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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불길한 예감 (41/105)


41. 불길한 예감
2022.08.20.



 
적막한 공기가 내려앉은 거실.

껌뻑. 껌뻑.

홀로 남겨진 하준은 멍하니 앉아 눈을 감았다가 뜨기만 반복했다.

생각이란 걸 하긴 해야겠는데, 애초에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를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생각도 멈춰버린 느낌.

그렇게 한참 동안을 허공만 맴돌던 시선이 현성의 방문에 닿았다.


[뭐가 죄송한 건데?]


[그만들 가라.]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봄처럼 포근하던 목소리는 한순간에 시린 겨울이 되었고, 뒤늦게 찾아온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네가 왜 시우한테 인수인계를 한다는 거냐고.]

아……. 혹시 인수인계를 한다는 말이 문제였나?

내가 너무 나서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말하는 내 표정이 시우를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까.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 지나간 대화들을 곱씹어 보는데도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한 답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가슴속 불안함이 커져갈 때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고,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은 금세 심장으로 번졌다.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란하게 뛰었고, 결국 악다문 어금니까지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지훈이한테 물어보자. 설마 끝까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지훈뿐이라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바로 그때.

헉! 심장이 조이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하준은 허리를 굽히며 가슴팍의 옷자락을 거칠게 말아 쥐었다.


[쓸모없는 자식.]

왜 갑자기…….

20년 동안 애써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날카로운 음성이 불현듯 귓가에 맺혔다.


[쓸데없이 왜 낳아서 고생을 시켜! 고아원이든 어디든 당장 갖다 버려!]

아니야. 그만해. 그만.

다급하게 귀를 틀어막아 보았지만 날이 선 음성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아이. 당장이라도 버리려고 들면 버릴 수 있는 아이.

어릴 적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히던 생각들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민하준이 되던 그 순간부터 항상 쓸모 있는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학교에서는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밤을 새워가며 성과를 내기 위해 애썼다.

또한, 혹시나 시우가 재발했을 경우를 대비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고,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술 한잔 입에 댄 적도 없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이제야 조금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삶은 네 것이 아니라는 듯 보란 듯이 깨지고 부서졌다.


“하아. 하아…….”

과거의 무언가가 목구멍을 막고 있는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여기는…… 병원이 아니야. 아니라고…….”

당혹스러움에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걸까.

하준은 마치 병원에 들어선 듯 찾아온 갑작스러운 고통이 당황스러웠다.


‘일단은 여길 나가야 해.’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하준은 혹시나 가족 중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들킬까 싶어 가슴을 틀어쥔 채로 서둘러 현관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라도 채워졌는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어디 아파요?”

하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는지 그릇을 정리하던 가사도우미가 주방을 나서며 하준에게 다가왔다.


“하아. 하아…….”

하준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괴로운 숨만 겨우 들이쉬고 있었다.


“왜 그래요? 어디가 아픈 건데요?”

가사도우미는 영문을 몰라 발을 동동거리며 허둥댔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고. 이를 어쩐다. 회장님이라도 불러야겠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하준의 모습에 도움을 청하려 걸음을 떼려던 순간.

급히 가사도우미의 팔목을 붙잡은 하준이 고통을 숨기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괜찮……습니다. 하아. 하아…….”

“아니.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지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구먼.”

하준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그는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 좀 더 힘을 주어 붙잡았다.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요. 제발…….”

“…….”

간절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눈빛에 할 말을 잃은 가사도우미는 차마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조금만 쉬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준은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뱉고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현관을 빠져나갔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진짜 말씀 안 드려도 되는 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사도우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주방으로 들어갔다.

*



“내가 괜히 회사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나 봐.”

시우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아래로 쳐졌다.

그저 형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괜한 말을 꺼내 모두에게 불편함을 안겨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하준이 형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러게. 나도 설마 이 정도까지일 줄은…….”

하아. 짙은 한숨에 실려 탁하게 잠긴 지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현성과 혜선을 회장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하준의 모습을 보며 아직은 그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짐작만 해오던 일이 하준의 말 한마디에 사실이 되어버리자 서운한 마음이 앞섰던 것일 뿐.

하준의 발언이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시우와 지훈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큰아버지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우리가 좀 심했나?”

문득 애처로운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던 하준의 눈빛을 떠올린 지훈이 흐르는 정적을 가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뭐가 잘못인 건지 하준이 형 혼자서는 절대 알아내지 못할 텐데.”

“하여간 진짜 손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심각하게 고민 중일 텐데 지금이라도 얘기해주는 게 좋겠지?”

