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래도 안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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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래도 안 올래
2022.07.12.
도저히 안 되겠어.
어떻게든 참아보려 애썼고, 퇴근 후까지 기다려보려 애썼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게 낫겠어.’
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벌컥. 문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건너편에서 먼저 열렸다.
“나 오는 줄은 어떻게 알고 미리 마중 나왔냐?”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하준을 발견한 지훈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서류 주러 온 거면 책상에 놓고 가. 급히 갈 곳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해.”
“큰아버지가 잠깐 올라오라고 하셨는데. 급한 일이야?”
몸을 돌리며 걸음을 떼는 하준을 향해 지훈이 물었다.
큰아버지……?
돌아갔던 하준의 몸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회장님 나오셨어? 연락 못 받았는데. 언제 나오셨어?”
“좀 전에 도착하셨어. 너한테는 미리 알리지 말라고 비서 팀에 신신당부하셨다던데?”
“연락을 주셨으면 바로 내려갔을 텐데.”
“이럴까 봐 연락을 안 하신 거겠지. 네가 이렇게 당황할까 봐.”
하준은 양복 재킷을 정돈하며 급히 부회장실을 나섰다.
하준이 회장실 앞에 다다르자 비서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님. 부회장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전달에 현성이 들여보내라며 손짓했다.
“회장님. 나오신 줄 모르고 바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하준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그런 아들을 마주한 현성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언제쯤이면 편하게 아버지라고 불러줄까.
언제쯤이면 아무런 용건이 없이도 너와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20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하준을 바라보고 있자면,
애틋하다가도 원망스럽고, 또 그러다 안쓰럽기도 했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뭘 또 이렇게 헐레벌떡 찾아왔어.”
“회장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하준에게 업무 권한을 넘긴 이후 회사에는 거의 나오지 않던 현성이었기에,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아니. 별 이유는 없고. 이번에 진성 그룹이랑 프로젝트 진행하는 거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궁금해서 와봤어.”
“패션 브랜드 론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진성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던데. 김 회장 딸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면서?”
지수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네. 진성 그룹에서 제시한 프로젝트 참가자 명단에 이름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어렸을 때 오빠 동생 했던 사이라, 의견 조율 같은 게 쉽지는 않겠어.”
“큰아버지도 참. 오빠 동생이라뇨. 오빠만 있고, 동생은 없었죠.”
현성의 말에 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사실 중학교 시절부터 지수는 하준을 오빠라고 부르며 졸졸 쫓아다녔지만, 하준은 지수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매일 무시당했다며 울던 지수를 달래줬던 사람이 자신이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지수가 그렇게 오빠. 오빠 하면서 쫓아다녀도 하준이는 눈길도 한번 안 줬던 거?”
“하긴 그랬지. 그런 거에 휘둘릴 하준이가 아니긴 하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허허 소리를 내며 웃는 현성과는 달리 하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자신의 보고가 늦어져 현성을 직접 찾아오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가 좀 더 일찍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느닷없는 하준의 사과에 현성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으이구. 또 저런다.
하여튼 무슨 말을 못 하게 한다니까.
“됐고. 그만 가서 일 봐. 집에서 혜선 씨가 기다리고 있어서 나도 빨리 들어가 봐야겠다.”
“큰아버지는 아직도 그렇게 큰어머니가 좋으세요?”
그 나이에 그렇게 사이가 좋은 부부를 본 적이 없는 지훈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좋지.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데? 나는 다음 생에도 무조건 혜선 씨랑 결혼할 거야”
“그건 큰아버지 혼자 결정하실 문제가 아니죠. 큰어머니 의견은 묻지도 않으시고.”
지훈의 말에 현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혜선 씨도 당연히 나지. 나만 한 남편이 어디 있다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큰어머니 기다리신다면서요.”
현성을 배웅하기 위해 지훈과 하준은 본사 건물 앞까지 나왔고, 현성이 차량에 탑승하고 출발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다시 본사 건물로 들어왔다.
로비를 가로지르던 지훈이 번뜩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우리 팀 오늘 회식 있어.”
“회식?”
“응. 수아 입사 환영회 겸 내 복귀 환영회.”
“장소가 어딘데?”
“왜? 너도 오려고?”
그럴까? 나도 갈까? 나도 가도 될까?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하준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아니. 나는 회장님께 보고드릴 프로젝트 건 때문에 어려울 것 같아.”
“어련하시겠어요. 장소는 아직 미정이야.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별 기대 없이 물었던 질문이라 지훈의 반응은 담담했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지훈과 하준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이거 가져가.”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하준이 불쑥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카드는 왜? 괜찮아. 우리 팀 회식 카드에 잔액 많아.”
현성 그룹은 각 팀별로 회식 카드가 따로 지급되어 있어, 한도 내에서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체제였다.
회식이 결정된 후 미리 잔액을 확인했기에 지훈은 걱정하지 말라며 하준의 손을 슬쩍 밀었다.
