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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
2022.08.16.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어느새 따라 들어온 혜선이 현성의 곁에 앉았다.


“아니. 내가 언제 지한테 부회장직 내놓으라고 한 적이 있냐고요.”

하준이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지만,


“지금까지 시우가 오면 부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설마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그저 기다리면 되겠거니, 조금만 더 묵묵히 기다려주면 먼저 다가와 주겠거니.

마음이라는 게 형체가 없어 너무 안일했던 걸까.

말 한마디에 드러나 버린 아들의 마음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가슴에 박혔다.


“서운한 당신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그동안 묵묵히 아들의 변화를 기다려왔지만, 그도 사람인데 왜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하준이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거 당신도 알고는 있잖아요.”

“…….”

“하준이는 조금 느린 것뿐이지. 멈추지 않고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현성에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말은 혜선이 늘 자신에게 해왔던 다짐이었다.


“당신, 20년 전 하준이를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요?”

“당연히 기억하죠. 어떻게 그날을 잊겠어요.”

혜선의 말에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현성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20년 전,

세상을 잃은 듯 절망스러웠던 자신들의 곁으로,

세상을 잃어버린 하준이가 찾아 왔던 그 날이.

*



“시우 군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입니다.”

시우는 혜선과 현성이 어렵게 얻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이었다.

얼마 전부터 가끔 코피를 흘리기에 그저 건강검진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찾은 병원이었는데, 백혈병이라니.


“선생님. 아닐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시우가 그럴 리가 없어요.”

의사 선생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얼마나 간절하게 애원했었는지 모른다.

제발 살려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매일같이 의사를 찾아가 애원했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항상 하나였다.


“조혈모세포은행에 연락해놨으니 시우 군과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장님! 사모님! 시우 군과 일치하는 공여자를 찾았습니다.”

병원의 연락을 받은 그길로 병원으로 들어가 이식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었다.

아직 이식을 받은 것도 아닌데, 시우의 병이 벌써 다 나은 것처럼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른다.

그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죄송합니다. 공여자가 기증을 하지 않겠답니다.”

그때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의사의 말 한마디에 희망은 지독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왜요? 도대체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저희가 그분을 만나서 설득해볼 수는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공여자의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없이 냉정한 의사의 말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우리 시우 좀 살려주세요.”

간절하게 애원하며 매달리다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가 당신 아들이라도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겠어?”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 분노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오르내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현성은 결국 불법인 줄 알면서도 사람을 시켜 공여자를 찾아냈다.

아니, 공여자의 아버지인 현철을 찾아냈다.

현철은 기다렸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10억을 요구해왔고, 현성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으니.


“돈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공여자를 만나보고 싶은데요. 그리고 저희가 제시하는 병원에서 적합성에 대한 검사를 한 번 더 해보고 싶습니다.”

현성의 말에 현철은 병원으로 바로 데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곧장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병원에서 기다리던 현성과 혜선의 귀에 어린 남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제발요. 저 안 가고 싶어요.”

10살쯤이나 되었을까.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깡마른 남자아이가 현철의 손에 붙잡힌 채 질질 끌려 병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게 현철과 혜선이 마주했던 하준의 첫 모습이었다.


“빨리 들어와!”

“그 손 이제 놓으시죠.”

현성은 거칠게 잡아끄는 현철의 손을 급하게 잡아챘다.

혜선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하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어린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험한 일을 겪은 걸까.

하준은 혜선의 손이 다가오자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빨리 그 검사인가 뭔가 해보쇼. 그래야 빨리 돈을 받을 거 아니요?”

“제가 데려가서 입원 절차 밟고 진행할 테니 아버님께서는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검사 결과 나오고 이식 진행되는 대로 돈은 입금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쇼.”

현철은 지금부터 아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병원을 빠져나갔다.

혜선은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하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며 시선을 맞췄다.


“이름이 뭐니?”

“김……하준이요.”

“그래. 멋진 이름이네. 하준아. 혹시 지금 장례식장에서 오는 길이니?”

검은색 양복과 팔에 두르고 있는 띠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엄마가 우리 엄마가…….”

하준은 흐느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혜선은 하준을 천천히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하준아. 아줌마한테는 이제 7살이 된 시우라는 아이가 있어. 그런데 시우가 지금 몹쓸 병에 걸렸단다.”

“죽어요?”

몹쓸 병이라는 말에 자신의 곁을 떠나간 엄마가 생각난 걸까. 슬픔이 가득한 눈망울로 물었다.


“지금 치료를 못하면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다행히도 시우의 병을 낫게 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

“그게 저예요?”

