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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잡힌 물고기 (35/105)


35. 잡힌 물고기
2022.07.30.



 
하준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수아는 서둘러 몸을 틀었다.

여자 친구를 보겠다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이상 그에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내가 나타났을 때 그들이 보일 반응이란 너무도 뻔했으니.


‘책은 다음에 산다고 하고, 주차장에서 보자고 해야겠다.’

메시지를 보내려 휴대폰을 꺼내 드는 순간.

갑자기 허리를 감싸오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

수아가 깜짝 놀란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채 얄미울 만큼 여유롭게 웃고 있는 하준과 시선을 마주쳤다.


“제가 손 흔들었는데 못 봤습니까?”

“네. 모, 못 봤어요.”

하준이 고개를 아래로 기울이며 물어왔고,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한 수아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어디서든 눈에 안 띌 키가 아닌데.”

말하고도 웃긴지 그가 작게 웃었다.

이런. 이 와중에도 자기 자랑이라니.

여자 친구를 오징어로 만들어 놓고, 지금 웃음이 나와?

수아는 파르르 열을 올리려다 일단은 여기를 빨리 벗어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수아는 하준의 손을 붙잡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서두르던 수아의 걸음이 멈췄다.


“사고 싶은 책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네. 그런 것 같아요.”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괜찮겠지.’

상대적으로 사람이 가장 적은 곳을 찾은 수아는 그제야 하준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남자친구와 서점 데이트.

수첩에 적어두었던 수아의 데이트 로망 중 하나였다.

남자친구와 함께 서점에서 서로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나란히 앉아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

민철이나 그 후에 몇몇 썸 탔던 남자들은 왜 그리도 서점을 싫어하는지 책 냄새라면 질색을 했더랬다.

문득 하준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마케팅 관련 책 좀 사려고요. 왜요? 서점 싫어해요?”

질문을 던지고는, 재빠르게 하준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요. 좋아합니다. 저도 가끔 책을 사곤 하니까요.”

오예! 좋대. 좋아한대.

티 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이미 번진 미소를 지워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서점에 온 게 그렇게 좋습니까?”

“네. 너무 좋아요.”

서점보다는 서점을 좋아하는 당신이 더 좋지만.

이런 수아의 속을 모르는 하준은 그저 ‘서점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서점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비록 관심분야는 달랐지만, 수아가 책을 고르는 동안 하준도 주변의 책들을 살피며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이거지. 바로 이거거든.

특별하거나 대단한 데이트는 아닐지라도 나와 취향이 맞는다는 이 느낌 하나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수아는 들썩이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도서 검색대에서 출력한 책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어? 저 책인 것 같은데.’

수아는 제 키보다 한참이나 위에 꽂혀있는 책을 바라보다 발뒤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낑낑대며 팔을 뻗으려는데,


“이거요?”

어느새 다가온 하준이 너무도 손쉽게 책을 꺼내주었다.


“꺼내 달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혹시라도 다른 남자들이 꺼내주면 어떻게 하려고 혼자 낑낑대고 있어요.”

“뭘 어떻게 해요. ‘고맙습니다’ 하고 덥석 받아야죠.”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래서 시선을 못 떼는 거지.”

하준이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난이에요. 장난. 만약에 다른 남자들이 꺼내주면 바로 바닥에 던져버릴게요. 필요 없어요! 소리 지르면서.”

“음. 그 방법 맘에 쏙 드네요.”

만족스럽다며 하준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우리 이제 다른 데도 가볼까요?”

수아가 하준의 팔에 팔짱을 끼우며 이동하려던 그때.


“이수아 씨……?”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아는 그것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하준의 팔에 끼워진 자신의 팔을 황급히 빼내었다.


“이수아 씨 맞죠?”

김유나 팀장이었다.


“두 사람 지금 여기에서 뭐 하는 거예요?”

유나는 당황한 듯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수아와 하준을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수아가 겨우 입을 떼어 말을 하려던 순간.


“야! 김유나. 네 책은 네가 들어야……지.”

지훈이 유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팀장님?”

어이없는 상황.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점 한가운데에서 네 사람은 할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유나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아니라요. 그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겠다고 입은 열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좀 전까지 끼고 있던 팔짱이 문제였다.

그러게 왜 팔짱을 껴서는 이 사단을 만들어.

자책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만.”

하준의 엄지가 수아의 입술에 닿았다.


“입술 빨개졌어요.”

아니야. 이러면 안 된다고.

수아가 재빨리 하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설마. 두 사람…….”

“아닙니다.”

“응. 사귀어.”

대답은 동시에 나왔지만, 그 뜻은 전혀 달랐다.


“하준 씨.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수아 씨는 지금 저랑 사귀는 게 아니라고 한 겁니까?”

하준은 수아를 향해 미간을 좁혔다.


“회사에서는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요.”

“여기는 회사가 아니잖습니까.”

“회사 사람 앞이잖아요.”

서로 티격태격하는 수아와 하준을 바라보던 유나의 눈이 확신에 찼다.


“헐. 대박. 진짜 사귀는 거야?”

남자친구 있다더니 그게 하준 오빠였어?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잘게 가로로 저었다.

잠시 후. 네 사람은 서점 안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 하준 오빠랑 이수아 씨랑 사귀고 있다는 거지?”

유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같은 질문을 몇 번째 던지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야?”

당사자들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데,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지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


“하준 오빠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

난데없이 던져진 폭탄 발언에 유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동공이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야! 너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훈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아니. 나는 하준 오빠가 여자에 전혀 관심을 안 보이길래,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

그도 그럴 것이 하준에게 대시했던 여자들이 어디 보통 여자였겠는가.

