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잠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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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잠깐이라도
2022.08.09.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수아가 시계를 확인했다.
2시 5분.
생각보다 많이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친구랑 맛있는 거 먹었어요?”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민준이 다가와 물었다.
“네. 커, 커피도 같이 마셨어요.”
왜 늦었냐는 질문이 날아올까 봐 수아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와. 부럽네요. 회사로 찾아와주는 친구도 있고. 내 친구들은 뭐 하고 있나 몰라.”
한탄하며 몸을 돌리던 민준의 시선이 수아의 목덜미 위에서 멈췄다.
“어? 수아 씨. 이거…….”
민준이 검지로 수아의 목덜미 부근을 가리켰다.
“네? 뭐, 뭐요?”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던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혹시 하준이 남긴 그것이…….
“아. 이, 이거요? 이거는 그러니까.”
민준이 더듬거리는 수아의 말을 잽싸게 가로채며 말했다.
“모기 물렸어요?”
“네?”
“모기에 물린 자국 같은데요?”
“아. 그, 그런가 봐요. 요즘에도 모기가 있나 보네요. 하하.”
수아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재빨리 손으로 목덜미를 가렸다.
“헐. 나 모기 알레르기 있는데, 조심해야겠다.”
민준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수아는 그제야 서랍에서 거울을 꺼내 목 부근을 살폈다.
가까이에서 보면 보일 듯한 붉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하준 씨도 정말…….”
수아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블라우스 깃을 매만졌다.
*
Rrrrr.
현성의 집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네. 여보세요.”
소파에 앉아 있던 혜선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엄마. 저예요. 시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혜선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엄마. 저 지금 한국에 왔어요.]
“응? 뭐라고? 어디를 왔다고?”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혜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높아진 혜선의 목소리에 놀란 현성이 급히 거실로 나왔다.
“언제? 언제 온 건데?”
현성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혜선이 말을 이었다.
[지금이요. 지금 막 도착했어요.]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그래야 데리러 가지.”
[아니에요.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야. 바로 집으로 갈게요.]
“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해서 와.”
통화를 마친 혜선이 손에 들려 있던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무슨 전환데 그렇게 놀라요?”
현성이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현성의 계속되는 질문에 혜선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시우 전화예요.”
“시우? 시우가 왜요? 시우한테 무슨 일 있대요?”
현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시우가 지금 한국에 왔대요.”
“한국이요?”
“네. 지금 도착해서 집으로 오고 있대요.”
말하는 혜선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날 둘째 아들 생각에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떨려왔다.
*
인천공항.
공항의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고 시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 서 있던 여성들의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칼.
그 사이로 보이는 조각 같은 외모.
190은 족히 되어 보이는 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그의 모습에 시선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우는 그런 시선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무심히 그들을 지나쳐서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시우의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췄고, 기사의 도움을 받아 트렁크에 짐을 싣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택시는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시우의 얼굴엔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7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로 한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이제 건강도 좋아졌고, 한국에는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그의 형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우가 탄 택시가 현성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문 앞에 나와 시우를 기다리고 있던 혜선과 현성이 택시를 향해 다가왔다.
“언제 올 줄 알고 나와 계셨어요.”
시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혜선과 현성에게 다가갔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하자.”
집으로 들어오는 내내 혜선과 현성의 시선은 시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야. 여기는 바뀐 게 하나도 없네요.”
시우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어떻게 온 거야? 아예 들어온 거야? 오라고 할 때는 그렇게 싫다더니”
“한 번에 하나만 물어보셔야죠.”
시우는 쏟아지는 현성의 질문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한국은 비행기 타고 왔고, 일단 계획은 아예 들어온 거예요. 오라고 할 때 안 온 건 그땐 공부하고 싶은 게 남아 있어서였고요.”
이번에는 혜선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제 공부할 거는 다 끝난 거야? 정말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시우는 너무도 좋아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좀 더 빨리 돌아올 걸 하고 생각했다.
“네. 일단은 끝났어요. 나머지는 한국에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이제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고 싶고, 형도 보고 싶어서요.”
“너 오는 거 하준이도 알고 있는 거야?”
“아니. 형은 아직 몰라요. 서프라이즈 해주려고요.”
