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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둘만의 공간 (37/105)


37. 둘만의 공간
2022.08.06.



 


“아으. 배불러.”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수아가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다들 식사를 마치고 커피타임을 즐기는 듯했다.

수아는 새삼 자신이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음을 떠올렸다.

가장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점심시간이 2시간이라는 점?

대리님의 말에 의하면 자유로운 시간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거나, 잠깐의 낮잠으로 오후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식사 후 회사 곳곳에서 눈치 보지 않고 수다를 떨며, 여유롭게 사무실로 올라오곤 했다.

수아는 자리에 앉아 깊숙이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 너무 좋다. 이 배부름과 고요함.”

한동안 여유를 부리던 수아의 머릿속에 문득 하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준 씨는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갑자기 보고 싶네.

회사에서는 티 내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한 말을 내가 어길 수도 없고.

아니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수아가 다급히 몸을 세웠다.


“내가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지, 연락도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연락하는 건 괜찮겠지.”

수아는 자기합리화와 함께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준 씨.]

혹시나 바쁠까. 수아는 여러 문장을 붙이지 않고, 그의 이름만 적어보았다.


[네. 수아 씨.]

기다렸다는 듯 하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바빠요?]

[아니요. 전혀 안 바쁩니다. 바빠도 안 바쁩니다.]

뭐야. 바빠도 안 바쁘다니. 피식 웃음이 번졌다.


[그냥 생각나서 불러봤어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하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수아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부를 거면 목소리로 불러야지 왜 문자로 부릅니까?]

전화를 받자마자 듣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남친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쁠까 봐 그랬죠.”

[수아 씨 전화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제든 목소리로 불러줘요.]

“알겠어요. 앞으로는 그럴게요.”

[수아 씨. 우리…… 잠깐 볼까요?]

망설이던 하준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회사에서는 티 내지 말아요.

당분간은 조심해야 해요.

제가 내뱉었던 말들이 수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그래요. 그럼 23층 문서창고로 지금 바로 와요.”

에라 모르겠다.

마음이 머리를 제치고 빠르게 목소리를 뱉어냈다.


[저 지금 일어났습니다. 5분이면 도착합니다.]

하준의 말에 수아도 곧장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23층 문서창고는 민준에게 회사 소개를 받을 때 알게 된 장소였다.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월말에 중요 문서를 저장할 때만 사용한다는 곳.

지금은 월초이니 사람들이 올 일이 거의 없는 장소였다.

가끔 땡땡이를 치고 싶을 때 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써먹게 될 줄이야.

수아는 한껏 들뜬 걸음을 재촉했다.

*

수아에게 메시지를 받기 바로 전.


“부회장님.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도시락이라도 준비할까요?”

점심 식사를 할 생각이 없는지 아까부터 책상에 앉아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는 하준에게 박 비서가 물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박 비서님 일 보세요.”

박 비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도시락이라도 사 올까 했지만, 사 온다 한들 먹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발끝을 돌렸다.

바로 그때.


“박 비서님!”

하준의 목소리에 박 비서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네. 부회장님.”

“특별한 사유 없이 직원을 지방으로 발령 내는 건 역시 안 되는 일이겠죠?”

“네?”

순간 하준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인사발령이야 부회장의 권한이니 자신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다니.

누구를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방 발령을 내야 하는 직원이 있으십니까?”

있죠. 망할 김민준 대리라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 뭉그러졌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그만 나가보세요.”

박 비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하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팔은 왜 잡은 거지? 그 자식이 수아 씨 마음 약한 거 알고 잡아달라고 했나?”

김민준 대리의 팔을 잡고 멀어지던 수아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무래도 본사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을 내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휴대폰 액정에 불이 들어오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려왔다.


[하준 씨.]

하준은 눈동자만 돌려 액정을 바라보다가 발신인이 수아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보통의 연인들처럼 별 것 아닌 내용에도 입꼬리가 들썩거리는 메시지가 오고 가다가,

고민하던 하준은 결국 통화버튼을 눌러 그녀에게 잠깐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당분간은 조심하자던 그녀의 말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어봐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마케팅팀 책상 하나가 비워질 것 같으니.

하준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뭔가 일이 생긴 듯 달려 나가는 하준의 모습에 박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개인 일입니다. 박 비서님 일 보세요.”

박 비서가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 하준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후였다.

그렇게 내달려 도착한 문서창고 앞.

하준은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이익. 적막을 깨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창고 안을 울렸고, 하준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하준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창고 안을 둘러봤다.


“수아 씨. 혹시 여기 있어요? 아직 안 온 거……!”

수아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던 하준의 몸이 누군가의 힘으로 거세게 당겨졌다.

순식간에 하준의 등이 벽에 닿았고, 이내 그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수아 씨?”

하준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의 시선 아래에 있는 수아를 향해 고개를 꺾었다.


“네. 저 여기 있어요.”

