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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내가 있잖아 (42/105)


42. 내가 있잖아
2022.08.23.



 


“요즘 이 예능프로그램을 안 보면 웃을 일이 없다니까.”

“그러게. 완전 재미있어.”

소파에 기대앉아 TV를 보던 다은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수아의 휴대폰 액정에 불빛이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야. 너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어? 하준 씬가?”

수아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화를 한 건가 싶어 빠르게 휴대폰을 들어 이름을 확인했다.

[민지훈 팀장님]

기대와는 다른 발신인에 수아의 눈썹이 축 가라앉았다.


“팀장님께서 웬일이세요? 설마 이 시간에 업무 전달하실 건 아니죠?”

“혹시 하준이한테 연락 온 거 없었어?”

평소 같았다면 장난스럽게 받아쳤을 지훈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했다.


“하준 씨요? 오늘 팀장님이랑 같이 본가에 간 거 아니었어요? 아직 연락 온 건 없었어요.”

“……그래?”

“왜 그러시는데요? 혹시 하준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말끝을 흐리는 지훈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설명하자면 긴데, 하준이가 없어졌어.”

“없어지다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나갔는데,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안 돼. 그래서 혹시나 너한테는 연락했을까 싶어서 물어본 거야.”

“…….”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나. 갑작스러운 지훈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도우미 아주머니께는 집으로 간다고 했다길래 지금 가보는 길인데, 차가 너무 막히네.”

지훈은 도로 위 가득 들어찬 차들이 내뿜는 빨간 불빛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보다는 네가 더 가까우니까 혹시 괜찮으면 하준이 집에 가서 좀 살펴봐 줄래?”

“아, 알겠어요.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통화를 마친 수아가 허둥대며 겉옷을 챙겨 들었다.


“왜 그러는데? 하준 씨한테 무슨 일 생겼대?”

수아의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다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준 씨가 없어졌대.”

말하는 수아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탄 수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택시기사에게 하준의 집 주소를 말했다.

잠시 후. 서둘러 가달라는 말 한마디로 도착 시간을 20분이나 앞당긴 수아는 택시가 멈춤과 동시에 하준의 집을 향해 내달렸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뛰었던 날이 있었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고를 수 있었다.

마음이 급할 땐 왜 모든 게 더디게만 느껴지는 건지.

수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엘리베이터 숫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띵동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자 수아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몸을 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하준 씨!”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서는데, 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온 집안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니야. 분명히 있을 거야. 있어야 해.

수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준의 방과 욕실, 게스트 룸, 테라스까지 모두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집이 아니라면 어디로 간 거지? 어디로 갔을까.”

중얼거리며 눈동자를 굴리는데, 과거 하준과 나누었던 이야기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저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놓은 곳에 올라가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입니다.]

산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으로 착각한 자신이 왜 그랬냐고 묻자 하준이 했던 말이었다.


“높은 곳이 어디지? 높은 곳. 높은 곳.”

또다시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고, 이내 수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른 수아는 망설임 없이 가장 높은 숫자를 눌렀다.

제발 있어라. 제발.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른 수아는 급히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벌컥. 옥상 문이 열리고 서늘한 저녁 바람이 수아의 긴 머리칼을 흩트렸다.

제 마음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붙잡아 넘기자 이내 누군가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준 씨!”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하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아 씨?”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수아의 모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수아 씨가 여긴 어떻게…….”

“오늘 본가에서 저녁 먹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수아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달빛을 머금은 듯 하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반짝였다.


“나……. 또 버려졌나 봐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수아는 하준이 뱉어낸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가에 들어가기 전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던 하준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이렇게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 되어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그를 안전하게 곁으로 오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준 씨. 지금 생각할 게 많아서 여기 올라온 거죠?”

“…….”

“생각은 내려와서 하는 게 어때요? 위험하잖아요.”

“…….”

하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수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곁에 없다고 느낀 이 절망스러운 순간에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나 준 사람.

하준은 그런 수아의 모습이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견한 신기루 같은 환상처럼 느껴졌다.

닿는 순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신기루.


“갈 곳이 없긴 왜 없어요. 하준 씨 옆에는 제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내려와요. 안 그러면 나도 그냥 가버릴 거예요.”

수아는 협박이라도 통할까 싶어 말끝에 몸을 틀었다.


“……!”

순간 하준의 몸이 움찔거렸다.

비록 환상일지라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제가 가는 거 싫죠?”

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빨리 이리로 와요.”

수아가 천천히 다가오며 오른손을 내밀었고, 하준의 시선은 금세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정말 잡아도 되는 걸까.

잡는 순간 수아 씨마저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준은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이내 수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을 재빠르게 잡아당겼고, 동시에 작은 품속으로 하준이 안겨 들어왔다.


