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내 것이 아닌 것
(43/105)
43. 내 것이 아닌 것
(43/105)
43. 내 것이 아닌 것
2022.08.27.
거실 소파에 앉은 수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alt="">
[나……. 또 버려졌나 봐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자꾸만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가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한 걸음을 내디뎌버릴 사람처럼.
그의 눈빛.
달빛에 비쳐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눈에 가득 담겨 있던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버려졌다는 것은 지금의 부모님을 뜻하는 걸까?
엉킬 대로 엉킨 상념들이 머릿속에 들어앉은 탓에 두통이 찾아오는 듯했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수아의 입술을 비집고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몇 번인가 한숨을 내쉬던 수아는 문득 하준이 잘 자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직 자고 있을 거라던 수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언제 일어난 건지 하준은 침대 헤드 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방으로 들어선 수아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alt="">
“몸은 좀 어때요?”
alt="">
“미안……합니다.”
alt="">
“…….”
일어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아는 말없이 천천히 침대맡으로 다가갔고, 하준의 시선이 수아의 걸음을 좇았다.
그냥 옆에 걸터앉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불 끝자락을 거둬내고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오더라.
당황한 하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아는 몇 번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풉.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하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alt="">
“왜 웃어요? 저 웃겼어요?”
이 남자 어떻게 웃게 해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너무 쉽게 웃어 보이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alt="">
“아니요.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게 꼭 다람쥐 같아서요. 귀여운 다람쥐.”
그래. 다람쥐면 어떻고 햄스터면 어떠랴. 이렇게 당신이 웃는 게 중요한 거지.
수아도 하준을 따라 빙긋 웃는데, 그의 입에 걸렸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아는 하준의 왼손을 붙잡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끼우기 시작했다.
alt="">
“하준 씨. 혹시 그거 알아요?”
수아가 말끝을 늘이며 고개를 들었다.
alt="">
“제 어깨 아무한테나 빌려주지 않는다는 거.”
alt="">
“그럼요. 알죠. 엄청 비싼 어깨잖아요.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아파야 한번 빌려 쓸 수 있을까 말까 한 어깨.”
하준이 부회장임을 들켰던 그 날.
고열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자신에게 어깨를 빌려주던 수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alt="">
“기억하고 있네요? 그래서 더는 어깨를 빌려줘야 하는 일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 또다시 내 어깨가 필요한 것 같아.
수아가 끝맺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alt="">
“…….”
수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챈 하준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을 스치는 수아의 향기에 하준은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alt="">
한참 동안을 말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수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alt="">
“아까 하준 씨가 했던 말이요. 버림……받았다는 말.”
조용히 귓가를 맴도는 수아의 목소리에 감겨 있던 하준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alt="">
“본가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수아의 물음에 하준은 상체를 바로 세우고는 시선을 맞춰왔다.
괜히 물어봤나? 말해줄 때까지 그냥 기다릴걸.
아직도 슬픔이 고여 있는 듯 보이는 그의 눈빛에 수아의 눈썹은 힘없이 축 처졌다.
alt="">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하준은 무거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alt="">
“어려운 문제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한다니.
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alt="">
“분명 제 능력으로는 풀지 못할 거란 걸 아는데도, 어떻게 해서라도 꼭 풀고 싶은 그런 문제요.”
alt="">
“하준 씨 능력으로도 못 푸는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 문제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말도 안 된다며 수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alt="">
“사실은 회장님께서 저한테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현성의 표정이 떠올랐는지 하준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아.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게 그거였구나?
alt="">
“그럼 우리 둘이 같이 풀어보는 건 어때요? 하나보단 둘이 더 낫지 않겠어요?”
수아가 해맑게 웃었다. 그게 무엇이든 당장이라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듯이.
alt="">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 봐요. 하나씩 되짚어보면서 생각하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래. 당신에게 숨길 게 무엇이겠나. 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alt="">
“사실 저는 회장님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alt="">
“…….”
말끝에 수아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지금 엄청 놀랄 만한 말을 하지 않았나?
오히려 당황한 쪽은 말을 꺼낸 하준이었다.
alt="">
“……수아 씨 혹시 알고 있었어요?”
맞다. 내가 알고 있는 거 하준 씨는 모르고 있을 텐데.
수아는 아차 싶은 생각에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alt="">
“사실은 팀장님한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어요.”
alt="">
“지훈이한테요?”
alt="">
“네. 전에 하준 씨 많이 아팠던 날 팀장님이 알려주시더라고요. 부회장인 걸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하시면서…….”
그랬구나.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 줬구나.
생각과 함께 하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alt="">
“오늘 미국에서 동생이 들어왔어요.”
alt="">
“동생이요? 하준 씨한테 동생이 있었어요?”
alt="">
“회장님의 아들이니까 제 진짜 동생은 아니죠.”
아. 회장님의 친아들.
싸해진 분위기에 수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alt="">
“그래서 오늘 다 같이 모여서 저녁 식사한 거예요?”
alt="">
“네. 7살 때부터 지금까지 학교 방학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살았는데, 이번에 한국으로 완전히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alt="">
“완전히 들어온 거면 부모님께서 엄청 좋아하셨겠네요.”
alt="">
“네. 무척 좋아하셨고, 행복해하셨습니다.”