“응. 같이 내려가 보자.”

그렇게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발소리를 들었는지 주방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뭐 간식거리라도 챙겨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지훈은 미소를 보인 뒤 고개를 돌려 거실을 살폈다.


“야. 민하ㅈ…….”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하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어? 하준이 형 갔나 봐.”

지훈을 따라 내려오던 시우도 소파가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듯 말했다.


“저, 저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사도우미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주머니. 혹시 하준이 갔어요? 언제 갔어요?”

“그러니까 그게…….”

가사도우미는 말하지 말라던 하준의 말을 떠올리며 말을 망설였다.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지훈이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하준 도련님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좀 되어서요.”

“네? 무슨 걱정이요?”

“좀 전에 주방에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에 밖으로 나와 봤더니 하준 도련님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채로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더라고요.”

“뭐라고요? 하준이가요?”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건지 현성이 언성을 높이며 되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회장님이라도 불러드리겠다고 했더니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그대로 나가버렸어요.”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았다면 아무리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말씀해 주셨어야죠.”

현성의 목소리에 원망이 섞여 나왔다.


“죄송합니다. 집에 가서 조금만 쉬면 괜찮아진다고 하기에…….”

가사도우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떨궜다.


“당신은 왜 아주머니께 그래요. 흥분 가라앉혀요.”

현성과 함께 나와 있던 혜선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들어가셔서 일 보세요.”

혜선의 말에 가사도우미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 잘못이에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은 죄책감에 미간을 좁히던 현성이 별안간 두 눈을 키웠다.


“아니 잠깐. 집에 간다고 했다고? 그럼 그 상태로 차를 끌고 갔다는 거야?”

현성의 말에 가족들은 서둘러 CCTV를 살폈다.


“주차장에 하준이 차는 그대로 있는데요?”

지훈은 지하주차장을 찍고 있는 화면 속에서 하준의 자동차를 발견했다.


“그럼 어떻게…….”

잠시 생각하던 현성은 되돌리기 버튼을 눌렀고,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감듯 화면 속 모든 것들이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도 되돌리기 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주저 없이 너에게 상처 주기 전으로 돌아갈 텐데.

현성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오던 그때.


“어! 형이다!”

화면에 나타난 하준의 모습을 발견한 시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현성은 급히 재생버튼을 눌렀고, 이내 집을 나선 하준이 비틀거리며 택시에 올라타는 모습을 확인했다.


“제가 하준이한테 전화해 볼게요.”

택시를 탔다면 지금쯤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지훈은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받아라. 전화 받아라.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는 동안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기다렸지만 결국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몇 번을 걸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화 안 받아?”

현성의 물음에 지훈은 말없이 고개만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 게 좋겠다.”

현성이 전화기로 손을 뻗자 지훈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 막혀서 아직 집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제가 하준이 집으로 가서 확인해볼게요. 신고는 그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빨리 가서 확인해봐. 집에 없으면 바로 신고 접수할 테니까.”

“네. 그럼 큰아버지 차 좀 빌려 갈게요.”

하준의 차를 같이 타고 온 지훈은 자신에게 차 키가 없음을 떠올리고는 현성에게 차 키를 건네받았다.


“형. 나도 같이 가.”

걸음을 옮기려는 지훈을 향해 시우가 몸을 돌렸다.


“아니. 하준이는 내가 찾아볼 테니까 너는 여기에 있어. 너라도 곁에 있어 드려야지.”

지훈이 시선으로 현성과 혜선을 가리켰다.


“……알겠어. 그럼 찾는 대로 바로 연락 줘야 해.”

“그래. 알았어.”

지훈은 현성의 차 키를 들고는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

거친 숨을 뱉어내며 겨우 현성의 집을 빠져나온 하준의 걸음이 멈춘 곳은 자신의 오피스텔 옥상이었다.

여기까지 무슨 정신으로 올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옥상이더라.

아마 언제나 그랬듯 무의식적으로 높은 곳을 향해 올라왔으리라.

엄마를 떠나보낸 뒤로 하준은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높을 곳을 찾고는 했다.

엄마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곳.

하준에게 높은 곳이란 엄마와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기에,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늘도 그랬다.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과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준은 무의식적으로 옥상을 찾은 것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답을 알아낸다 한들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표정을 짓고 떠나간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들이라고 다를까.

……결국엔 이렇게 다시 버려지게 되는 건가.

칠흑과도 같은 어두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과거의 기억은 또다시 하준을 지독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그렇게 끝도 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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