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기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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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기대하시죠.
2022.09.03.
‘으. 무거워.’
아침 햇살에 몸을 일으키려던 하준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고개만 겨우 들어 무게의 원인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하준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가느다랗게 뜬 눈꺼풀 사이로 자신의 몸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의 팔과 다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이 언제 또…….”
하준은 빠르게 어제의 기억을 훑었다.
어제 현성과 혜선에게 그동안의 잘못을 고백한 뒤 집을 나서려던 순간. 언제부터 엿듣고 있었던 건지 2층에 숨어있던 지훈과 시우에게 걸음을 붙잡혔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시우도 함께 있으니 집에서 자고 가라는 혜선의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이 사달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분명 어제 각자의 방에서 잔 것 같은데, 이것들이 언제 제 침대 위로 쳐들어왔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아. 그나저나 이것들을 어떻게 치운다.
“야! 그만 일어나!”
하준은 지훈과 시우에게 묶여 있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빼내려 거칠게 움직였다.
“음……. 좀만 더 자자.”
날카로운 하준의 음성을 듣고서도 두 사람은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 눈을 뜨기는커녕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침대 아래로 확 밀어버릴까.
한껏 짙어진 미간의 주름으로 진지하게 발로 차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1층에서 혜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준아. 시우야. 지훈아. 아침 먹게 그만 내려와.”
“네. 지금 내려가요.”
“깨어 있었던 거였어?”
혜선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지훈과 시우를 바라보는 하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아니. 민하준 자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차마 깨울 수가 없었지 뭐야.”
“그러게. 우리 형 잘 때는 천사가 따로 없던데?”
이참에 하준을 놀려먹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지.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로 한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있는 것이 제대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장난 그만해라. 하나도 재미없다.”
하준이 파르르 열을 올리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더 신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인 건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방문을 나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하준은 그제야 피식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
현성과 혜선, 하준, 시우, 지훈.
식탁에 마주 앉은 다섯 사람의 모습은 이틀 전의 모습과 같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준이 부모님에게 마음을 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준아. 이것 좀 더 먹어봐.”
혜선은 하준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하나씩 앞으로 밀어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쑥스러워 입에 넣지도 못했을 것이었지만, 어제의 결심이 확고했던 건지 하준은 망설이던 손을 뻗어 눈앞의 반찬을 입에 넣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하준이 많이 먹어.”
“하준이 형 이것도 먹어.”
지훈과 시우가 반찬 하나씩을 집어 들고는 하준의 밥 위에 올려놓으며 피식피식 웃었다.
또 시작이네.
숨겨지지 않는 분노가 하준의 눈가에 맺혔지만, 현성과 혜선의 눈치를 보며 애써 내리눌렀다.
그렇게 여느 가족과 같은 화목한 분위기로 식사를 이어가던 그때. 기회를 살피던 시우가 입을 열었다.
“자! 자! 지난번 하준이 형 때문에 나의 입사 문제가 흐지부지되었던 거 다들 기억하시죠?”
“그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현성의 물음에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마케팅팀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미국에서 공부한 것도 그 분야이기도 하고, 지훈이 형도 마케팅부에 있으니까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케팅팀이라면 수아 씨가 있는 곳인데.
하준은 많고 많은 부서 중에서 왜 하필 마케팅팀인 건지.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 참! 그리고 모두에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
“제가 회장님의 아들이고 하준 형의 동생인 건 우리 가족들끼리만 아는 거로 해주세요. 저는 그저 일반 직원으로서 조용히 근무해보고 싶어요. 부담스러운 거는 싫어요.”
시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현성의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
현성의 시선을 알아챈 하준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오늘 중으로 마케팅팀으로 인사발령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출근은 다음 주부터 하는 거로 하고, 시우 너는 비밀이긴 하지만 하준이랑 지훈이한테 피해 가지 않도록 열심히 근무하도록 해.”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현성의 당부에 당연하다는 듯 시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간이 흘러 아침 식사를 마친 하준과 지훈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현성의 집에는 아직도 하준이 사용했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출근 준비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준비를 거의 끝마칠 때쯤 지훈이 하준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야. 수아한테는 시우에 대해서 말할 거야? 시우한테는?”
“아니.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알아봤자 수아 씨만 부담스러워질 테고, 같은 팀원으로 지내기 껄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하긴. 네 동생인 거 알면 불편할 수도 있지.”
“지금 바로는 좀 그렇고, 조만간 상황 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그게 좋겠다.”
대화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찾아온 시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형. 나 진짜 다음 주부터 출근할 수 있는 거지?”