“참,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

그제야 안심한 듯 옅은 한숨과 함께 수아의 입이 열렸다.


“산에서도 그러더니. 위험하니까 높은 데는 올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자꾸 이렇게 걱정시킬 거예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준은 낮게 중얼거리며 수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

지훈이 하준의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아에게 온 전화였다.


“하준이는? 하준이는 찾았어?”

지훈은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네. 찾았어요.”

“어디에서? 어디에 있었는데? 아니다. 나 지금 주차장이야. 바로 올라갈게. 올라가서 얘기하자.”

지훈은 서둘러 주차를 마치고 하준의 집을 향해 달렸다.


“야! 민하준!”

지훈이 큰 소리를 내며 집에 들어서는데, 때마침 하준의 방에서 나오던 수아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지금 잠들었어요.”

“잔다고?”

“네. 계속 식은땀을 흘리면서 같은 말만 중얼거리더니 좀 전에 잠들어버렸어요.”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데?”

“버려졌다고, 자기는 버림받았다고요. 대체 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버림받았다고?”

지훈은 수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나 잠깐 하준이 좀 보고 나올게.”

지훈은 설명을 원하는 수아를 뒤로 한 채 하준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미간을 한껏 좁힌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하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다. 나라도 옆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너를 나라도 이해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냥 말해줄걸.

큰아버지도 나도 그저 서운한 거였다고.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나라도 이야기해 줄걸.

왜 그동안 잘 참아왔던 서운함을 드러냈는지.

냉정하게 보였을 자신의 행동을 또다시 후회했다.

지훈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하준의 손을 이불 속에 조심히 넣어주고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뒤를 돌자 팔짱을 낀 채로 아주 궁금하다는 눈빛을 내보이는 수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말해주세요. 하준 씨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족 간에 오해가 좀 있었어. 지금은 큰아버지한테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줄게. 아마 그전에 하준이가 얘기해줄 수도 있겠지만.”

“…….”

수아는 알려 달라 한 번 더 졸라보려 했지만, 지훈의 어두운 낯빛에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입술만 삐죽였다.


“아 참. 그리고 부탁이 있어.”

설명은 해주지도 않으면서 대뜸 부탁을 하겠다니. 그의 말이 얄밉게 들려와 수아는 살짝 눈을 흘겼다.


“뭔데요?”

“하준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냥 다 이해한다고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줘.”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수아는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지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만 이야기해줘. 미안하지만 하준이 좀 부탁하자. 혹시 상태가 너무 안 좋다 싶으면 내일 출근은 못 하게 해주고, 너도 병가처리 해줄 테니까 하준이 옆에 좀 있어 줘.”

“알겠어요. 일단 상황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그렇게 지훈은 궁금증만 한가득 남겨놓은 채로 하준의 집을 떠났다.

도대체 이번엔 무슨 일인 걸까.

평범하지 않은 남자와의 연애. 참 바람 잘 날이 없네.

남겨진 수아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



“큰아버지 저 왔어요.”

소파에 앉아 있던 가족들의 시선이 동시에 지훈을 향했다.


“그래. 하준이 상태는 어때?”

오피스텔에서 출발하기 전 하준을 찾았다는 간단한 연락만 받았기에 현성은 자세한 설명을 재촉했다.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지훈이 소파로 다가와 앉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차라리 여기로 데리고 오지 그랬어.”

“잠든 거 보고 오는 길이에요. 그리고 하준이 옆에는 있어 줄 사람이 따로 있어요.”

“응? 옆에 있어 줄 사람이 따로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준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지훈의 말에 가족들의 눈이 터질 듯 크게 벌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연애는 고사하고, 여자와 시선 한번을 제대로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그게 누군데? 뭐 하는 사람인데?”

“그건 나중에 하준이한테 들으시고요. 일단은 하준이를 혼자 두고 온 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말을 마친 지훈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응? 다른 문제가 또 있어?”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말이 망설여졌다.


“하준이는…….”

지훈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우리가 자기를 친아버지처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성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버려? 누가? 누구를?”

“아무래도 저희가 거실을 비운 게 충격이 컸나 봐요. 그래서 어릴 적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오른 것 같아요.”

지훈의 말에 현성의 눈이 크게 열리며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나는 그저, 그저…….”

현성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의도치 않았던 행동으로 하준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준이를 좀 만나봐야겠다.”

현성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을 향해 몸을 틀었다.


“지금 잠들었다잖아요. 오늘은 쉬게 하고, 내일 진정 좀 되면 그때 차근히 이야기하는 거로 해요.”

혜선이 현성의 걸음을 붙잡았다.


“그래요. 오늘은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성은 혜선과 지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그들의 거실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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