수아는 다정하게 답하며,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려 하준과의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얼굴 가까이 다가온 수아가 속삭였다.


“저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죠. 너무 보고 싶어서 사무실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차마 그러질 못했죠.”

“왜요? 왜 못 했을까?”

“혼날까 봐?”

풉. 예상치 못한 하준의 말에 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준 씨는 이런 장소가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문서를 가져오라는 지시는 내려 봤지만, 직접 와 본 적은 없는 공간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들어와 본 건 처음인데, 분위기가 참 좋은 곳이었네요.”

“무슨 분위기가 좋다고…….”

빛이라고는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것이 전부인 곳에서 웬 분위기?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수아가 이내 의미를 알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어색함에 눈동자를 굴리던 수아의 시야에 하준의 팔이 들어왔다.

낯선 여자에게 끼워져 있던 팔.

수아는 입술을 앙다물며 하준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

갑작스럽게 옆구리를 파고드는 체온에 하준의 눈동자가 커졌다.


“소독하는 거예요. 소독.”

“소독……이라뇨?”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껌뻑거리던 하준이 이내 알겠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혹시 아까 회의실 앞에서…….”

“봤어요. 어떤 여자랑 다정히 팔짱 끼고 있는 거.”

수아가 하준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아, 아닐 텐데? 다정히는 절대 아닐 텐데요. 잘 생각해 봐요. 그건 아니었을 거예요.”

당황했는지 하준이 말을 더듬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완전한 사랑을 주겠다고 결심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하준의 팔을 본 순간 눌러놓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하나를 알려고 들면 열을 깨우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고. 내가.”

“아니. 그건…….”

“다른 여자한테 써먹을 생각이면 당장 그만두라고 분명히 경고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기억하죠?”

“네. 그럼요. 기억하고말고요.”

빠른 대답과 함께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수아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왜 배운 걸 애인한테는 안 써먹고 애먼 여자한테 써먹고 있는 걸까?”

말끝을 늘이며 눈을 흘기는데,


“아니. 그 팔짱은 제가 끼운 게 아니라…….”

억울하다며 하준이 목소리를 키웠지만 그 목소리가 수아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오빠? 오빠? 아니 신성한 회사에서 오빠가 웬 말이야?”

하! 하! 헛웃음 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혹시 수아 씨 지금 질투하는 겁니까?”

‘오빠’ 소리를 따라 하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이 물었다.


“질투면 왜요? 질투가 암투가 되길 원해요? 그 여자랑 암투극 한번 제대로 찍어볼까요?”

수아가 소매를 걷는 시늉을 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요?”

그제야 하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드러냈다.


“내 눈에는 수아 씨밖에 없는데, 도대체 누구랑 암투극을 벌이려고요?”

“…….”

하준의 미소에 수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씨.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맘껏 화도 못 내게 말이야.

투덜거리며 삐죽이던 수아의 입술이 열렸다.


“그분. 프로젝트 협업 때문에 왔다는 거 알고 있어요.”

수아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해야죠. 여긴 회사니까 오빠 말고 부회장님.”

“안 그래도 벌써 얘기했습니다.”

“가까이 붙어 앉거나, 다정하게 마주 보면서 웃는 것 금지!”

검지와 중지를 세우더니 제 눈을 한번 찍고는 하준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제가 지켜볼 거예요.”

아으. 무서워. 무서운데 귀여워. 귀여운데 사랑스럽고.

한 가지만 하자. 한 가지만.


“네.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분명 자신도 민준에 대해 따질 게 한가득했던 것 같은데, 하준은 그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누군가와 팔짱을 낀 것만으로도 이렇게 흥분하며 화를 내는 사람에게 민준의 팔을 왜 잡았는지 묻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수아의 질투만으로도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니까.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이제 그만 가야겠어요.”

시선을 돌리다 시간이 1시 45분을 지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수아가 문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때.

헉. 하준이 수아의 손목을 잡고는 자신을 향해 당겼다.


“앗.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하준을 올려다보는데,

상체를 숙이며 어느새 수아의 눈앞까지 다가온 하준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아 씨. 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어요.”

“네? 네. 그, 그러네요. 우리밖에 없…….”

대답을 하려는데, 하준의 입술이 수아의 이마에 닿았다.

하준이 다시 속삭였다.


“우리밖에 없으니까 좋네요.”

“그러게요. 좋네…….”

이번에도 수아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 하준의 입술이 수아의 코에 닿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자꾸 자신의 말을 막으려는 하준의 태도에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계속 말하고 있잖아요. 우리밖에 없다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하준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는 듯했다.


“그, 그러니까 우리밖에 없는 게 뭐가…….”

쪽. 짧은 소리를 내며 하준과 수아의 입술이 맞닿더니 금세 떨어졌다.


“열심히 배운 거 애인한테 써먹어야 하니까.”

하준은 수아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오롯이 두 사람만 있는 곳.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서의 깊고 진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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