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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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2022.07.09.
“지훈이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추천해 줬는데, 오늘 같이 가볼까요?”
현성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혜선에게 물었다.
“그럴까요? 그럼 아주머니께 미리 말씀드려야겠네요.”
혜선이 저녁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전하려 소파에서 일어서려는데,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주방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서둘러 손의 물기를 닦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네. 누구세요?”
[진성 그룹 김진성 회장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인터폰 너머에서 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김 회장의 방문을 알려왔다.
“회장님. 진성 그룹 김 회장님이시라는데요.”
가사도우미의 말에 현성이 놀란 듯 눈을 키웠다.
“김 회장이? 갑자기 연락도 없이 웬일이지?”
“글쎄요. 무슨 일이시지?”
동시에 혜선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여보내라는 현성의 말에 가사도우미는 인터폰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아이고. 김 회장님.”
현성은 젊은 여자와 함께 들어서는 김 회장을 맞이했다.
“어? 너는 지수 아니냐?”
현성은 김 회장과 함께 들어선 여자가 그의 딸인 지수임을 금방 알아챘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지수는 현성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환히 웃어 보였다.
“대학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더니 한국에 다시 들어온 거야?”
“그건 아니고요. 잠깐 들어온 겁니다. 허허허.”
현성의 질문에 김 회장이 대신 대답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들어오셔서 편히 이야기 나누시죠.”
혜선의 말에 현관 앞에 서 있던 네 사람은 함께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평소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김 회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이유가 궁금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희 진성이랑 현성 그룹이 패션브랜드 론칭을 함께 진행하잖습니까?”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왜…….”
패션 브랜드 론칭이라면 하준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현성에서 론칭하고자 하는 패션 브랜드에 진성 그룹이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는 전달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지수가 지금 미국에서 패션 공부 중인데,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한국에 들어왔잖습니까.”
김 회장의 말에 현성은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자신의 딸이 프로젝트팀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잘 봐달라는 뜻이겠지.
공동브랜드 론칭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스스로 브랜드를 론칭해본 적이 없는 진성 그룹 입장에서는 론칭 경험이 많은 현성 그룹의 기술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프로젝트에 자신의 딸을 투입시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자 함일 테고.
속 보이는 행동에는 확실한 선만이 정답이지.
“그런 부분이라면 하준이와 상의하시면 될 듯합니다. 제가 뭐 힘이 있나요. 허허허.”
“아니 뭐 꼭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딸아이가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우리 민 회장님께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기에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겁니다.”
“지수가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현성이 지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래. 하준이랑 지훈이는 만나봤고?”
“아니요. 아직이요. 이제 만나 보려고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 서로 많이 반갑겠네.”
그들은 한동안 별 의미 없는 말들을 나누었고, 얼마 뒤 김 회장과 지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혜선이 입을 열었다.
“김 회장님이 지수까지 데리고 온 데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뭐 그렇겠지. 이번 브랜드 론칭에 참여하면서 잘 좀 봐달라는 뜻 아니겠어요?”
“제가 볼 때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아요.”
현성의 말에 혜선은 뭔가 꺼림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유?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지수 말이에요.”
“지수라니요?”
무슨 말인가 싶어 현성이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제 생각에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 하준이랑 연을 맺게 하려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하준이랑 뭘 맺어요?”
“결혼 말이에요.”
……결혼이라고?
현성은 대기업의 대표들끼리 완벽한 사업 파트너를 맺으려 자신의 자식들을 결혼시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식을 계약서처럼 사용하려는 거냐며 불같이 화를 내곤 했었는데,
그 말 같지도 않은 행동을 함께 하자고 찾아왔단 말인가?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진 듯 현성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여보. 흥분하지 말아요. 제가 그냥 추측한 거라 아닐 수도 있어요.”
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혜선은 현성을 진정시켰다.
“그럼요. 당연히 아니어야지요.”
현성이 미간을 한껏 구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의 노하우를 배워가려는 건 이해할 수 있어도 내 자식을 계약서 취급하려 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진행시킬 수 없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현성의 눈동자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현성을 바라보던 혜선은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평소에는 다정하기 그지없지만, 가족과 연관된 일이라면 저렇게 정색을 하고 드니, 혜선이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는 이유였다.
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하준이한테 좀 다녀올게요.”
*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수아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프라임 가구입니다. 지난번 주문해 주신 책상 배송날짜 확인차 전화 드렸습니다.]
아! 맞다. 책상.
