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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너는 안 돼 (46/105)


46. 너는 안 돼
2022.09.06.


탕비실에서는 수아를 포함한 마케팅팀 직원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거 봤어? 우리 옆에 비어 있던 공간에 새로운 팀이 들어온다던데?”

“새로운 팀이라니? 무슨 팀인데?”

“브랜드 론칭 TF팀이라고 하던데?”

“아. 25층 우리만 써서 좋았는데. 좀 불편해지겠네.”

아무래도 한 층을 나누어 쓰다 보면 불편함이 생기기 마련인지라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지 몇몇 직원들은 썩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거 이번 TF팀 관련 사항입니까?”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탕비실 안 직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부, 부회장님.”

불평하던 직원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앉은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


“부회장님. 저, 저는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고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직원은 말을 더듬거리며 식은땀을 쏟아내기 바빴다.

평소의 그라면 회사의 지침에 대해 불만이 있는 거냐고 매서운 눈빛으로 다그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음. 확실히 그 부분은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군요.”

……응?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예상치 못한 하준의 발언에 탕비실 안에 있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눈을 키웠다.


“아닙니다. 불편하기는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직원들은 격하게 손을 내저으며 하준의 말을 부인했다.


“아니긴요. 당연히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이죠.”

괜찮다는 데도 자꾸 불편할 거란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직원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TF팀 사무실은 최대한 마케팅팀과 분리될 수 있도록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불편사항이 생기겠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철수할 팀이니 그동안만 양해 부탁합니다.”

직원들은 그저 눈만 끔뻑끔뻑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아. 이제 업무시간이네요. 저는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한 직원의 말에 나머지 직원들도 격하게 긍정하며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순식간에 썰물처럼 직원들이 빠져나가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수아도 탕비실을 나가려는 찰나,


“계획대로 되고 있어요.”

하준이 상체를 기울이며 수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계획이요?”

수아가 고개를 획 돌리며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해 입 모양으로 물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하준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무슨 계획이라는 건지. 말도 안 해주고.

수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자리로 돌아왔다.

오전에 마치지 못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홍보팀 직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홍보팀 직원은 민준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김 대리 불쌍해서 어쩌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 주부터 TF팀 여기 옆에서 근무 시작한다며.”

“그래서? 그게 뭐?”

“부회장님이랑 한 층에서 같이 있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여유로워?”

“부회장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민준의 눈이 터질 듯 크게 벌어졌다.


“몰랐어? 브랜드 론칭 TF팀 명단에 부회장님 이름 적혀 있잖아.”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그럼 그렇지. 네가 몰랐으니까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거지.”

홍보팀 직원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민준의 어깨 위로 다시 손을 올렸다.


“어떻게. 오늘 퇴근하고 형님이 위로주 한잔 사줘?”

“……한잔 가지고 되겠냐?”

젠장. 하루 종일 눈치 보면서 일하게 생겼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민준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홍보팀 직원이 사무실을 나서자 민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아무리 상사라지만 저 정도로 싫어한다고?

수아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다른 남자 직원들의 표정도 민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분간은 빡세게 일만 하게 생겼네.”

“그러게. 부회장님 눈치 보여서 커피 한 잔이나 제대로 마실 수 있을런지…….”

근무 중 언제라도 1층 카페를 이용하거나 산책을 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왜 눈치가 보인다는 거지?


“혹시 부회장님께서 막 눈치 주고 그러세요?”

수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뇨. 눈치를 주신다기보다는 눈치를 보게 만드시죠.”

“눈치를 보게 만드신다고요?”

“어찌나 쉬지 않고 일을 하시는지 부회장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치가 보이거든요.”

아. 한 번도 그가 일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 알 턱이 있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 너무 멋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다는 거.”

“맞아요. 어떨 때는 결재판 속의 종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곧이어 여직원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 나도 빨리 보고 싶다. 하준 씨 일하는 모습.

작게 중얼거리던 그때. 과거의 기억 하나가 수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설마…….

수아는 미간을 좁히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여느 날처럼 하준의 차를 타고 출근하던 길.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거 힘들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혹시나 팀원들이 힘들게 하는 건 없는지 궁금해서요.”

“어머. 힘들긴요. 다들 너무 잘해주시는데요?”

“그래요? 그럼 다행…….”

“아무래도 제가 팀 복이 좀 있나 봐요.”

수아가 들뜬 표정으로 하준의 말을 잽싸게 가로챘다.


“저희 팀 직원들 모두 다 너무 멋지거든요.”

수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팀장님 진짜 너무 멋진 것 같아요.”

우리 팀장님……?

팀장이라면 지훈이를 말하는 것일 텐데. 언제부터 지훈이가 당신에게 우리가 되었을까.

