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믿어, 믿는다고. (36/105)


36. 믿어, 믿는다고.
2022.08.02.


주말이 지나가고 찾아온 월요일.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수아의 시선이 로비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직원들에게로 향했다.


“봤어? 진성 그룹 외동딸이라던데?”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예쁘긴 예쁘더라.”

“그러게. 그런데 여긴 왜 온 거래?”

“이번에 시작하는 프로젝트 협업 때문에 왔다고 하던데?”

직원들의 대화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으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아. 나는 또 부회장님 만나러 온 줄 알았네.”

“웬 부회장님?”

“아니. 좀 전에 인사팀 회의실 앞을 지나가다가 부회장님이랑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거든.”

부회장님이라면 하준 씨?

순간 수아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하준 씨가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랑 회의실에 있다고?

그것도 단둘이?

마음 한구석에 애써 묻어두었던 불안함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수아는 이내 걸음을 옮겨 인사팀 회의실로 향했다.

불안함이 커지는 만큼 수아의 걸음도 빨라졌다.


“오랜만에 오빠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수아가 회의실에 다다랐을 무렵.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 여자겠지. 진성 그룹 외동딸.

수아는 차마 모퉁이를 돌지 못한 채로 벽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기회에 오빠 얼굴도 더 자주 볼 수 있겠다.”

오빠? 오빠라고?


“이번 프로젝트에 회장님 기대가 크셔. 일에 집중해 주면 좋겠는데.”

이어서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하준의 목소리였다.


“걱정하지 마. 우리 회사도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기대가 큰지 오빠도 알잖아.”

지수는 하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해맑게 웃었다.

아. 프로젝트 협업 때문에 온 게 맞구나.

대화를 통해 그녀가 하준을 찾은 이유가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밀려든 불안함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예쁘긴 예쁘더라.]

조금 전 들었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연예인처럼 예쁜가?

하아. 이 와중에도 여자의 얼굴이 궁금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보지 말자. 자존감만 더 떨어질 수도 있고…….”

분명 말은 그렇게 했는데,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수아의 고개는 어느새 벽 바깥으로 빼꼼 내밀어져 있었다.

뭐야? 지금 팔짱 낀 거야?

얼굴만 잠깐 보려고 한 건데, 서로 엉켜 있는 두 사람의 팔을 발견한 순간 수아의 두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아니. 왔으면 조용히 볼일만 보고 갈 것이지. 남의 신성한 회사에서 팔짱은 왜 껴? 남녀칠세부동석 몰라?

팔짱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데, 지수가 뒤로 돌아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으니 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벽을 붙잡은 손을 부르르 떨며 두 사람을 노려보던 그때.


“수아 씨.”

외근 나갔던 민준이 수아를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해왔다.


“여기에서 뭐 해요? 인사팀에 뭐 전해줄 것 있어요?”

“아, 아니요.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그래요? 저도 지금 사무실 들어가는 길인데 같이 가죠.”

“네. 그, 그래요. 어서 가요.”

자신이 여기에 있었음을 들킬까 싶어 수아는 서둘러 민준의 팔을 붙잡고는 하준의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같은 시각.


‘수아 씨?’

누군가의 목소리에 실린 채 들려온 수아의 이름에 하준의 눈이 번뜩 뜨였다.

하준은 고개를 쑥 빼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수아의 모습을 찾았다.


‘김민준 대리?’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녀가 직장동료일 뿐이라던 남자의 팔을 붙잡은 채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 팔을 붙잡은 거야? 팔을?’

하준의 미간에 짙은 골이 생겼다.

오늘에야말로 김민준 너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걸음을 떼려던 하준은 그제야 자신의 팔에 엮인 지수의 팔을 알아챘다.


“김지수. 이러지 마. 여기 회사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준은 지수의 팔을 떼어냈다.


“아. 외국에서 이런 스킨십 정도는 워낙 흔한 인사라.”

