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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후회
2022.07.19.



 
수아의 회식이 있던 날.

프리랜서인 다은이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 수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번에 주문했던 책상 오늘 설치하러 오신다고 했는데, 갑자기 회식이 잡혀서 늦을 것 같아. 네가 우리 집에 가서 좀 봐줘.]

며칠 전 느닷없이 데스크테리어를 하겠다며 큰 책상 하나를 주문하겠다던 수아였다.

집에 거의 있지도 않는 데다가 집에 와서도 소파랑 한 몸이면서 무슨 큰 책상이냐고 몇 번을 말렸건만 기어이는 지른 모양이었다.

으이구. 다은은 쯧쯧 혀를 차며 수아의 집으로 향했다.

늦은 저녁.

책상 설치가 끝나고, 다은은 조금만 더 있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 한 편을 결재한 뒤 소파에 앉았다.

삑삑삑삑.

한참 영화를 보고 있는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네 집인데 굳이 열어줄 필요가 있나 싶어 다은은 현관문을 쳐다본 뒤 곧장 시선을 거뒀다.

삐빅.

번호를 잘못 눌렀는지 오류를 의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빅. 삐빅.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여러 번 반복되는 소리에 결국 다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비밀번호 하나를 제대로 못 눌…….”

벌컥. 거칠게 문을 연 다은이 현관 앞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준의 등에 업힌 채로 잠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손에 붙들고 있는 저 비닐봉투는 또 뭐야?

동그랗게 뜬 눈이 연신 깜박였다.

하지만 당황한 건 다은만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 수아에게서 전해 들은 비번이 틀린 것도 모자라 느닷없는 다은의 등장이라니.


“다은 씨가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 수아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서로를 향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아 씨가 다른 비밀번호를 알려줬나 봅니다.”

몇 차례 틀린 비밀번호가 마음에 걸렸는지 하준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그전 비밀번호랑 헷갈렸나 보네요. 어, 어서 들어오세요.”

다은이 현관에서 몸을 비켜섰다.


“침대는 이쪽에 있어요.”

다은의 안내를 받아 하준은 침대 위에 수아를 눕혔다.


“잘 자요.”

작게 속삭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눈을 뜬 수아가 하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하준 씨. 어디 가요?”

“이제 집에 가야죠.”

“집이요? 왜요?”

“왜, 왜라뇨.”

그럼 어디를 가야 한다는 거야.

하준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저랑 바닷가 가야죠. 우리 광어 씨 집에 보내줘야 하잖아요. 그래야 가족들 품으로…….”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며, 수아의 손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후우, 긴 숨을 내쉰 하준이 수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조심스럽게 침실을 빠져나왔다.


“이런 민망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어떻게 해요.”

다은은 제가 주정을 한 것도 아닌데, 하준을 볼 면목이 없는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저 물고기는 뭔가요?”

다은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비닐봉투를 가리켰다.


“횟집 수족관에 있던 건데, 자꾸만 바닷가에 있는 가족한테 돌려보내 줘야 한다고 해서 일단은 구입해 온 겁니다.”

“아…….”

이수아.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냐.

상상도 못 했던 물고기의 정체에 다은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아 씨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준은 집으로 돌아갔다.

*



“진짜 미쳤구나. 미쳤어.”

술 먹고 고백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사고를 치냐고.

게다가 광어라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술주정을 부릴 수가 있느냐고.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밀려드는 수치심으로 몸이 바르르 떨렸다.

겨우 준비를 마친 수아가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나 출근한다.”

“와서 해장국 먹고 나가. 북엇국이야.”

“아니야. 나 오늘은 빨리 나가야 돼.”

오늘도 자신을 데리러 왔을 하준을 마주치지 않으려면 평소보다 서둘러야 했다.


“하준 씨 벌써 집 앞에 와 있어.”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북엇국. 하준 씨가 가져다준 거니까.”

다은은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고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술주정뱅이 여친이 뭐가 예쁘다고 이런 것까지 해다 바치는지 모르겠어.”

“야. 술주정뱅이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애써 부정해보지만,


“저 광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

테이블 위의 광어를 보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식탁을 향해 다가갔다.

*

이 와중에도 북엇국을 두 그릇이나 먹어치운 수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문 앞에 섰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냥 오늘 병가 낼까?”

“무슨 이유로? 술병 났다고?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술병으로 병가를 내?”

“그렇겠지? 안 되는 거겠지?”

말과는 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알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듯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출근이나 해. 이러다 하준 씨까지 지각하게 하지 말고.”

“우리 오피스텔에 뒷문 같은 건 없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도망치고 싶다.

어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회식 전으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나가라.”

다은의 짧은 한마디가 수아의 등을 떠밀었다.

저 광어만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광어 너! 딱 기다려라. 내가 오늘 퇴근하고 와서 너를 아주 잘근 잘근 씹어 먹어줄 테니까.

수아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광어를 노려보며 현관을 나섰다.

원래 오피스텔 입구까지가 이렇게 가까웠나?