알아주는 집안에 키며, 몸매며, 뭐하나 빠지지 않는 대단한 여자들이었다.

일반적인 남자라면 10분이 뭐야. 단 10초 만에라도 홀랑 넘어가 버릴 만한 여자들이었는데.

그런 여자들의 노골적인 대시들을 칼같이 잘라내던 하준의 모습에 그런 오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럼 지훈 오빠랑은 뭐야? 질투 나게 왜 그렇게 친하게 지낸 거야? 핸드폰도 막 보여주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유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질투 나게?

아하. 수아는 유나의 말에 그제야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가시를 잔뜩 세우며 나와 지훈 팀장님과의 관계를 물었는지.

왜 가까이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는지.


“제가 현성에 입사하기 전에 팀장님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조금 친분이 있었던 거예요.”

수아는 지금이 오해를 풀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서둘러 설명했다.


“아. 그랬구나. 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 미안해요. 그러게 오빠가 진작 알려줬으면 좋았잖아.”

유나는 친절한 미소를 띠며 수아에게 사과하고는 곧장 지훈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데?”

“그걸 몰라서 물어? 나한테는 그걸 알 권리가 있다고!”

“무슨 권리?”

“오빠 근처에 얼씬거리는 여자들에 대해 조사할 권리.”

“그러니까 그 권리가 왜 너한테 있냐고.”

“내가 오빠를 좋아하니까.”

“…….”

유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네 사람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야! 김유나! 너 이런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다시는 너 안 봐.”

지훈이 정적을 깨며 곤혹스러운 낯빛으로 언성을 높였다.

수아가 유나의 표정을 살폈다.

신기하리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수아 씨. 나중에 우리 둘이 따로 한번 만나요. 돌부처 같은 하준 오빠 마음을 어떻게 얻었는지 방법 좀 전수받게.”

“네? 아니, 딱히 방법이라고 할 게…….”

“에이. 그러지 말고 알려줘요. 그 방법으로 민지훈 마음도 한번 가져보게.”

정말 어떤 면으로는 대단한 여자였다.

어떻게 저렇게 속에 있는 말을 숨기지 않고 모두 내뱉을 수 있을까.

한 번쯤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럼 다음에 시간 맞춰서 한번…….”

“다음은 무슨 다음이야. 만나지 마. 회사에서도 모른척해.”

지훈이 재빠르게 수아의 말을 가로챘다.


“그럼 우리는 다음에 만나는 거로 하고, 우리는 이제 흩어져서 각자 하던 데이트를 마저 하는 게 어때요?”

지훈의 말은 유나의 귀에 닿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래. 그게 좋겠다.”

이만 헤어지자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금껏 말없이 앉아만 있던 하준이 대답했다.

지훈을 제외한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뭐해? 오빠도 빨리 일어나.”

유나가 지훈의 팔에 팔짱을 끼우며 거칠게 일으켰다.

순간 하준의 얼굴에 평소 지훈이 자주 짓던 장난스러운 표정이 담겼다.


“민지훈. 즐거운 시간 보내라.”

피식. 마무리는 비웃음과 함께.


“야! 민하준 너까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준과 수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지훈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카페를 나선 후 수아가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준 씨는 저 두 사람 관계 알고 있었어요?”

“유나가 지훈이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매일 저렇게 티를 내고 다니니까요.”

“그럼 팀장님은요?”

“지훈이는 항상 같은 반응이에요. 아까 같이 본 장면이 제가 늘 봐왔던 모습입니다.”

“그럼 팀장님은 유나 팀장님을 싫어한다는 거예요?”

“글쎄요. 싫어한다고 하기엔……. 저렇게 자주 밖에서 만나는 걸 보면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요?”

수아가 미간을 좁히며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 저쪽은 그만 신경 쓰고, 저한테 좀 더 신경을 쏟아주시죠.”

하준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잡힌 물고기라도 먹이를 안 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모릅니까?”

“잡힌 물고기요?”

“네. 잡힌 상태로 애정이란 먹이를 갈구하는 불쌍한 물고기 말입니다.”

하준이 양 끝의 입술을 모아 금붕어 입술을 만들더니 뻐끔뻐끔 움직여댔다.


“어머. 매일 먹이를 주고 있었는데, 왜 못 먹었을까요?”

“거짓말. 혹시 다른 물고기한테 준거 아닙니까?”

다른 물고기?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를 들면, 김민준 대리라든지. 민지훈이라던지.”

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

이 남자는 어쩜 질투하는 것까지도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귀염둥이 내 금붕어.


“어?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제 어장은 작은 어항 크기라 한 마리밖에 못 들어갈 텐데요?”

“수아 씨가 모르는 틈에 그 어항 속으로 두 마리가 이사를 와버렸다고요.”

하준이 입술을 불뚝 내밀었다.


“넓은 수족관에 사는 광어만 불쌍하고 건장한 물고기 두 마리와 부대끼며 살고 있는 저는 불쌍하지 않습니까?”

또 나왔다 저 광어. 으이구 정말. 말이나 못 하면.

말로는 못 이기겠다며 수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하준의 양 볼을 붙잡았다.


“잘 봐요. 내가 어떻게 먹이를 주는지.”

쪽. 수아의 입술이 하준의 입술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기억해봐요. 이렇게 확실하게 주고 있었다고요.”

씨익. 수아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하여간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하준은 그제야 서운했던 마음이 풀어진 듯 수아를 따라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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