“여기는 외국이 아니야. 보는 눈들도 많고, 이러면 서로 불편해서 업무를 진행할 수가 없어.”

차가운 하준의 눈빛에 민망해진 지수는 애써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또 시작이네. 저 차가운 눈빛과 냉정한 태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면서도 지수는 단 한 번도 그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면전에 대고 날리는 잔인한 멘트와 냉정한 선 긋기뿐.

그렇게 여러 해를 경험했지만 이 남자의 냉정함은 참 익숙해지질 않았다.


“미안해. 오빠. 내가 실수했어.”

“그래.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할 말을 마친 하준이 돌아서려 발끝을 옮기려던 그때.


“김지수?”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지훈이 지수를 알아보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지수 맞구나? 너무 예뻐져서 못 알아볼 뻔했네.”

“아. 뭐야. 나 원래 예뻤거든?”

공주병은 여전하구나.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회사에는 어쩐 일이야? 프로젝트 벌써 시작된 거야?”

지훈의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

결국 수아는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고, 발이 붙잡힌 하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TF팀 구성만 끝났어. 이번 주에 사무실 위치 확정되면 업무 시작할 예정이고.”

“당분간 현성 그룹 사무실에서 신세 지게 생겼네?”

지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날짜 확정되면 오빠들이 바로 알려줘. 나도 들어와서 적응도 해야 하니까.”

“그래. 그럼 들어가라.”

하준이 걸음을 돌리려다가,


“아 참. 프로젝트 시작 전에 이렇게 불쑥 회사로 찾아오는 건 삼가줬으면 하는데.”

좀 전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였다.


“다음에 보게 될 때는 부회장님 팀장님 호칭 잊지 말고.”

상대의 기분 따위 살필 필요 없는 관계였기에 하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



‘그 여자 앞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낯선 여자와 팔짱을 끼고 있던 하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수아는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진성 그룹 외동딸이면 집안 배경은 말할 것도 없겠지.

진짜 그렇게 예쁜가? 당연히 나보다는 훨씬 예쁘겠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큰 불안함 속으로 수아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띵동. 수아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왔다.

번뜩 정신을 차린 수아가 액정을 살폈다.


[너네 회사 근처에 왔는데,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어?]

다은의 메시지였다.


[어. 대리님한테 말하고 나갈게.]

[회사 앞 공원에 앉아 있을 테니까, 이따 나오면 연락해.]

[그래. 이따 봐.]

메시지를 보낸 뒤, 수아는 마음을 다잡으며 업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시계가 12시를 가리켰다.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는 직원들을 바라보던 수아는 조심스럽게 민준에게 다가갔다.


“대리님. 저는 친구가 회사 앞에 와 있다고 해서요. 같이 점심 먹고 들어오려고요.”

“아. 그래요? 좋겠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요.”

“네. 대리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수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향했다.

*



“와. 맛있겠다. 나 피자 먹은 지 진짜 오래됐는데.”

다은과 함께 회사 앞 스파게티집을 찾은 수아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피자와 스파게티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수아는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한입에 넣었다.


“회사 생활은 어때?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

한입 가득 들어찬 스파게티를 우물거리며 씹고 있는 수아를 바라보던 다은이 물었다.

평소 같았다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일이었지만, 다은도 최근에는 일이 들어와 바쁘게 작업을 하다 보니 한동안 수아와 대화를 하지 못한 터였다.


“응. 없어. 없어. 다들 엄청 잘해주셔. 너무 좋아.”

“근데 표정이 왜 그래? 꼭 무슨 일 있는 사람처럼.”

순간 피자를 잡으려 손을 뻗던 수아의 손이 멈칫했다.


“티 나냐?”

역시나. 애써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해봐야 다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내가 널 모르냐? 딱 보면 알지.”

“아니.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신경이 좀 쓰여서…….”

그럼 그렇지.


“뭔데? 말해봐.”