“첫 환영회니까…….”
쑥스러워 끝맺지 못한 말이 입술 끝에서 뭉개졌다.
그동안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아마도 오늘 환영회가 그녀에게는 특별한 의미일 것이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첫 환영회 겸 회식.
하준은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회식 카드는 다음에 쓰고, 오늘은 좋은 데로 가라고. 분위기 좋고 맛있는 데로. 수아 씨는 소고기 좋아해.”
넌지시 메뉴를 정해주고는 말을 덧붙였다.
“수아 씨 술 많이 못 마시게 해. 많이 마시면 안 돼.”
“왜? 왜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지훈의 물음에 수아가 술에 취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과한 애교에 거침없는 스킨십. 그리고 느닷없는 고백까지.
그걸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너무 많이 마시지 않게 해.”
띵동. 때맞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너만 믿는다.”
하준은 지훈의 등을 떠밀어 내리게 하고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식. 대체 뭐기에 저래.”
지훈은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떤 재미난 일을 떠올렸는지 지훈의 입술이 길게 늘어나며 호선을 그렸다.
*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수아가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작성했다.
[하준 씨. 저희 팀이 오늘 회식이라 퇴근이 늦어질 것 같아요. 미리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문자 보내요.]
퇴근 후의 시간은 대부분 하준과 함께 보내왔으니, 오늘은 기다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답이 도착했다.
[네. 지훈이한테 들었습니다. 회식 끝나면 연락해요. 데리러 갈게요.]
아이. 뭘 또 데리러 온대.
수아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며 웃음을 참고서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에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서 편히 쉬어요.]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도대체 얼마나 즐길 생각이기에 언제 끝날지를 모른다는 걸까.
첫 환영회니만큼 그녀가 맘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정말 그럴 것 같으니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수아 씨가 밖에 있는 동안은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밤새 잠도 못 자고 걱정하기를 원한다면 연락 안 해도 됩니다.]
헐. 나 지금 협박당한 거야?
수아는 하준의 메시지를 흘겨보며 투덜거렸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내 안전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왠지 보호받는 느낌이랄까.
기분 좋은 협박이었다.
[그럼 집에 들어갈 때 연락할 테니까 데리러 오지는 말아요. 부담 돼서 맘껏 즐길 수가 없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요.]
알겠습니다. 앞에 ‘일단은’ 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다는 걸 그녀는 알까.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 말에 따를지 말지는 내 마음이니까.”
하준이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
회사 근처 소고깃집.
마케팅팀 직원들이 가게로 들어서며 예약해놓은 방을 안내받았다.
“우와. 이런 소고깃집은 처음이에요.”
직원들이 가게를 들어서며 휘둥그레 뜬 눈동자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팀장님. 저희 진짜 이런 데서 먹어도 돼요? 회식 카드에 돈 별로 없는 거 아니에요?”
직원들의 걱정에 지훈이 멈춰 서서는 입매를 들어 올렸다.
“오늘 1차는 복귀기념으로 제가 쏘는 거니까 회식 카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팀장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다른 데로 가요.”
“저 이 정도도 계산 못 할 정도로 돈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들 겁먹지들 말고 빨리 들어갑시다.”
걱정이 한가득한 직원들을 뒤로한 채 지훈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에라 모르겠다 심정인 몇몇 직원들이 따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언제 걱정을 했냐는 듯이 회식 자리는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수아 씨. 반가워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안주는 비싼 소고기지만 술은 뭐니 뭐니 해도 소주지!”
“수아 씨 내가 한잔 따라줄게요.”
민준이 소주병을 들고 수아에게 내밀었다.
“네. 감사합니다.”
수아는 술이 채워지고 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세상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크…… 이 영롱한 자태 보소.
투명한 액체에 취해 감탄사를 내뱉고 있던 바로 그때.
찰칵 소리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나 소란스러운 자리였기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카메라 소리는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
그 시각 부회장실.
띵동. 하준의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을 들어 확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하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회식 자리에서 남자 직원에게 술을 받으며 즐겁게 웃고 있는 수아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낸 것은 지훈이었다.
[하준아, 우리 너무 즐거워. 너의 카드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고마워 하준아.]
일부러 약을 올리려 보낸 게 분명했다.
하준은 엄지와 검지를 벌려 보내온 사진을 확대해보았다.
수아와 함께 앉아있는 남자 직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는데, 두 번째 사진이 도착했다.
다른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수아의 모습.
사실 이 어깨동무는 다 같이 힘내자는 의미로 모두 함께 한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저런 식으로 잘 잘라서 찍었는지.
지훈의 계획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띵동.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사진.
마지막 사진을 확인한 하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둘러 재킷을 챙겨 들고 부회장실을 나섰다.
그의 휴대폰에는 치마를 입고 있는 수아의 무릎에 자신의 양복 재킷을 덮어주고 있는 김민준 대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