심기가 불편해진 듯 하준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겼지만, 운전을 하느라 정면을 향하고 있던 탓에 수아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의를 하는데 직원들 의견을 빠짐없이 다 들어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방법에 대해서 조언도 해주시고요.”

친척에게까지 질투하는 속 좁은 남자로 보이기는 싫은데.


“지훈이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 이제야 알았네요.”

말하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요. 편의점에서는 매일 놀러만 다니시더니 이런 능력을 감추고 계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제 끝났나 싶어 수아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그리고 김 대리님은 또 어떻게요.”

듣고 싶지 않은 이름 1순위. 김민준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 처리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지. 팀장님 말을 한 번에 알아듣고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서 제출하시는데, 어머. 그게 또 그렇게 멋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이 나오려던 순간 하준은 재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다른 사람 칭찬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네?”

나는 물어본 말에 대답한 것뿐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수아가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제 책상 위치를 바꿔야겠습니다.”

“갑자기 책상은 왜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제 책상이 수아 씨 시야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마주친 하준의 눈빛은 꽤나 진지했다.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하는 소리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하준의 큰 그림에 수아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

TF팀 사무실 공사는 생각보다 요란했다.

원래 비어 있던 공간이라 책상들이나 몇 개 들어오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공간을 나누는 일은 적지 않은 소음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아으. 오늘 안에 다 끝나기는 하는 거야?”

“그러게. 생각보다 소리가 너무 크네.”

일하던 직원들은 슬쩍슬쩍 공사 현장을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개중에 몇 명은 이어폰이나 귀마개를 꺼내 귀를 틀어막거나 비어 있는 회의실로 자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직원들이 나름의 방법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그때.

자리를 비웠던 지훈이 사무실로 돌아오더니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지훈은 인부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내 인부들은 들고 있던 연장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한 지훈은 다시 걸음을 옮겨 마케팅팀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 다들 하던 업무들 잠깐 멈추고 여기 집중.”

지훈의 목소리가 소음이 사라진 자리를 채웠고, 직원들은 하나둘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재단이 끝난 자재들을 조립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공사를 그대로 진행시킨 건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직원들이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긍정했다.


“공사의 소음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 업무 진행에 어려움이 있을 줄로 압니다.”

“…….”

“그래서 최대한 공사를 빠르게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데, 그러려면 사무실을 비워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부회장님의 의견이 있으셨습니다.”

사무실을 비우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말인가?

물음표가 가득한 직원들의 눈빛에 지훈은 곧장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과의 회의를 거쳐 오늘 마케팅팀은 조기 퇴근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조기 퇴근이라고?

사무실 전체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공사는 오늘 중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니 내일은 정상적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여전히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지 직원들은 자리를 정리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팀장님. 저희 진짜 가도 되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오늘 중으로 제출하기로 한 건은 어떻게 하나요?”

의심으로 가득 찬 직원들이 쏟아내는 질문에 지훈은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네. 조기 퇴근은 부회장님의 전달사항이니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출하기로 한 서류도 내일까지 기간을 연장해 주셨으니까 모두 걱정하지 말고 퇴근하면 됩니다.”

그때였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원들은 작업하던 문서들을 서둘러 저장하고 컴퓨터를 종료한 뒤 가방을 챙겨 들었다.

조금 전까지 걸음을 망설이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던 지훈은 인부들을 향해 다시 공사를 해도 좋다는 말을 전했다.

이게 웬 횡재냐.

수아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너는 어디 가려고?”

“저요? 퇴근인데 당연히 집에 가야죠.”

당연한 걸 뭘 묻느냐며 수아가 눈썹을 들썩였다.


“집에 간다고?”

“네.”

“안 돼. 너는 안 돼.”

“네? 안 된다고요?”

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응. 안 돼. 너는 집이 아니라 부회장실로 가야 해.”

부회장실? 갑자기 부회장실은 왜…….

수아가 눈을 키웠다.


“실은 하준이한테 사무실이 너무 시끄러워서 네가 힘들어한다고 말했거든.”

“저요? 제가 힘들어하고 있다고요?”

뭐 조금 시끄럽기는 했지만 힘들어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응. 조기 퇴근을 시켜주면 너랑 더 오래 데이트할 수 있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했더니 바로 오케이 하더라고.”

“…….”

“그러니까 네가 총대 메고 하준이랑 시간 좀 보내줘라. 네 덕에 나도 오늘은 퇴근 좀 빨리해보자.”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훈은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아. 진짜 뭐야. 무슨 팀장이 일개 사원을 앞세워서 조기 퇴근을 받아내느냐고.”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내심 하준과의 데이트가 기대되는지 수아의 입가에는 금세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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