다은은 수아와 시선을 맞추며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늘 회사에 진성 그룹 외동딸이 찾아왔다고 하더라고.”

“진성 그룹 외동딸? 그게 누군데?”

“나도 잘은 몰라. 아무튼 그런 여자가 있대.”

“어. 그래서?”

“그런데 직원들 말이 하준 씨랑 단둘이 있다는 거야.”

“오호.”

이야기가 흥미로웠는지 다은이 손에 들린 피자를 접시에 내려놓고는 상체를 기울여왔다.


“그래서 내가 둘이 같이 있다는 그 회의실로 찾아갔지.”

“봤어? 어떻게 생겼는데? 예뻐?”

“뒤돌아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못 봤어.”

수아의 말에 다은은 아쉽다며 목소리 끝을 내렸다.


“그런데 직원들 말로는 엄청 예쁘대. 연예인 같다던데? 내가 봐도 뒷모습은 연예인이더라고. 키랑 몸매가 아주…….”

수아가 말끝을 흐리며 포크로 스파게티를 쿡쿡 찔러댔다.

그냥 예쁜 여자 한 명이 찾아온 것만으로 이수아가 이렇게 풀이 죽을 리가 없지.


“왜? 그 여자가 하준 씨랑 뭐라도 있었어?”

다은의 질문에 수아가 시선을 빠르게 들어 올렸다.


“글쎄. 팔짱을 끼면서 오빵 그러더라고.”

“오빵?”

“어. 혀가 반 토막 난 줄. 콧소리까지 내면서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더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싶었으나 수아는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말투를 뱉어냈다.


“그래서 우울모드에 빠지셨다?”

“아니. 우울모드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말로는 부정해보았지만,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너랑 나 사이에 숨길 게 뭐가 있어. 솔직하게 말해봐.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는 거잖아.”

“기분이 나빴다기보다…….”

수아는 말끝을 늘이며 자신의 감정에 대해 되돌아봤다.


“불안함?”

그래. 적당한 단어를 찾자면 불안함에 가장 가까웠다.


“그 재벌 집 여자한테 하준 씨를 뺏길까 봐 그러지?”

정곡을 찔린 듯 수아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잘 지내다가도 남자친구의 곁에 있는 여자들만 보면 밀려드는 불안함과 두려움.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다.


“수아야. 이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

“…….”

“물론 네가 벗어나고 싶다고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지. 그래도 나는 네가 행복한 연애를 했으면 좋겠어.”

“나도 그러고 싶어. 하준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다은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


“믿고 싶으면 믿어야지. 왜 자꾸 의심할 부분을 찾아내려고 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준 씨를 믿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의 트라우마는 항상 별것 아닌 일을 수면 밖으로 끄집어내고는 그 빈자리를 늘 불안감을 채워 넣었으니.


“그래. 나는 하준 씨를 믿어.”

이번만큼은 끝까지 하준 씨를 믿고, 그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거야.


“고마워 다은아. 항상 너랑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뭔가를 결심하게 돼.”

“그래. 그 결심 끝까지 밀어붙여. 하준 씨 진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놓치지 마.”

“응. 그럴게. 먹자 먹어. 갑자기 식욕이 막 솟는다.”

엉킬 대로 엉킨 실타래가 순식간에 풀린 느낌이었다.


“아. 배부르다. 너무 맛있었어.”

“그러게. 스파게티 맛집 하나 찾았네.”

“우리 다음에는 리소토도 먹어보자.”

못 먹은 리소토가 아쉬운지 수아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면서도 입맛을 다시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래. 그러자. 그만 들어가. 수고하고.”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수아가 회사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다은도 돌아서는데,


‘……김지수?’

다은은 주차되어 있던 검은색 세단에 오르고 있는 여자가 지수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수아도 이 근처에서 만났다고 했었는데. 회사가 이 근처인가? 괜히 기분 나빠지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 느낌. 다은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아니겠지?

다은은 혹시나 같은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이내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