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술에 취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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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술에 취한 밤
2022.07.16.
“수아 씨를 환영하는 의미로 다 같이 건배.”
“팀장님의 복귀를 축하하는 의미로 다 같이 건배.”
마주 앉은 자리에서 웃음이 피어올랐고, 잔에 담긴 술은 목구멍 뒤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크으. 달다 달아. 바로 이 맛인 거지.
술잔을 내려놓는 수아의 입술 사이로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머. 수아 씨 주량이 엄청 센가 보다.”
“그러게. 아주 거침없이 넘기는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는 말을 높이던 직원들이 어느새 편하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자! 오늘은 원 없이 먹고 마셔봅시다.”
그렇게 한 잔이 넘어가고,
“다 같이 힘내자는 의미로 어깨동무하고 파이팅 한번 외칩시다!”
또 한 잔이 넘어갔다.
기분 좋게 먹는 음식은 0칼로리.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은 0도라고 했던가.
술이란 것을 이렇게 즐겁게 마셔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취직 준비가 힘들어서 한 잔.
취직이 안 돼서 한 잔.
수아가 삼키던 술들은 언제나 그녀의 괴로움과 함께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그동안의 괴로움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이 꿀을 탄 듯 달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수아는 자신을 환영해 주는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 잔에 술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디단 이것도 결국은 술이었으니.
절대로 정신을 놓지 않겠다던 강한 의지력이 힘을 잃어 갔고, 눈을 감고 뜨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밖에서 찬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으, 생각 없이 너무 마셨나?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나서 걸으려니 가라앉았던 알코올이 넘실대며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수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가 가게 앞 화단에 걸터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시원해서 좋다.”
수아는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지? 완전히 밤이네, 밤이야.”
껌뻑 껌뻑.
느리게 껌벅이던 눈이 점점 더 속도를 잃어가더니, 이내 스르륵 감겨버렸다.
“……아. 하준 씨 보고 싶다.”
무의식중에 뱉어낸 말을 끝으로 졸음을 이기지 못한 수아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골목 끝에서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지훈이 자신을 놀리려 사진을 보냈다는 것을 하준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진 속 남자 직원 때문이었다.
지훈이 보내온 마지막 사진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그놈이었다.
로비에서 수아와 함께 딱 붙어 앉아 속닥대던 그놈.
내가 오늘 네 이름이 뭔지 기어코 알아내리라.
하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서둘러 회식 장소를 찾았고, 그놈을 찾아보기도 전에 화단에서 졸고 있는 수아를 발견했다.
“수아 씨. 왜 여기 나와 있어요?”
하준은 수아의 양어깨를 붙잡고는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으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몸이 흔들리던 수아의 눈꺼풀이 가늘게 열렸다.
“어? 하준, 아니지. 부회장님이다.”
이 와중에도 호칭을 고친다.
“부회장님도 소고기 먹으러 왔어요? 여기 소고기 옴총 맛있어요. 입에 넣었는데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니까요. 한번 볼래요? 아아.”
이미 삼킨 소고기가 남아 있을 리 없는데, 뭘 확인하라는 건지. 수아는 입을 쩍 벌리고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많이 취했구나.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민지훈 이 자식. 많이 마시지 못하게 하라고 했더니만.’
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아 씨. 일어설 수 있겠어요?”
수아의 어깨를 감싼 채로 일으키려는데,
“부회장님?”
가게에서 나오던 민준이 눈을 키웠다.
화장실 간다던 수아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찾으러 나오는 길이었다.
네 이놈. 드디어 찾았다.
민준의 등장에 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걸음을 서두른 민준은 금세 하준의 앞에 다다랐다.
“부회장님께서 여기에는 어쩐 일로…….”
가까이 다가와 시선을 맞추던 민준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잠깐이었지만, 마주친 하준의 눈빛에서 살기 비슷한 무언가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헛것이 다 보이네.’
민준은 몇 차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고는 수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아 씨. 여기서 졸고 있으면 어떻게 해. 일어나 봐…….”
탁.
순간 매서운 느낌이 손등을 스쳤다.
민준은 수아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내쳐진 자신의 손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냥 두시죠.”
어디에 손을 대려는 거야.
낮게 가라앉은 하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 죄, 죄송합니다.”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민준은 빠르게 사과했다.
“부회장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하준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야근하신다더니,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일은 끝내고 오신 겁니까?”
팀원들과 함께 가게를 나서던 지훈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밀어 올리며 물었다.
“네. 좀 전에 마치고 퇴근하는 길입니다.”
“아. 그래서 회식에 참여하시려고 오셨나 보네요.”
“아니요. 맛있게 드시는지 궁금해서 한번 들러본 겁니다.”
웃고 있는 입술과는 달리 하준의 눈빛에는 지훈을 향한 다채로운 욕설들이 담겨 있었다.
“다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이제 그만 마무리하시죠? 민. 지. 훈. 팀장님.”
