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33/105)


33.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2022.07.23.



 
고급스러운 한정식 식당.


“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리자, 앉아 있던 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고. 이 전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현성 그룹 이승재 전무였다.


“저야 뭐 특별할 게 있나요. 김 회장님이야말로 별일 없이 지내셨습니까?”

진성이 손을 내밀자 승재가 그 손을 맞잡았다.

짧은 악수로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김 회장님. 너무 오랜만에 연락 주신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 전무님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아니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 인사씩이나.”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치면서도 승재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협력 업체 선정에서 이 전무님 도움이 가장 컸다는 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진성이 술이 담겨 있는 병을 들자 승재는 앞에 놓인 잔을 내밀었다.


“오늘은 간단하게 한잔하시고, 조만간 제대로 대접 한번 하겠습니다.”

몇 번의 술이 오가고 난 뒤,


“그나저나 나이 어린 우리 부회장님께서 자꾸 회계 쪽을 들여다본다는 말이 돌고 있던데, 사실입니까?”

“…….”

“사실인가 보군요.”

말없이 술을 넘기는 걸 보니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왜요? 김 회장님께서 주신 돈이 뇌물로 걸리기라도 할까 봐 겁나시나 봅니다?”

진성 그룹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기 위해 진성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던 승재였다.

그 돈만 아니었다면 지원했던 다른 기업들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스펙의 진성 그룹을 추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안 그래도 민하준이 회계팀을 자꾸만 들락거리는 게 영 맘에 걸리던 차에 진성의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어이구. 이 전무님도 참.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진성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희 쪽에서도 제대로 처리한 돈이라 들킬 일도 없겠지만, 들킨다고 하더라도 저희는 이미 한배를 탄 사이 아닙니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요.”

재빠른 진성의 대처가 마음에 들었는지 구겨졌던 승재의 미간이 스르륵 풀어졌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저리 설치고 다니는데, 조만간 알려줘야지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섬뜩한 미소와 함께 매서운 눈빛이 승재의 눈동자 가득 들어찼다.


“혹시 따로 생각해놓은 계획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진성이 승재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계획이라…….”

담긴 술이 단숨에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먼지라면……. 혹시 부회장의 약점이라도 쥐고 계신 겁니까?”

승재가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뭐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그 이야긴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일어나시죠.”

조만간 알게 될 거라고?

진성은 뜻 모를 승재의 말을 곱씹으며, 그를 배웅한 뒤 자신도 차에 올랐다.


“회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지.”

시간은 아직 한낮이었지만, 술을 마신 탓에 피곤함이 밀려왔다.

집에 도착해 현관에 들어서니 거실에 앉아 있던 지수가 진성을 반겼다.


“아빠. 벌써 들어오는 거야?”

“응. 이 전무랑 술 한잔했더니 피곤하네.”

털썩 소리와 함께 진성이 소파에 앉자, 지수가 그 옆에 앉으며 가사도우미에게 꿀물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꿀물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낸 진성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부터 현성으로 출근하는 거야? 프로젝트 시작 날짜는 정해진 거야?”

“TF 팀 직원 배정이랑 사무실 배치도 아직 인가 봐.”

“…….”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 중에 한번 찾아가 보려고.”

“미리 가보려고?”

“응. 전화로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가서 하준 오빠랑 지훈 오빠 얼굴도 좀 보고 일정도 제대로 한번 확인해 보려고.”

진성이 잘 생각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프로젝트에 들어가려고 투자한 금액이 얼만지 너도 알고 있지?”

“그럼. 알고 있지.”

“정보며, 기술이며 뽑아올 수 있는 건 모조리 뽑아 와야 해. 이번에 네 역할이 가장 크다는 거 꼭 명심하고.”

“걱정하지 마. 다른 기업 도움 없이 브랜드 론칭할 수 있도록 제대로 배워올 테니까.”

“그리고…….”

진성이 시선을 돌려 가사도우미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가 주방에 있는 것이 확인되자 진성은 목소리를 줄이며 말을 이었다.


“현성 그룹 다음 주력상품이나, 신제품 디자인, 스펙, 출시일. 이런 것들도 알아 올 수 있으면 알아 와.”

진성이 숨기고 있던 본색을 드러냈다.

사실 그의 목표는 브랜드 론칭 하나가 아니었다.

현성을 따라잡는 것. 그리고 현성보다 앞서나가는 것.

목표 도달을 위한 과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결과. 오직 결과뿐이었다.

*

받아야 할 자료가 있어 홍보팀에 들렀던 수아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수아 씨.”

때마침 홍보팀을 찾아온 유나가 수아를 향해 다가왔다.


“이수아 씨는 민지훈 팀장이랑 친해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다짜고짜 묻는 말에 수아가 눈을 키웠다.


“민지훈 팀장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아요.”

한껏 가시가 돋친 말투였다.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유나가 곧장 말을 이었다.


“팀원이면 팀원답게 선을 지켜줬으면 좋겠네요.”

선이라고?

내가 팀장님한테 선을 넘은 행동을 한 적이 있었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선을 넘는 행동을 했다는 건가요?”

“그럼요. 오늘 아침 일만 해도…….”

유나가 답을 하려던 순간.


“김유나 팀장님.”

