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위험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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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위험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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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위험한 행동
2022.07.26.
“부회장님. 마케팅팀 이수아 씨가…….”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상보다 이른 방문이 반가워 말을 끝까지 들을 여유가 없었다.
박 비서가 문을 열자, 수아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하준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왔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아를 반겼다.
“하준 씨. 저 당분간은 여기 오면 안 될 것 같아요.”
응? 갑자기?
느닷없는 폭탄 발언에 그게 무슨 소리냐며 하준이 소리를 높이자 수아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들어오면서 느낀 건데, 박 비서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상하게요?”
“네. 부회장실이라는 곳이 저 같은 신입사원이 자주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
“그런데도 저는 벌써 몇 번째 드나들고 있고요.”
“그거야 그럴만한 이유가…….”
“괜한 오해 사지 않게 당분간만이라도 조심해야겠어요.”
이미 마음을 먹었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수아 씨가 원하면 그렇게 해요.”
하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린 채로 힘없이 대답했다.
수아는 그의 기죽은 표정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 비서님도 문제지만, 다른 직원들까지 생각한다면 회사에서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여기 하준 씨 카드요. 팀장님한테 들었어요. 하준 씨가 저 소고기 사주라고 카드 준 거라면서요?”
수아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첫 회식인 만큼 이왕이면 수아 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역시 제 생각해 주는 사람은 하준 씨밖에 없는 것 같네요. 고마워요.”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수아가 말을 이었다.
“어제 소고기 진짜 맛있었어요. 다들 고급 고기 먹었다면서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글쎄 소고기가 얼마나 부드러웠냐면…….”
아기 새가 재잘거리듯 수아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참 동안이나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른 직원들 말고 수아 씨는요?”
한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하준이 그녀의 말이 잠깐 멈춘 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요? 저 뭐요?”
“저는 다른 건 모르겠고, 수아 씨만 궁금합니다. 수아 씨가 맛있었는지, 수아 씨가 즐거웠는지.”
하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궁금한 건 그거 하나뿐입니다.”
아…….
수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뭐야? 저 완벽하게 기울어진 각도 뭐냐고.
“도, 도대체 이런 거는 어디에서 배워온 거예요?”
겨우 입을 뗀 수아가 얼굴을 붉히며 하준의 얼굴을 붙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이런 거라뇨?”
“이렇게 고개 꺾으면서 얘기하는 거 말이에요. 지금 그거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고요.”.
위험하지. 위험해. 나 지금 순식간에 홀릴 뻔했잖아.
수아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이게 왜 위험한 행동인지…….”
다시 고개를 기울인 그의 끈적한 눈빛이 수아의 시야에 들러붙었다.
헐. 이 남자 뭐야?
“하준 씨 연애 처음이라는 말 거짓말이었죠? 처음인데 뭐가 이렇게 능숙해?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
수아가 입술을 불뚝 내밀었다.
“지난번에 공부하겠다고 말했잖습니까. 제가 또 하나를 배우려고 들면 열쯤은 금방 알아내는 사람이라…….”
이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하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쌓은 지식, 혹시나 다른 여자한테도 써먹을 생각이라면 그 공부라는 거 당장 멈추는 게 좋을 거예요.”
수아의 귀여운 협박에 하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생각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안심하라는 말에 그제야 수아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아 참! 저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수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디자인팀 김유나 팀장님 알아요?”
“네. 알고는 있죠.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봅니까?”
“아니. 혹시 민지훈 팀장님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건가 싶어서요.”
“지훈이랑요?”
“네. 아까 보니까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
수아의 말에 하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닐 텐데요? 지훈이랑 유나는 부모님께서 친구 사이시라 어렸을 때부터 서로 집도 자주 오가면서 지내는 거로 알고 있어요.”
서로 친한 사이라고? 그런데 아까는 왜 그랬지? 전혀 친해 보이지 않던데.
수아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생각에 빠졌다.
“쓸모없는 지훈이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우리 얘기하면 안 됩니까?”
하준이 수아와 시선을 맞추며 손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직원들 얘기에, 지훈이 얘기에, 도대체 우리 얘기는 언제 합니까?”
“우리 얘기라뇨? 어떤 우리 얘기요?”
“이를테면…….”
하준이 상체를 숙여 수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하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우리의 스킨십…….”
바로 그때,
수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 급히 몸을 떨어뜨린 수아가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김민준 대리님]
“또 김민준 대리입니까?”
휴대폰 액정을 함께 확인한 하준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맘에 안 듭니다. 그 대리.”
뭐야? 진짜 질투하는 거야? 맞네. 질투네 질투.
대놓고 맘에 안 든다는 하준의 말에 수아는 그가 질투를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맘에 안 들면 어떻게 할 건데요?”
나도 한번 놀려보자. 수아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방법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하준이 입술 끝을 길게 늘였다.
“업무 이외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도록 업무량을 조절한다거나.”
“…….”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발령을 새로 한다거나.”
“…….”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예 인사권을…….”
웃음으로 씰룩이던 수아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인사권이라니! 설마 지금 한 말들 진심은 아니죠?”
“진심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까?”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표정이 당황스러워 수아의 입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아니에요. 저랑 대리님은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수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손사래를 쳤다.
“대리님과 저는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라고요.”
그냥 직장 동료?
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수아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뭐예요? 지금 제 말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수아 씨가 그 대리한테 좋아한다고 하는 거 들었습니다. 그냥 직장 동료라면서 그런 말은 왜 한 겁니까?”