하준은 행복해하던 현성과 혜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거뒀다.
alt="">
“그런데 동생이 현성 그룹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alt="">
“현성 그룹에서요?”
alt="">
“네. 아버지 회사니까 당연히 현성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alt="">
“하긴. 그렇겠네요.”
alt="">
“네. 그래서 회장님께는 제 업무 인수인계만 빨리 마치면 바로 근무가 가능하다고…….”
alt="">
“아니. 잠깐. 인수인계요?”
수아가 눈을 키우며 하준의 말을 가로챘다.
alt="">
“네. 인수인계요. 혹시 제 단어 선택이 잘못된 겁니까? 회장님께서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것 같긴 한데.”
순간 수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alt="">
“저는 그 문제 벌써 푼 것 같은데요?”
수아의 말에 하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alt="">
“네? 벌써 풀었다고요?”
눈썹을 들썩이며 얼굴을 들이밀던 하준이 멈칫했다.
alt="">
“수아 씨도 말 안 해줄 거죠? 지훈이처럼 그런 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거라고 말할 생각인 거죠?”
들썩이던 눈썹이 한순간에 시무룩하게 아래로 처졌다.
alt="">
“지훈 팀장님이 그렇게 말했어요? 혼자 생각하라고?”
수아의 물음에 그때의 지훈이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며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삐죽였다.
alt="">
“지훈 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나빴네. 그런 걸 왜 말을 안 해줬대?”
순간 하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alt="">
“그럼 수아 씨는 말해줄 겁니까?”
alt="">
“그럼요. 우리 애인님 속상해하는 건 싫으니까 바로 알려줘야죠.”
수아는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하준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alt="">
“회장님은 화가 나신 게 아니라 섭섭하신 거예요.”
alt="">
“섭섭하신 거라고요? 저 때문에요?”
섭섭이라는 단어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하준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alt="">
“정확히는 인수인계를 하겠다고 한 하준 씨 때문에요.”
alt="">
“저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던 일을 이어서 진행하려면 인수인계는 당연히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아. 이 남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겉으로는 누구보다 완벽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아직도 미처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alt="">
“혹시 제가 그 자리를 욕심내는 것처럼 보였을까요? 그래서 저한테 실망하신 걸까요?”
말을 잇는 하준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진 상태였다.
alt="">
“저는 정말 욕심낸 적 없습니다. 동생이 돌아오면 바로 업무 파악할 수 있게 서류도 보기 쉽게 정리해놓았어요.”
변명하듯 늘어놓는 하준의 말에 잠깐 당황하던 수아는 문득 지훈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말을 떠올렸다.
alt="">
[그냥 다 이해한다고,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줘.]
아.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아직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회장님 사모님이라 부르고, 동생을 회장님의 친아들이라 칭하는 걸 보면 하준은 아직도 그들 속에 완벽히 녹아들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그라면 당연히 부회장의 자리는 자신이 아닌 회장님의 친아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alt="">
“아니. 회장님은 실망하신 게 아니라 섭섭하신 거라니까요.”
alt="">
“도대체 그 이유가 뭔데요?”
alt="">
“회장님께는 하준 씨가 첫째아들이니까요. 입양한 아들이 아니라 그냥 첫째아들.”
alt="">
“…….”
수아의 말에 당황했는지 하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alt="">
“그런데 오늘 동생이 돌아왔다고 하준 씨가 갑자기 부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셨겠어요?”
alt="">
“…….”
alt="">
“하준 씨가 자신을 친아들을 대신하는 대타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 거니까 당연히 서운하셨겠죠.”
alt="">
“그렇지만 그 자리가 제 자리가 아닌 건 맞잖아요. 그건 당연히 회장님 아들의…….”
alt="">
“하준 씨도 회장님 아들이에요. 그걸 왜 몰라요. 자꾸 동생만 회장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하준 씨가 선을 긋고 있잖아요. ‘나는 당신들과 가족이 아니야’라고요.”
alt="">
“…….”
결국 하준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어려서부터 늘 내 것이 아닌 것에는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릴 적 배가 너무 고파 음식점 앞에 진열된 음식들이 미친 듯이 먹고 싶을 때도, 그것을 먹을 수 없음은 내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것이 아니라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견딜 수 있었다. 아니. 견뎌낼 수 있었다.
그것을 욕심내는 순간 내 삶은 더더욱 비참해진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으니까.
그것 때문이었다. 부회장직은 욕심내지 말아야 하고, 시우가 오면 바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된 이유.
그런데 나의 이 생각이 20년 동안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셨던 분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드릴 줄이야.
하준은 현성이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alt="">
“저도 그 문제 푼 것 같아요.”
하준의 말에 수아가 방긋 웃으며 두 팔로 그를 안았다.
alt="">
“칭찬의 의미로 안아주는 거예요.”
수아는 하준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alt="">
“하준 씨는 언제나 회장님의 아들이고, 팀장님의 소중한 친구예요. 그분들은 절대 하준 씨를 외면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알겠죠?”
alt="">
“네. 그럴게요.”
하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