팀장님. 이번에 새로 입사한 사원인가 보네요.”
“안녕…….”
수아가 제 이야기인가 싶어 인사를 하려는데,
“네. 이수아 사원입니다.”
말허리를 싹둑 잘라낸 지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이번 공모전 수상자이시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디자인팀 팀장 김유나예요.”
“네. 저는 이수아입니다.”
유나가 먼저 악수를 청했고, 수아가 그 손을 맞잡았다.
수아의 시선이 빠르게 유나를 훑었다.
작은 얼굴에 들어찬 큼직한 이목구비와 세련된 옷차림.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만한 외모였다.
그렇게 홀린 듯 유나를 바라보던 그때.
“부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박 비서의 목소리와 함께 회의실에 있던 모든 팀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아도 엉거주춤 일어나 회의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하준을 발견했다.
어우. 저 비주얼 진짜 어떡할 건데.
분명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이렇게 볼 때마다 설레면 어떻게 하냐고.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이대로 영영 시선을 떼지 못할 것 같아 수아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옮겼다.
“회의 시작하시죠.”
하준의 한마디에 팀장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패드를 실행시키고 스크린 화면을 응시했다.
회의실 조명이 어두워지고, 각 팀의 팀장들이 나와 이번 주 상황 보고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역시. 대기업의 회의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오고 가는 금액의 단위에 헉!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저 큰 금액을 저렇게 덤덤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다니.
수아는 그런 팀장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존경의 뜻을 담아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 시선의 끝엔 하준이 있었다.
‘내 남자친구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긴 하구나.’
새삼 감탄하는 사이 회의실 조명이 켜졌다.
“이번에 현성 백화점에 새로 입점할 브랜드 리스트는 준비됐습니까?”
별다른 말 없이 화면을 응시하던 하준이 입을 떼었다.
지훈의 마이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이번에 입점할 브랜드에 대한 품평회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와 품질에 대한 분석을 마쳤고, 현재 3개의 브랜드와 조율 중에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결정되는 대로 결재 올리겠습니다.”
“홍보팀에서는 이번 뷰티라인에 대한 언론 홍보 계획이 나왔습니까?”
홍보팀 팀장의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하준이 말을 가로챘다.
“홍보팀만 휴가 즐기고 있습니까?”
“네?”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홍보팀 팀장이 눈을 키웠다.
“홍보팀만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 말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홍보팀 팀장의 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참에 긴 휴가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긴 휴가.
신입사원인 수아도 금방 알아챌 그 말의 의미를 팀장들이 모를 리 없었다.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하준의 낮은 목소리와 표정은 그의 분노를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한차례 거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팀장들은 굳은 표정으로 마른 침만 삼켜대고 있었다.
수아의 목구멍으로도 긴장감이 꿀꺽 넘어갔다.
아. 이제 알 것 같다.
왜 그가 얼음송곳이라고 불리는지.
왜 부회장실이 냉동실이라고 불리는지.
부회장실뿐 아니라 회의실도 냉동실이었네.
아침에 직원들이 했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음이 회의 한 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그 후로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그 많은 내용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건지 하준은 각 부서별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콕콕 집어 지적했다.
그렇게 1분이 1시간과도 같은 시간들이 지나가고.
“회의 마치죠.”
하준의 말 한마디에 회의가 끝이 났다.
회의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하준은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회의실 안 여기저기에서 깊은 한숨들이 터져 나왔다.
“기운 내. 이런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팀장들은 아직도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는 홍보팀 팀장의 어깨를 한 번씩 토닥이며 나름의 위로를 전하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나는 홍보팀에 잠깐 들렀다가 갈 테니까 너 먼저 사무실에 가있어.”
들고 있던 패드를 정리하던 지훈이 수아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다른 팀장들에게 들릴까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볍게 인사와 함께 수아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후우. 정말 다시는 참여하고 싶지 않은 회의였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준의 매서운 표정과, 차가운 말투가 자꾸만 떠올라 수아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수아 씨. 혹시 오늘 퇴근하고 약속 있어요?”
뒤숭숭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들어서는데, 난데없이 질문이 날아왔다.
“약속이요? 왜요?”
“얘기하던 중에 수아 씨 환영회 겸 팀장님 환영회 회식을 하자는 말이 나와서 한번 물어보는 거예요.”
환영회라니. 그것도 나를 위한 환영회.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좀 전까지 무거웠던 마음이 허공으로 붕 뜬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저 오늘 약속 없습니다.”
있어도 없습니다.
수아는 다부지게 다문 입술로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
“아. 다행이네요. 그럼 오늘 회식 진행하는 걸로 할까요?”
“네. 좋아요.”
그렇게 마케팅팀의 회식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