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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기다려왔던 말
2022.08.30.



 
수아는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따뜻한 아침 햇살에 잠이 깼다.

평소 같았다면 온몸을 이리저리 뻗어가며 스트레칭을 하기 바빴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직도 자신의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하준이 있었으니까.

어제의 소동을 겪은 뒤 혹시나 지난번처럼 열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밤새 하준의 곁을 지켰는데,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없었다.

지난밤. 잠이 들고 30분 정도는 악몽을 꾸는지 미간을 몇 번 찌푸리기는 했지만, 살며시 등을 토닥여주자 금세 안정을 되찾은 듯 잠이 들던 하준이었다.

다행이었다.

한 번 버림받은 기억이 있는 그였기에 똑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키며 최선을 다해 그를 위로했다.

아마도 수아의 최선이 하준에게는 최고의 것이었으리라.

잠든 하준의 얼굴 위로 수아의 시선이 쏟아졌다.

새하얗고 작은 얼굴 속에 꽉 들어찬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로 시선이 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우와. 무슨 남자 속눈썹이 이렇게도 길어? 돈 들여 속눈썹 파마하는 나보다 훨씬 낫네.

수아는 저도 모르게 하준의 속눈썹을 향해 손을 뻗었고, 이내 손가락 끝에 그의 속눈썹이 닿았다.


“음…….”

손길을 느꼈는지,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던 하준의 눈꺼풀이 가늘게 밀려 올라갔다.


“우와. 수아 씨다.”

하준은 이제 갓 잠에서 깬 것을 증명하듯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며 배시시 웃었다.

수아는 흐트러진 하준의 앞머리를 슬며시 매만졌다.


“혹시 내가 깨운 건가? 더 자도 되는데.”

“아닌데. 출근 준비해야 할 시간인 것 같은데요?”

“팀장님이 오늘 하준 씨 출근 못 할 것 같으면 집에서 쉬게 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덩달아 저도 병가로 처리해주신다고 하셨고요.”

“지훈이가요?”

어제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서던 녀석이 웬일이래?

하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예요. 어제 하준 씨 가족분들도 걱정 많이 하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팀장님도 하준 씨 얼굴만 잠깐 보고는 큰아버지 걱정하신다고 바로 본가로 돌아가셨어요.”

아. 회장님…….

떠오른 생각에 입가 가득 걸려 있던 웃음에 금이 갔다.


“그나저나 오늘 출근은 할 수 있겠어요?”

“아픈 곳도 없는데 당연히 해야죠.”

하준이 상체를 세우고는 문제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진짜요? 하준 씨 덕분에 저도 오늘 하루 쉴 수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안 되겠네요.”

“그,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럼 제가 오늘 아프겠습니다.”

당황한 듯 버벅거리는 하준의 모습에 수아의 입술 끝이 들썩거렸다.


“아닙니다. 아픈 곳도 없는데 출근하셔야지요. 저도 출근 준비하러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아가 몸을 틀며 침대 밑으로 다리를 뻗었다.


“어? 저 지금 아픈 것 같은데요? 아니. 저 아픕니다. 아픈 게 확실합니다. 이대로는 출근을 못 할 것 같은데요?”

하준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수아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는 게 보였다.


“수아 씨?”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는데,


“장난이에요. 장난. 하준 씨 상태 보고 괜찮으면 바로 출근하려고 했었어요.”

몸을 돌린 수아는 크큭 대며 웃기 바빴다.


“수아 씨 하루 쉬고 싶으면 정말 그래도 됩니다. 오늘 하루 같이 쉴까요?”

장난이라는 데도 이 남자 너무 진지하게 물어온다.

그래. 하준의 습관성 진지 증후군을 망각한 내 잘못이지.


“아니요. 진짜 장난이었다니까요. 저 출근하는 거 좋아요. 물론 하준 씨랑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좋다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빠지고 싶을 정도는 아니에요.”

수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 출근합시다. 출근.”

수아는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났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출근 준비를 마친 수아가 넥타이 하나를 손에 들고는 드레스 룸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돈하고 있는 하준을 향해 다가갔다.


“제가 넥타이 매줄게요.”

하준이 허리를 숙이며 키를 낮추자 수아는 그의 셔츠 깃에 넥타이를 두르고는 천천히 매듭을 만들었다.


“본가에 다시 가봐야죠.”

수아는 넥타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가서 가족들이랑 이야기하면서 오해를 풀어야죠.”

“네. 그, 그래야죠…….”

혹시 가기 싫은 건가?

평소에는 뭐든 똑 부러지게 대답하던 사람이 말을 얼버무리는 걸 보니 혹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인가 싶었다.

수아는 시선을 들어 올려 하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혹시 본가에 가고 싶지 않아요?”

어제의 상처가 너무 컸던 걸까.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단지…….”

“단지?”

“사실 간다고 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풀리지 않으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하준 씨 부모님이시잖아요.”

수아가 작은 손으로 하준의 볼을 감쌌다.


“남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나쁜 놈일지라도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 게 바로 부모님이라는 존재라고요.”