뱉어낸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실렸다.
“안 그래도 1차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납게 변한 하준의 눈빛을 확인한 지훈은 재빨리 팀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 1차는 여기에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우리 팀은 강요 없이 자율적으로 회식에 참여합니다.”
직원들의 시선이 지훈에게 집중되었다.
“지금부터 2차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왼쪽, 1차로 마무리하고 싶은 사람은 오른쪽으로 이동합니다. 자. 출발.”
지훈의 말에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섰다.
“나는 왼쪽. 왼쪽으로 갈 거야.”
화단에 앉아 있던 수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왼쪽? 왼쪽이라면……. 2차를 가겠다는 거야?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무슨 2차를 가겠다는 건지.
하준은 어느새 왼쪽의 직원들 틈 사이에 끼어 있는 수아의 어깨를 붙잡아 살며시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자. 그럼 이제 각자의 결정대로 출발합시다. 출발!”
직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길 위에는 하준과 수아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수아 씨. 걸을 수 있겠어요? 숙취해소제 좀 사 올 테니까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근처 편의점 앞에 설치된 야외 테이블에 수아를 앉힌 뒤 하준은 편의점 안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잠시 후.
“수아 씨? 수아 씨!”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수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설마 2차를 가겠다고 엉뚱한 곳으로 간 건 아니겠지?
하준은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수아를 찾기 시작했다.
*
“왜 여기 계세요. 뭐라고요? 어제 오셨다고요?”
하준의 시야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수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수아 씨.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멈칫.
그녀의 대화 상대를 확인한 하준이 걸음을 멈췄다.
설마. 지금 물고기랑 얘기하는 중인 거야?
횟집 앞에 설치된 수족관을 붙들고 중얼거리고 있는 수아를 발견한 하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하준의 말에 수아는 시선을 들어 올리며 손가락으로 콕콕 수족관을 찔렀다.
“하준 씨. 여기 이 광어 보여요? 요기. 요기.”
“네. 보입니다.”
“이 광어가 어제 잡혀 왔대요. 가족들은 모두 바다에 있을 텐데. 너무 불쌍하죠?”
수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
미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아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다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족한테 보내줄게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순간 물속으로 넣으려던 수아의 손을 하준이 재빠르게 잡아챘다.
“이러면 안 됩니다!”
“하준 씨는 이 광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이 눈을 봐요.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지금 울고 있잖아요.”
저렇게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의 어디를 봐서 울고 있다는 건지.
“새끼들 줄 먹이를 구하러 잠깐 나온 건데, 이렇게 잡힐 줄은 몰랐대요. 아직도 가족들은 먹이를 가져올 거라고 믿으면서 가장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이쯤 되면 정말 광어랑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구해줘야 해요.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다고요.”
하준은 결국 가게로 들어가 광어 한 마리를 구입했다.
수족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수아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하준을 발견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여기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봉투를 내미는 하준을 향해 수아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턱밑까지 다가온 수아가 하준의 옷깃을 붙잡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듯 가까운 거리.
하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준 씨…….”
말끝을 흐리는 수아의 입술 위에 시선이 닿았고, 움찔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하준의 입술도 움직였다.
눈을 감아야 할 타이밍인 건가.
눈치를 살피던 하준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가려던 찰나.
“광어의 생명의 은인이 된 걸 축하해요.”
수아가 하준의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고는 몸을 획 돌렸다.
‘……민하준.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냐.’
하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 걷는 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어이없음에 피식 웃어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수아가 온몸을 비틀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으 머리야…….”
기상과 동시에 찾아온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수아! 너는 도대체 술을 얼마나 퍼먹은 거야?”
“어? 정다은. 네가 아침부터 웬일이냐?”
“웬일이냐니. 너 어제 일 기억 안 나?”
응? 어제 일?
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어제는 회식이었는데…….”
말끝을 흐리며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근데 나 어떻게 들어왔지? 왜 기억이 안 나지?”
요즘 들어 왜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걸까.
아닌가?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는 건가?
“설마 나 또 무슨 사고 친 거야?”
밀려드는 불안감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기억하지 말아라. 그게 네 정신건강에는 좋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뭔데? 나 어떻게 들어왔는데? 응?”
수아는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렸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는 제발 말해달라며 다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일단 나와. 나가서 얘기해.”
다은이 벌레를 떼어내듯 발을 툭 털어내며 방을 빠져나갔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수아가 그 뒤를 따랐다.
“……?”
거실로 들어서던 수아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투명한 비닐봉투와 그 속에서 유유히 움직이고 있는 광어 한 마리.
“저건 뭐야? 네가 사 온 거야? 너는 회 뜰 줄도 모르면서 왜 살아 있는 걸 사 왔어?”
그래. 어젯밤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니 저렇게 태연하게 물을 수 있는 거겠지.
어휴. 다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또다시 생성된 수아의 흑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