“제가요? 제가 대리님한테 좋아한다고 했다고요?”
수아는 말도 안 된다며 내가 언제 그랬냐고 따져 물었다.
“어제 말입니다. 어제 마케팅팀 사무실 앞에서 둘이 나란히 앉아서는…….”
하준은 의혹으로 가늘어진 눈으로 더 이상은 떠올리기 싫다며 시선을 돌렸다.
어제 사무실 앞이라고? 사무실 앞이라면…….
“그거는 광고 제작 회의 때문에 같이 있었던 거거든요. 좋아한다고 한 적 없어요.”
“좋아한다고 두 번이나 말하는 걸 제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요.”
아니라니까. 나는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
“이분이 요즘 대세라던데 수아 씨도 이 분 좋아해요?”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요.”
설마 이 대화를 들은 건가?
“그건 광고모델 후보들 중에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보여서 그렇게 얘기 한 거라고요. 무슨 그런 오해를 해요?”
설마 내가 대리님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을까.
나 참. 수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김 대리님하고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인사권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일랑 하지도 말아요. 알았죠?”
어린아이 달래듯 차분히 말하는데,
“그 대답도 마음에 안 듭니다.”
여전히 구겨진 표정의 하준이 말을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저 외의 다른 남자를 보고 좋아한다고 하는 건 금지입니다. 절대금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단호한 표정과 말투였다.
“알겠어요. 항상 하준 씨만 생각하고, 하준 씨만 좋아할게요. 그럼 됐죠?”
“뭐. 일단은요.”
그제야 기분이 조금은 풀렸는지 하준의 미간을 채우고 있던 굵은 주름들이 천천히 사라졌다.
“저 이제 그만 사무실로 가야 할 것 같아요. 땡땡이가 너무 길었어요.”
더이상 같이 있다가는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수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요?”
“우리 내일은 밖에 나가서 데이트할까요? 주말이잖아요.”
아쉬움이 담긴 하준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수아는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데이트?
단어 하나에 하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좋아요. 데이트 좋습니다.”
“그럼 우리는 내일 더 많은 시간 함께 보내는 걸로 해요. 저 갈게요. 수고해요.”
사랑스러운 미소로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준 채 수아는 부회장실을 빠져나갔다.
*
외부 일정이 늦어질 것 같다는 하준의 연락에 수아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으. 피곤하다.”
가방을 던져놓고, 지난주에 못 본 방송을 잠깐 보고,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타이밍 좋게 전화벨이 울렸다.
“일이 지금 끝난 거예요?”
[네.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많이 피곤하겠네요.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끊으려고요?]
수아의 말이 마무리 멘트로 들렸는지 하준이 놀란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아니요. 혹시 끊자는 소리로 들렸어요?”
“……하아.”
대답은 없고, 안도의 숨소리만 들렸다.
수아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피곤할 테니까 집에 가서는 일하지 말고 바로 쉬라는 뜻이었어요.”
[아. 그런 뜻이었어요? 괜히 놀랐네요.]
내가 끊자고 해도 싫다고 말하면 되지. 뭘 놀라기까지 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시 내일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하준의 물음에 음. 소리를 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일단은 서점에 가고 싶어요.”
[그럼 장소는 서점으로 하고. 몇 시에 데리러 갈까요?]
“저 내일 아침 일찍 휴대폰 수리 센터에 들를 거라, 집 앞으로 데리러 오지 말고 서점에서 바로 만나요.”
[수리 센터도 같이 가면 되죠.]
“아니. 거기는 주차장이 없어서 불편할 거예요. 어차피 수리 센터에서 서점까지 얼마 안 걸리니까 그냥 서점에서 바로 만나는 거로 해요.”
[그래요. 그럼 서점에서 만나요.]
그렇게 첫 번째 데이트 장소가 정해졌고, 이후에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연인들만이 보낼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었다.
“하준 씨. 잘 자고, 좋은 꿈 꿔요.”
[수아 씨도 잘 자요. 우리 내일 만납시다.]
우리의 시간은 오늘보다 내일이 한 움큼 더 달콤하길.
작은 바람과 함께 하루가 지나갔다.
*
다음 날.
‘시간이 좀 남았네.’
하준보다 미리 서점에 도착한 수아는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목차를 슥 살피고는,
“오. 내용 괜찮네.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하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아 씨. 휴대폰 수리는 끝났습니까? 데리러 갈까요?]
[아니요. 생각보다 수리가 빨리 끝나서 벌써 서점에 와 있어요. 하준 씨는 어딘데요?]
[서점 건물 주차장입니다. 금방 올라갈게요.]
[네. 그럼 서점 입구 쪽에서 만나요.]
수아는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뒤, 서점 입구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서점 입구 근처에 다다랐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음이 느껴졌다.
어느 작가의 팬 사인회라도 있는 건가 싶어 가까이 가보려는데,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입구에 서 있는 저 사람 봤어? 진짜 잘생겼지?”
“그러게. 완전 딱 내 스타일인데. 여자 친구 있겠지?”
“당연하지. 지금도 여자 친구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엄청 예쁘겠지?”
“야. 우리 좀만 기다렸다가 여자 친구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궁금하잖아.”
“그럴까? 그래. 그럼 그러자.”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가만히 대화를 듣던 수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흔들리는 시선을 애써 다잡으며 수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봤다.
헐.
역시나 아무런 반전 없이 사람들의 시선 끝에는 그가 있었다.
오늘도 열일하는 완벽한 비주얼을 갖춘 민하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