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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뭐가 문제야 (39/105)


39. 뭐가 문제야
2022.08.13.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수아는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 위에 휙 던져놓고는 침대로 향했다.

털썩.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몸이 천근만근인지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매일 하준 씨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퇴근한 것이 원인인 듯했다.

사실 이 정도의 이동이 고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이보다 더 먼 장소로도 아르바이트를 다녔었으니.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자동차로 퇴근하는 것에 어느새 적응이 되었는지, 이 별것 아닌 움직임을 몸에서는 운동이라고 인식했나 보다.

침대에 들러붙어 버린 수아의 몸은 어서 씻어야 한다는 이성적 사고의 말을 들을 마음 따윈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이수아. 퇴근했냐?”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수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너는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냐?”

“지금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어. 좀 누워 있다가 씻을 거야. 너는 작업 다 끝난 거야?”

“어. 너랑 점심 먹고, 작업의뢰 업체랑 미팅했는데 오케이 떨어졌어.”

다은은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소파에 앉았다.


“야! 빨리 와. 나 작업 끝난 거 축하주 마셔야지.”

“축하주? 좋지.”

좀 전까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던 수아의 몸이 용수철 튕기듯 튕겨져 나와 소파로 다가왔다.


“어떤 거 사 왔어?”

소파에 앉자마자 수아는 봉투를 열어 맥주와 안주들을 확인했다.

봉투 안에는 캔 맥주, 다양한 안주용 과자와 견과류, 그리고 마른안주들이 가득했다.


“다은아. 너 작업 매일 해야겠다. 그래야 이런 축하주를 매일 얻어먹을 거 아니야. 맛있는 거 엄청 많네. 흐흐”

수아는 봉투 속 내용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을 반짝였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캔 맥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서둘러 뚜껑을 땄다.

새하얀 거품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왔다.

쓰읍.

수아는 재빨리 입을 가져다 대어 하얀 거품을 빨아들이고는 그대로 맥주 캔을 기울여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 이 맛이지. 퇴근 후 캔 맥주는 진리지. 진리야.”

그런 수아의 모습에 다은도 서둘러 맥주를 잡았다.


“다은아. 작업 끝난 거 축하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너도 하준 씨랑 잘된 거 축하해.”

캔과 캔이 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그때, 수아의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댔다.

[하준 씨]

휴대폰의 액정을 함께 확인한 다은이 입술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전화한다더니.”

수아가 다은의 어이없는 발언에 풉 웃어 보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하준 씨. 본가에 잘 도착했어요?”

[네. 지금 도착했습니다. 본가에 들어가면 연락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전화한 거예요.]

“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저녁 맛있게 많이 먹고 와요.”

[수아 씨는 저녁 먹었습니까?]

“저는 지금 다은이랑 같이 맥주 한 캔 하고 있어요.”

맥주 한 캔이라는 말에 하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술 마시는 겁니까?]

“아니요. 맥주는 술이 아니고 음료수예요. 음료수.”

재빨리 받아쳤다.


[음료수를 마시고 필름이 끊겼던 건 수아 씨가 아니었나 봅니다.]

“아니. 아니. 저번에 필름이 끊겼던 건 소주를 마셔서 그런 거고 이거는 맥주라니까요?”

[소주나 맥주나 같은 알코올입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았으면 하는데요.]

하준의 말투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동안 수아가 술에 취해 보였던 버라이어티한 술주정들이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은 씨랑 함께라고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다은이라면 수아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게 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딱 1캔씩만 더 먹고 정리할 거예요.”

[알겠어요. 속 아프지 않게 빈속에 마시지 말고요.]

“알겠어요. 하준 씨도 저녁 맛있게 먹어요.”

[네.]

통화를 끝낸 하준은 지훈과 함께 서둘러 현성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큰어머니. 저희 왔어요.”

오늘도 변함없이 지훈이 앞서 들어오며 혜선을 불렀다.


“지훈아 어서 와. 하준이도 어서 오고.”

혜선이 현관으로 걸어 나오며 지훈과 하준을 반겼다.


“큰어머니.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요리재료기에 이렇게 급하게 초대하신 거예요?”

“보면 알지. 저녁 준비 다 됐으니까 어서 손 씻고 와.”

대답대신 어서 밥을 먹자고 말하는 혜선의 모습에 지훈은 하준을 향해 어깨를 들어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서 먹어보자는 의미였다.