하준은 벌어진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응. 하준이가 우리 시우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래. 그래서 아줌마는 하준이가 우리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제가 도와주면 그 아이 살 수 있어요?”

혜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와줄게요. 우리 엄마는 제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하준은 돌아가신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며 방법이 무엇인지는 묻지도 않은 채 무조건 돕겠다고 말했다.


“정말? 하준아. 너무 고마워.”

혜선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줌마랑 아저씨가 너무 고마워서 하준이한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선물이요?”

제 인생에 허락되지 않은 단어였기에 하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응. 우선은 깨끗하게 씻자. 그러면 아줌마가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예쁜 모습으로 엄마 보내드려야지. 하준이 엄마가 행복한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아줌마랑 아저씨가 도와줄게. 그게 선물이야.”

그렇게 하준은 혜선과 현성의 도움을 받아 부족함 없이,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엄마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장례가 끝난 후 곧바로 검사가 진행되었고, 검사 결과 시우와 하준은 친형제나 가능할 정도의 적합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하준의 골수를 채취하기로 한 날.


“도대체 그 골수라는 건 언제 뽑는 거요?”

“10시에 시작합니다.”

“그럼 돈은 언제 주는 거요?”

그는 아들이 괜찮은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저 돈은 언제 줄 것이냐는 질문만 반복할 뿐.

더이상 그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혜선은 비서를 통해 바로 10억을 송금했다.


“지금 입금했으니 확인해보시죠.”

혜선의 말에 현성은 또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

잠시 후. 골수 채취를 마친 하준은 지친 모습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준아. 아줌마 시우한테 잠깐 다녀올게. 3~4시간은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 들었지?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 금방 오실 거야.”

그렇게 시우의 병실로 향한 지 1시간쯤 흘렀을까.

혹시나 아버지가 왔을까 하준의 병실을 다시 찾은 혜선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침대에 있어야 할 하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3시간 정도는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는데, 혹시나 아버지란 사람이 하준을 억지로 끌고 나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급히 병원장에게 부탁하여 CCTV를 살펴보던 현성과 혜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통으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는 하준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에서 멈춘 것을 확인 한 두 사람은 서둘러 1층으로 향했다.

혹시나 벌써 밖으로 나가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1층 로비를 살피던 혜선은 의자에 앉아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하준을 발견했다.


“하준아, 지금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

“혹시 아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하준이 앉아 있는 곳이 며칠 전 아버지와 헤어졌던 곳이라는 것을 알아챈 혜선이 물었다.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오실 텐데 왜 힘들게 여기까지 나와 있어.”

“……이제 안 와요.”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출입문에 머물러 있는 하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뭐라고?”

“아버지는 이제 안 오실 거예요.”

하준은 현철이 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알았다.

이제 자신은 그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혜선은 아닐 거라고,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고 위로했지만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현철은 병원을 나선 그길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현성과 혜선은 입양 절차를 밟아 하준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김하준이 민하준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출생신고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아이였으니.

그렇게 가족이 된 하준의 골수를 이식받은 시우는 미국으로 옮겨져 치료를 이어갔고, 얼마 뒤 완치될 수 있었다.

*



[뭐가 죄송한 건데?]


[뭐가 죄송하냐니까?]


[그만들 가라.]

그렇게 다그치듯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게 모질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현성은 좀 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준이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늘 그래왔던 아이였으니.

필요한 물건을 책상에 올려두어도 네 것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손도 대지 못하던 아이.

한곳을 지정해 앉으라고 하지 않으면 제 자리가 없는 줄 알고, 어느 한 곳에도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던 아이.

제 물건을 가져본 적도, 제 자리를 가져본 적도 없었기에 하준에게 주변의 모든 것은 그저 남의 것. 남의 자리일 뿐이었다.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잘 기다려 주었는데,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돌덩이라도 얹어놓은 듯 현성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람마다 상처의 크기가 다르듯 치유되는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축 처진 현성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린 혜선은 천천히 그를 토닥여주었다.


“우리를 만나기 전 10년이라는 시간을 하준이가 어떻게 보내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잖아요.”

상상도 못할 상처였을 거라고, 처음 만났던 날의 모습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가진 상처가 너무 크면 20년으로도 부족할 수 있어요.”

혜선의 목소리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언제 돌려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자리를 홀로 지켜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그렇게 애써 지켜낸 자리를 내어주겠다 말하는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하준의 말들과 표정이 떠올라 혜선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자리는 원래 네 자리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비켜주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너의 자리라고 그냥 말해주면 되었을 것을.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어느새 혜선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더 아파하기 전에 빨리 알려줘야겠어요.”

결심이 섰는지 혜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요.”

혜선의 움직임에 현성도 서둘러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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