시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을 물으며 확인하자 하준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행된 인사발령이라 아마도 해외근무 특기 사원으로 진행될 수도 있어.”
“응. 괜찮아. 고마워 형. 아니지, 이제는 부회장님이랑 팀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 하핫.”
시우는 회사생활을 한다는 것에 신이 났는지 인사를 건네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저렇게 좋을까. 하긴. 20년 동안 재발할까 봐 밖에 잘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병원이랑 학교만 다녔으니 좋을 만도 하겠지.”
지훈이 시우의 방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준과 지훈은 1층으로 내려왔다.
“저희 이제 가볼게요.”
마중을 위해 미리 나와 있던 혜선과 현성에게 지훈이 인사를 건넸다.
뒤에 서 있던 하준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래. 둘 다 차 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들 말고.”
혜선의 말에 대답하면서 하준은 평범한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며 출근길에 나섰다.
“저 다녀올게요.”
하준과 지훈이 출근한 뒤 외출준비를 마친 시우가 현관문 앞에 섰다.
“차 한 대 사준다니까 왜 굳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려고 해? 그게 얼마나 고생인데.”
현성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하겠다는 시우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힘들다는 생각 들면 바로 얘기할게요. 그때 사주세요.”
“그래. 그럼 힘들다 싶으면 바로 얘기하는 거다. 솔직히 아빠는 네가 회사에 다닌다는 것도 조금 불안해. 피곤하거나 힘들다 보면 또 재발할 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조절할게요.”
아빠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기에 시우는 서둘러 현성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 알겠다. 조심해서 다녀와.”
“네. 다녀올게요.”
시우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집을 나섰다.
출퇴근길을 익히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길이다 보니 몇 번을 헤맨 끝에야 겨우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아타는 구간과 걸리는 시간까지 확인을 마친 시우는 커피나 한잔할까 하는 마음으로 회사 앞 카페로 들어섰다.
주문을 하러 계산대로 다가가자 계산대에 서 있던 직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블랙 재킷 속에 보이는 화이트셔츠와 복숭아뼈가 살짝 드러나는 슬랙스 바지. 마무리로 화이트 스니커즈까지.
그야말로 TV에서나 보던 남친룩의 정석이었다.
게다가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눈웃음에 잡티 하나 허용하지 않는 도자기 같은 피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칼에 완벽한 피지컬이 더해진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직원에게 어렵게 주문을 마친 시우는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 받은 커피를 들고 창가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딸랑.
손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카페 안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자 두 명이 들어섰다.
“그럼 오늘부터 출근인 거야?”
“아니. 지금은 사무실 공사 중이래. 공사 끝나는 대로 출근하겠지. 이제 백수 노릇도 못 하게 생겼어. 뭐 마실래?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야기하랴 주문하랴 매우 바빠 보이는 두 여자는 주문을 마친 후 시우의 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현성 그룹 브랜드 론칭 협업이라니. 진짜 대단하다.”
현성 그룹?
별 관심 없던 그녀들의 대화에서 현성 그룹의 이름이 나오자 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현성 그룹이 어려서부터 우리 집안이랑 엄청 친했잖아. 내가 들어가겠다고 하면 바로 들어오라고 하지.”
“오. 김지수 좋겠다. 현성 그룹 브랜드 론칭하는 거 유명하잖아. 하는 족족 대박 터트리고.”
“그래서 이번에 같이 작업하면서 뽑아먹을 거 있으면 싹 다 뽑아먹고, 가져올 수 있는 건 죄다 가져오려고.”
너무도 선명히 들려오는 대화 내용에 시우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카페를 나섰다.
“TF팀 김지수. 우리 가족들이랑 친했다고?”
시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마음에 걸려 다음 주에 출근하는 대로 TF팀 구성 명단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현성 그룹 본사 로비.
오전 일정을 마친 뒤 회사에 들어선 하준의 눈에 여러 장비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모습이 들어왔다.
오늘 무슨 작업을 한다고 했던가?
“오늘부터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 TF팀 사무실 공사 들어갑니다.”
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박 비서가 서둘러 말을 꺼냈다.
“아. 그게 오늘이었군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하준이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 오른 박 비서가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25층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사람이라곤 자신과 부회장 하준뿐인데, 그렇다는 건…….
박 비서가 고개를 돌려 하준을 바라봤다.
“공사 진행 상황 좀 보고 가죠.”
담담한 하준과는 다르게 박 비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공사가 마무리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시작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상황을 보겠다는 거지?
게다가 공사 진행 상황을 보러 가겠다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좋을 건 또 뭐람.
박 비서는 미간을 좁히며 앞문에 비친 하준의 표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입술을 말아 문 채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고 있는 하준의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