지훈과 하준은 욕실에 들러 손을 씻고 주방으로 들어서던 그때.


“형!”

서프라이즈를 하겠다며 주방 입구 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우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눈동자는 번쩍 뜨였다.


“야! 민시우!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지훈은 시우를 발견하자마자 격앙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지난번에 잠깐 보고 못 봤으니까, 3년 만인가?”

“잠깐 쉬러 온 거야? 아니면 아예 들어 온 거야?”

“이번에는 좀 눌러 살아볼까 생각 중이야.”

“그래 잘 생각했네. 큰어머니. 큰아버지 좋으시겠어요.”

조용했던 주방은 어느새 지훈과 시우의 떠들썩한 대화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고, 하준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준이 형. 형은 내가 안 반가운가 봐?”

서운한 듯한 시우의 말투에 하준이 한 걸음 다가섰다.


“오랜만이다. 잘 왔어.”

“그게 다야?”

“…….”

하준의 짧은 인사에 시우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의 입에서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시우는 금세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뭘 기대 하겠어. 형은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무리 형이라 부르며 쫓아다녀도 하준은 시우에게 살가운 표현 한 번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 하준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가 자신을 반겨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반가움의 인사는 밥 먹고 마저 하고,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자. 어서들 앉아.”

한참을 서서 인사를 나누던 하준과 지훈, 그리고 시우를 향해 현성이 말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모여 앉은 가족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한국에 들어온 거라고?”

“응. 이제는 엄마 아빠랑 같이 살려고.”

“그래. 큰어머니 큰아버지 진짜 좋으시겠어요.”

“그럼 좋지. 너무너무 좋지. 너무너무너무 좋지.”

현성과 혜선의 가슴 속에는 품 안에서 따뜻하게 키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현성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감정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혜선도 시우를 향해 전에 없던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참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하준은 즐거워하는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고, 하준을 제외한 사람들만이 즐겁게 웃으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새 식사시간이 지나갔고, 가족들은 디저트와 차를 마시기 위해 거실 소파에 둘러앉았다.

현성이 먼저 입을 떼었다.


“그래 시우는 한국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며? 어떤 건지는 정한 거야?”

시우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일단은 공부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아버지 도움이 꼭 필요해요.”

“내 도움?”

“저. 현성 그룹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우의 말 한마디에 소파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지훈이었다.


“일을 하겠다고? 갑자기 무슨 일?”

지훈의 질문에 시우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거 써 먹어보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준이 형이랑 같이 일해보고 싶어서.”

시우의 말을 듣고 있던 현성이 하준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래. 시우는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데, 하준이 네 생각은 어떠냐?”

현성의 물음에 하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진행 초기라 시우가 업무를 파악하고 이끌어가는 데 문제될 것이 없고, 또 제가 진행하고 있는 나머지 업무들도 며칠만 인수인계하면…….”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

하준의 말을 듣고 있던 현성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하준의 말을 가로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준은 급하게 시선을 들어 올리며 현성을 바라봤다.


“네. 그러니까 제가 인수인계를 빠르게 진행하면…….”

“그러니까 네가 왜 시우한테 인수인계를 한다는 거냐고.”

현성이 다시 한번 하준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그건…….”

하준은 현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거실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 사이로 소파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마저도 굳어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뭐가 죄송한 건데?”

또다시 시작된 현성의 질문에 하준의 눈동자는 풍랑을 만난 듯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가 죄송한 거냐고?

사실 하준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현성의 표정을 통해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급히 사과를 한 것뿐.

현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준에게 큰소리를 내거나, 인상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하준을 바라보는 현성의 눈에서는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뭐가 죄송하냐니까?”

하준은 현성이 던지는 반복된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하준의 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들 가라.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 쉬어야겠다.”

현성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의 모습에 혜선이 낮은 한숨을 뱉어내며,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하준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시우가 굳게 닫혀 있었던 입술을 떼며 말했다.


“형, 진짜 바보구나?”

옆에 앉아 있던 지훈도 시우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민하준. 너 진짜 바보였구나? 넌 혼나도 싸다. 싸.”

“뭐가 잘못된 건지 말을 해줘.”

하준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봐. 내가 말해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너 먼저 가라. 나는 시우랑 얘기 좀 하다가 알아서 갈게. 시우야 올라가자.”

지훈이 소파에 앉아 있던 시우에게 눈짓하자 시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사람마저 거실을 떠나,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제 거실에는 하준만이 홀로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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