유나와 수아가 마주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지훈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수아 사원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잠깐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왜요? 안됩니까?”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사원에게 질문은 삼가시죠.”

“업무가 아니라 개인적인 질문이었는데요?”

“그렇다면 더더욱 삼가셔야죠.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사람의 질문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유나가 수아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이수아 씨 불편했어요?”

“아니, 저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질문이 불편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한 거잖아.

이 두 사람은 아침부터 사람 불편하게 왜 이러는 거야.

지훈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아를 힐끔 쳐다봤다.


“이수아 씨는 그만 사무실로 돌아가 보세요.”

지훈이 사무실 방향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래.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수아는 이때다 싶어 서둘러 몸을 틀었다.


“이수아 씨. 제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요?”

유나가 눈을 치켜뜨며 언성을 높이자 지훈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바쁜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 할 얘기 있으면 저한테 하시죠.”

“…….”

절반만 틀어진 몸으로 눈치를 살피던 수아는 겨우 걸음을 떼어내며 사무실로 향했다.

수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훈이 유나를 쏘아봤다.


“김유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빠야말로 뭐 하는 거야? 내가 쟤한테 궁금한 게 있다잖아.”

“쟤라니. 말조심해.”

“뭐야? 지금 내 앞에서 쟤 편드는 거야?”

유나가 미간을 한껏 구겼다.


“편드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는 말조심하라는 뜻이야.”

“그러게 왜 아침부터 둘이 딱 붙어서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느냐고.”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이내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우리?”

유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왜 포커스가 우리에 맞춰지는 건데? 중요한 건 그다음 말이잖아.

후우, 지훈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말꼬리 붙잡지 말고 잘 들어. 수아는 그냥 같은 팀원일 뿐이야. 이미 남자친구도 있고.”

“남자친구가 있어?”

유나의 구겨졌던 미간이 순식간에 반듯하게 펴졌다.


“그런 건 미리 얘기했어야지. 괜히 쓸데없이 열 올렸네.”

유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원피스 자락을 팔랑거리며 홍보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저렇게 호떡 뒤집듯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 수가 있는지.

지훈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

수아는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민지훈 팀장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아요.]

끝내 이유를 듣지 못한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가까이하지 말라는 걸까.

선을 지키라는 건 무슨 뜻이지?

혹시 나도 모르게 너무 친하게 대했나?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며 걷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합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아의 고개가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하준이 수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부회장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요.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누가 볼까 수아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 걸음을 떼려던 순간.


“제 물건을 돌려받고 싶은데요.”

반걸음을 움직인 하준이 수아의 앞을 막아섰다.


“부회장님 물건이라면 어떤…….”

“어제 민 팀장에게 제 물건을 빌려줬는데, 아직 전달받지를 못해서요.”

“아. 그럼 팀장님께 빨리 반납하시라고 전달해드릴까요?”

“아니요. 저는 민지훈 팀장 말고, 이수아 씨가 돌려줬으면 좋겠는데요.”

“네?”

수아는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민지훈 팀장은 오늘 무척 바쁠 예정이라 반납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바쁜 팀장을 도와주는 건 어떻습니까?”

……응?

……아!

눈을 깜박이며 하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뒤늦게 깨달음이 왔는지 수아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오호. 반납을 핑계 삼아 사무실로 찾아오게 만들겠다?

연애는 처음이라면서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왔대?

수아의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네. 그럼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눈치를 채건 말건, 하준과 수아는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서로를 엇갈려 지나갔다.


 
서둘러 사무실에 도착한 수아는 지훈의 자리를 살폈다.

이야기가 금방 끝났는지 그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아는 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어제 하준 씨한테 빌린 물건이요. 제가 가져다줬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

[네가? 왜?]

[팀장님은 오늘 엄청 바쁘실 예정이라, 도와드리는 마음으로 제가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하! 민하준. 네가 언제부터 나 바쁜 거에 신경 썼냐?

그리고 카드가 한 장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급해?

하여간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천하의 민하준이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네가 직접 간다고? 하준이한테는 티 내지 말라고 하더니, 이수아도 별수 없구먼?]

피식피식 지훈의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겠어요. 잠깐이라도 보겠다고 저렇게 애를 쓰는데. 한번은 넘어가 줘야죠.]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거다.]

[아니거든요. 오늘은 하준 씨한테 잘 보여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한 번만 넘어가 주는 거라고요.]

[잘 보여야 할 이유가 뭔데?]

뭐긴요. 어제의 술주정에 대한 입막음용이죠.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중얼거리며 수아는 다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제가 직접 가져다줘도 되죠?]

지훈은 메시지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이수아 씨.”

사무실 직원들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였다.


“네. 팀장님.”

“저랑 잠깐 홍보팀에 같이 가죠.”

“네.”

기다렸다는 듯 수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앞.


“어제 하준이한테 빌린 카드야.”

지훈이 주변을 살피더니 수아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팀 회식이라고 했더니 너 맛있는 거 먹이고 싶다면서 카드 주더라. 꼭 소고기 사 먹이라고.”

“…….”

“네 덕분에 우리 팀 전부 입 호강 한번 제대로 한 거지.”

지훈의 말에 갑자기 심장 안쪽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아. 당신이란 사람.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야.

수아는 하준의 카드를 두 손에 꼭 쥔 채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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