전화를 받고서야 며칠 전 책상을 주문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죄송하지만 배송날짜가 언제였죠?”
[지난번에 오늘 날짜로 예약해 주셔서 오늘 설치기사가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하아. 내 기억력을 너무 믿은 게 잘못이었어.
“네. 일단은 알겠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수아는 다은에게 자신 대신 책상을 받아달라는 메시지를 서둘러 발송했다.
이내 알았다는 다은의 메시지가 도착했고, 그제야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수아 씨. 지금 시간 괜찮아요?”
자리에 앉으려는데 민준이 다가와 물었다.
“오후에 하기로 했던 회의를 지금 할까 하는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의류 광고 제작 작업에 참여해 보라는 지훈의 지시로 두 사람은 오늘 회의를 하기로 했었다.
“지금 시간 괜찮은데, 비어 있는 회의실이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아니요. 날씨도 좋은데 로비에 있는 테이블에서 하는 게 어때요?”
민준이 말한 로비는 마케팅팀 사무실 앞에 있는 공간으로 통유리창이라 햇빛을 받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가끔 수아도 점심 식사 후에 광합성을 하겠다며 앉아 있기를 즐겼었기에 곧장 그의 의견을 반겼다.
“오. 좋아요. 지금 바로 나갈까요?”
수아는 서둘러 수첩을 챙겨 들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혹시나 누가 앉아 있을까 걱정스러워 걸음을 서둘렀는데, 다행히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일단 오늘은 광고 형식을 정해 보고, 광고모델 후보군을 좁히는 것까지만 해봅시다.”
민준은 광고대행사에서 보내온 샘플 자료들을 보여주었고, 수아는 자료들을 꼼꼼하게 살피며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TV 광고 외에도 영상 앱 용으로 영상 시작 전 5초짜리 광고를 함께 제작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다음으로 광고모델 후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헐. 대박. 역시 대기업은 다르구나.
광고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광고주의 재력이라고 하던데,
후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의 프로필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앗! 이분은 3박 4일에 나오시는…….”
수아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두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얼굴을 붉혔다.
“이분이 요즘 대세라던데 수아 씨도 이분 좋아해요?”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요.”
생각할 시간은 사치라는 듯.
들뜬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데는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분이 TV에 나오시기 전에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셨거든요. 사실 저는 그때부터 팬이었어요.”
수아는 혹시나 누가 들을까 민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수아 씨한테는 이분이 광고모델이 되는 게 좋겠네요. 그래야 기회를 봐서 직접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으. 상상만으로도 너무 좋네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는 수아의 입술 끝이 순식간에 위로 밀려 올라갔다.
하. 귀엽네.
민준은 마치 수줍음 많은 여고생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수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몇 명의 후보를 더 선정했고, 최종 선택은 지훈과 함께 회의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두 잔이요.”
민준이 인사팀 직원과 함께 1층 카페로 들어섰다.
주문을 마치고 한걸음 옆으로 비켜선 두 사람은 이내 대화를 시작했다.
“회의가 지금 끝난 거야?”
“응. 생각보다 길어졌어. 우리 팀 신입이 광고모델 후보 선정하는데 엄청 신나 하더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있었나 보지?”
“응. 예능프로그램 3박 4일에 나오는 남자배우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이수아 씨라고 했나? 순수하네. 아직도 연예인 이야기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 보면.”
“얼굴까지 붉히면서 말하는데 꽤 귀엽더라.”
민준의 입술 사이로 옅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쾅!
부회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그보다 더 거친 발걸음의 하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은 책상 앞에서 멈추었고, 풀썩 소리와 함께 하준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아…….”
한숨보다는 탄식에 가까운 호흡이었다.
순간 하준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내려앉더니, 이내 등 뒤로 검은 오로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한다고?”
숨겨지지 않는 그의 불편한 마음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 전, 하준은 혹시나 수아가 있을까 싶어 마케팅팀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몰래 윙크라도 해볼까. 손가락으로 작게 하트라도 만들어 볼까.
그녀를 만나면 어떤 애정표현을 해줘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행복해 입꼬리가 요란스럽게 들썩였었다.
분명 그랬다.
웬 남자 직원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두 번이나 말하더니, 이내 둘이 딱 붙어 앉아서는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더라.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쫓아가 둘 사이를 갈라놓고,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절대로 아는 척하지 말라는 수아의 말이 떠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안절부절만 하다가 사무실로 올라오고 말았다.
뭐야? 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데?
서류를 들고 있던 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서류 끝자락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