평소에는 엘리베이터도 층마다 멈춰서 사람 애간장을 태우더니 오늘 같은 날은 왜 한 번에 내려오는 건데?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1층에 도착했다.


“수아 씨.”

역시나.

수아가 오피스텔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수아는 저도 모르게 급하게 방향을 틀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수아 씨!”

다시 한번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

수아는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지만, 얼마 못 가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혀온 하준에게 앞길이 막혀버렸다.


“제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습니까?”

내 마음과는 달리 지나치게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휘감았다.


“어머. 하, 하준 씨. 언제 왔어요? 제가 못 봤나 보네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태연하게 말하려던 계획이 실패했다.


“혹시 지금 일부러 피한 겁니까?”

“아니요? 제가 왜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정곡을 찔린 수아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보려는지 턱을 치켜들며 언성을 높였다.


“굳이 이유라고 한다면 어제 술 마시고 저한테…… 흡!”

수아는 재빨리 손을 뻗어 하준의 입을 막았다.


“그만. 맞아요. 하준 씨 말이 다 맞으니까 그만 얘기해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수아의 표정이 귀여워 하준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라고 도망까지 갑니까?”

“창피하니까 그렇죠.”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창피해하지 말고, 차에 타시죠.”

하준은 세워둔 자동차를 향해 수아를 이끌었다.


‘내가 또 술을 먹으면 그때는 정다은 딸이다. 딸!’

수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올랐다.

출발한 지가 한참이 되도록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차 안.

먼저 침묵을 깬 건 하준이었다.


“우리 오늘 출근하지 말고, 바다나 갈까요?”

“바다요? 바다는 갑자기 왜요?”

“광어 가족 찾아주러 가야 하잖아요.”

그 입 다물어요.

빨갛게 달아오른 수아의 얼굴을 못 본 건지 하준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가족을 찾아줘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숨겨지지 않은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했다.


“아. 진짜. 자꾸만 놀릴 거예요?”

수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푸흡. 알겠어요. 이제 진짜 안 할게요.”

하준은 계속하다가는 수아가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아 아직 뱉어내지 못한 말들은 목구멍 뒤로 삼켜버리기로 했다.


 

*



“어제 하준이랑은 잘 들어간 거야?”

회사 로비를 가로지르는 수아를 향해 지훈이 다가왔다.


“네. 잘 들어가긴 했죠.”

불현듯 떠오른 광어의 모습에 목소리 끝이 축 처졌다.


“어제 하준 씨는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온 거예요?”

하준이 회식 자리에 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망신살 뻗치는 일은 없었을 것 같아 물은 것이었다.


“아마 올 수밖에 없었을걸?”

지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냐고 묻는 수아를 향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수아는 하준을 회식 자리로 이끈 3장의 사진을 확인했다.


“어머! 이런 건 언제 찍으신 거예요?”

“어제 회식 자리에서 찍었지. 각도가 아주 제대로지? 이 사진을 봤는데, 민하준이 안 오고 배기겠어?”

“그러다가 하준 씨가 진짜 오해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어이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꼬리는 왜 올라가실까?”

“앗! 티 났어요?”

“응. 엄청.”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이 되면서도, 혹시나 그가 질투를 한 건가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수아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사진을 좀 더 자세하게 살폈다.


“근데 사진을 진짜 교묘하게 잘 찍으셨네요.”

“그치? 이 정도는 돼야 천하의 민하준을 회식 자리로 부를 수 있는 거라고.”

“하준 씨가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표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그러게. 그건 나도 궁금하네.”

각자 어떤 모습을 상상했는지, 말끝에 수아와 지훈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거기 두 사람은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디자인팀 김유나 팀장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수아가 인사하는 사이 지훈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왜 주머니에 넣어요? 저도 좀 보여주시죠.”

유나가 눈짓으로 지훈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건 같이 좀 보자고요.”

“저희 팀의 업무 관련 사항이니 김유나 팀장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평소 지훈의 모습과는 달리 확실하게 선을 긋는 말투였다.

원래 사이가 안 좋은 걸까. 아니면 나와 하준 씨의 관계를 들킬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런 걸까.

수아는 지훈의 표정을 살폈다.


“회사 업무인데 그렇게 비밀스러울 게 있나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포기하고 돌아섰을 법한데, 유나에게는 냉랭한 지훈의 말투 따위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네. 그렇게 비밀스러울 게 있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서 찬바람이 느껴졌다.


‘이 분위기를 어쩌나?’

두 팀장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수아는 그저 눈동자만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팀장님. 저 먼저 가볼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 나누고 올라오세요.”

수아가 한 걸음을 뒤로 물리며 몸을 틀었다.


“네. 그러세요.”

“아니요. 같이 올라가죠.”

유나와 지훈의 상반된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이제 곧 업무시간이니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지훈이 유나를 뒤로한 채 수아와 걸음을 맞췄다.


“팀장님. 김유나 팀장님 화나신 것 같은데요?”

슬쩍 돌아보며 유나의 표정을 살핀 수아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매정하게도 한 번을 돌아보지 않은 채 지훈은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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