수아의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하물며 하준 씨 같이 이렇게 멋지고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부모님이 실망 같은 걸 하실 리가 없잖아요.”

수아는 어느새 완성된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하준은 말과 동시에 수아를 와락 껴안았고, 품속에 안긴 수아도 하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뭐가 고마운데요? 문제 같이 풀어준 거요?”

“아니요.”

“그럼요? 그럼 뭐가 고마운데요?”

잠깐 망설이던 하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뿐이던 민하준 인생에 이렇게 찾아와준 거요.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이렇게 밝게 빛나고 있어 줘서요.”

서로 안고 있는 탓일까. 부드러운 하준의 목소리가 고막 안으로 곧장 스며들었다.


“수아 씨가 없었다면 저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옥상에서 하염없이 고민만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부끄러웠는지 하준이 얼굴을 붉혔고, 동시에 수아의 볼도 발그레 물들었다.

바라던 말이긴 했지만, 막상 이토록 달콤한 목소리로 고백을 해오니 심장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 고마움에 보답하는 방법은 본가에 가서 일을 해결하고 오는 거라는 거 알죠?”

자신의 품에 안겨서도 자꾸만 대답을 재촉하는 수아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시 발동 걸렸네. 이수아 오지랖.

수아의 오지랖이 발동된 이상 하준은 대충 얼버무리는 것으로는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대답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사실 본가에 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혹시나 어제와 같은 상황이 다시 만들어지지는 않을까. 그러다 또다시 실망감을 안겨드리지는 않을까.

말로는 표현 못 할 많은 두려움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네. 가겠습니다. 대신 이따 퇴근하고 다녀올게요.”

그래. 일단은 시간을 벌자. 그사이에 해야 할 말과 풀어야 할 오해들에 대해 정리해보자. 하준은 생각했다.


“왜요? 마음먹은 김에 지금 바로 다녀오지.”

“이따 퇴근하고 꼭 갈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확인할 거예요. 도망가지 말고 꼭 가는 거예요.”

수아는 뭐가 그리 못 미더운지 회사 근처에서 내리는 순간까지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

하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하준은 혹시나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하루 종일 외부일정을 잡았었다.

백화점, 의류매장, 심지어 협력업체까지.

그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6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없는 일도 만들어 야근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 몇 분 전부터 휴대폰을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수아의 메시지 때문에.


[본가 가는 거. 잊지 않았죠?]

[도망갈 준비 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야근할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제 머릿속에 들어오기라도 했는지 보내오는 메시지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했다.

결국 하준은 메시지에 이끌린 듯 어느새 현성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막상 오긴 했는데 걸음이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준은 어제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인데도 하준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청력이 어찌나 밝으신지 하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방에 있던 가사도우미는 주방을 나서며 아는 체를 해왔다.


“아이고. 몸은 좀 괜찮아요?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쓴웃음을 짓던 하준의 시선이 거실 소파로 향했다.


“회장님이랑 사모님 뵈러 온 거죠?”

“네? 네…….”

하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사도우미는 빠르게 몸을 돌려 현성의 방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사모님. 하준 도련님이 오셨는데요.”

“누가 왔다고요?”

문이 벌컥 열리며 현성이 뛰쳐나왔다.


“하준아!”

현성은 현관 앞에 서 있는 하준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저 왔습니다…….”

“그래. 그래. 어서 와라. 어서 와.”

현성이 하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연신 토닥였다.


“회장님. 사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어. 그래. 그래. 지금 시간 괜찮아. 앉아서 얘기하자.”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하준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하준의 경직된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준아. 어제는 아빠가…….”

“회장님. 죄송합니다.”

정적을 가르며 현성이 먼저 말을 꺼내는데, 하준이 재빨리 현성의 말허리를 잘랐다.


“네가 뭐가 죄송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낸 것 같아서 아빠가 미안하지.”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다. 무의식적으로 뱉어내던 사과가 아님은 확실했다.

현성이 놀란 얼굴로 하준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실 그동안 저는 제가 미국에 있는 시우를 대신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준은 그동안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자기 생각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연히 현성의 부회장 자리는 시우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아.”

현성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시우를 보자마자 이제는 부회장 자리를 넘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준은 차마 현성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저의 그런 생각이 회장님과 사모님께 너무 큰 상처를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지, 지금 뭐라고.”

이어진 하준의 말에 현성과 혜선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버려진 저를 20년 동안 한결같이 첫째아들로 키워주셨는데,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괜한 고집을 부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20년을 기다려왔던 말이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던 말들을 드디어 하준의 목소리를 통해 듣게 되나니.

지금의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현성과 혜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허락해주신다면 이제부터는 회장님과 사모님의 첫째아들로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긴 시간을 망설였을까.

두 사람은 하준의 성격을 알기에 이 말을 꺼내기까지 아들이 겪었을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을 마친 하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기 시작할 때쯤 기다렸다는 듯 현성이 입을 열었다.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는 이미 20년 전부터 우리 집 첫째아들이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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