시우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하준이한테 오늘 집에 들르라고 전화해야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선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 시각 하준은 책상에 앉아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계획에 없던 키스.
한번 올라간 입술 끝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때. 책상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리고, 하준의 시선이 액정을 향했다.
[사모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입술 끝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준은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사모님.”
“어. 하준아. 많이 바쁘지?”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별일은 아니고, 혹시 오늘 저녁에 일정이 있나 해서.”
갑작스럽게 자신의 일정을 확인하는 혜선의 질문에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오늘 저녁이요? 특별히 잡혀 있는 일정은 없습니다.”
“다행이다. 그럼 오늘 집에 와서 엄마, 아빠랑 같이 저녁 먹을까? 지훈이도 같이.”
평소 현성과 혜선의 생일 외에는 따로 부르시는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저녁을 먹자니.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평소와 다른 혜선의 태도에 대한 당연한 물음이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저녁이나 먹자는 거야.”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하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하준은 그녀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럼 오늘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이따 저녁에 보자.”
“네. 들어가십시오.”
참 정중한 통화였다.
혜선이 말한 엄마, 아빠란 단어가 아니었다면 업무적인 통화라고 해도 믿을 만큼 딱딱한 통화.
통화가 끝나자 하준은 곧장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어머니가 집에 들르라고 하시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지훈은 이미 하준의 전화를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거야?”
[안 그래도 여쭤봤는데, 누가 신선한 요리 재료를 보내주셨다고. 그걸로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연락하신 거라던데?]
“그래. 알겠어. 이따가 6시에 같이 출발하는 거로 하자.”
지훈과의 통화를 끝낸 하준이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수아에게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겼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수아 씨. 저 오늘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아는 하준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갑자기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시네요.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해요?]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하니까요.]
풉. 수아의 입술을 비집고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이제 갓 시작한 연인 사이라 해도 매일 함께 저녁을 먹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하준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가족과의 저녁 식사인걸요. 걱정하지 말고 내 몫까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요.]
메시지 전송버튼을 누른 수아는 바로 메시지 하나를 더 입력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얼굴 한 번 더 보여주고 가던가요.]
이대로라면 오늘은 더 이상 하준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에 뭔가 아쉬움이 느껴져 보낸 메시지였다.
[문서창고로 다시 갈까요?]
하준이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한 수아가 얼굴을 붉혔다.
문서창고라는 단어가 이렇게 야한 단어였나?
큰일이다.
이제 문서창고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곳에서 하준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아니요. 저 지금 1층 로비로 커피 사러 갈 거예요. 엘리베이터 타고.]
[커피 마시고 싶어요? 제가 사다 줄까요?]
역시나 하준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대답을 해왔다.
커피를 사다주겠다니. 부회장이 일개 신입사원에게 커피를 무슨 명목으로 사 온다는 건지.
생각할수록 엉뚱한 대답이었다.
[하준 씨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제가 타이밍 맞춰서 그 엘리베이터에 탈게요. 그럼 잠깐이라도 얼굴 볼 수 있잖아요.]
수아는 메시지를 작성하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자신의 행동이 놀라웠다.
회사에서는 절대 아는 척하지 말라고.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혹시나 너무 들이댄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좋은 방법이네요. 마침 저도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지금 엘리베이터로 갈게요.]
하준의 메시지에 수아는 옆에 앉은 희수에게 살짝 고개를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다녀와요.”
수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때쯤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 지금 2번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고 있어요.]
수아는 재빨리 2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는 수아가 있는 층에 멈춰 섰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이미 엘리베이터 안에는 많은 직원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직원들 속에서 하준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삐죽 솟아 있는 저 우월한 기럭지 덕분에.
수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준의 눈빛에 살며시 웃음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들어갈게요.”
수아는 재빠르게 직원들 사이를 파고들어 금세 하준이 서 있는 뒤쪽까지 이동해왔다.
그녀가 작은 체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수아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하준은 수아가 직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옆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준은 시선을 낮춰 수아를 내려다보았고, 수아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준을 바라봤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바로 그때. 수아의 손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수아는 예상했다는 듯 자신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하준의 손길을 깊숙이 받아들였다.
복잡한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임에 틀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