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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권력 남용 (47/105)


47. 권력 남용
2022.09.10.


수아는 부회장실 앞 코너에 몸을 숨긴 채 슬쩍슬쩍 박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박 비서님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이를 어쩐다. 난감한 표정으로 망설이던 수아는 이러다가 다른 직원이라도 오면 더 큰 일이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수아의 등장에 박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부, 부회장님께서 부르셔서 왔는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부회장실로 들어가는 박 비서를 바라보며 수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들어가 보십시오.”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회장실로 들어섰다.

여전히 자신을 향한 박 비서의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던 그때.

휘익. 갑작스러운 힘에 이끌려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벽에 등이 닿았다.


“제가 수아 씨를 부른 적이 있던가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았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시니까 둘러대느라 그런 거죠.”

“그런 의미로 박 비서님께는 말하는 게 어때요?”

“뭐, 뭘요?”

“수아 씨와 저의 관계 말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거짓말하지 않고도 들어올 수 있잖아요.”

나는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어. 하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뇨. 그건 안 돼요”

수아가 단호하게 말하며 하준과의 거리를 넓혔다.


“왜요? 박 비서님은 알고 계셔야 수아 씨를 막지 않고 들여보내 줄 텐데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제가 부회장실을 오지 않는 게 낫겠어요.”

“그건 제가 안 됩니다.”

용납할 수 없다며 하준이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얼굴 보기 힘든 사람, 이렇게 가끔 찾아와주는 것도 안 해주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준의 눈썹이 들썩였다.


“아 참. 생각해보니 당분간은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이제 매일 볼 수 있으니까요.”

“매일이요?”

“저도 다음 주부터는 TF팀 사무실로 출근할 테니까요.”

……아. 맞다. 그랬지.


“혹시 일부러 25층에 TF팀 사무실 만든 거예요?”

의심 가득한 수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운명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네요.”

“거짓말. 아까는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했잖아요.”

“제가 그랬나요? 그렇다면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준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능글맞아진 건지.

수아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다 이내 빙긋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저는 조기 퇴근이라 집에 가려고 하는데 하준 씨는 아직 일 안 끝났죠?”

“지훈이한테 얘기 못 들었습니까?”

“무슨 얘기요?”

“조기 퇴근의 조건이 수아 씨와의 데이트라는 거요.”

“저와는 전혀 협의된 적이 없는 사항인데요?”

수아는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흐음. 그렇군요.”

하준은 말끝을 흐리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럼 조기 퇴근은 없던 일로 하고, 전원 복귀하라고 해야겠습니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하준의 휴대폰 액정을 가렸다.


“이미 퇴근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건 엄연한 권력 남용이라고요!”

“권력 남용이요?”

하준이 입술 끝에 웃음을 담고는 말을 길게 늘였다.


“조기 퇴근 자체가 애초부터 권력 남용 아니었던가요?”

“그, 그거야 공사하는 소리가 너무 크니까…….”

“이 건물 안에 비어 있는 회의실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소음이 문제였다면 그곳으로 이동했어도 될 일이었죠.”

“아! 알았어요. 알았어. 어떻게 말 한마디를 안 져?”

수아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 이렇게 삐지고, 화내고, 투덜거리는 게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하루 종일 옆에 두고 싶다.


“지금 결재하던 것만 마무리 지으면 되는데, 10분만 기다려줘요.”

하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책상으로 다가가 앉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이왕에 기다리는 거, 일하는 모습은 지훈이나 김민준 대리보다 제가 더 멋있다는 걸 발견해주면 더 좋고요.”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던 수아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걸음을 옮겨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하준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왜요?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졌습니까?”

“공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못 물어봤네요.”

“뭘요?”

“어제 본가 갔던 일 말이에요. 잘 해결하고 왔어요?”

하준은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수아 씨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첫째아들로서 노력하겠다는 말씀도 드렸고요.”

아으. 이뻐 죽겠네.

수아는 하준의 볼을 감싸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잘했어요. 너무너무 잘했어요. 대견하고 기특하고, 또 뭐 있지? 또 뭐라고 해야 하지?”

“이거면 충분합니다. 잘했다는 말 하나면 충분해요.”

더 많은 칭찬을 해주겠다며 눈동자를 굴리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아니. 말 하나로는 부족해요. 고생한 하준 씨를 위해서 오늘 데이트 코스는 스페셜 버전으로 찾아놓을 테니까 하준 씨는 하던 일 해요.””

수아는 재빨리 소파로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스페셜 버전이라니. 괜히 기대되잖아. 도대체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폭풍검색에 열을 올리는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준은 피식 웃으며 결재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

현성 그룹 1층에 위치한 카페.

유나는 신제품 디자인에 대한 연이은 회의를 마치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카페를 찾았다.

회의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미간을 좁히며 커피에 입을 가져다 대는데, 주문을 마친 여직원들이 유나의 뒤에 섰다.


“그 얘기 들었어요? 오늘 마케팅팀 조기 퇴근했대요.”

“어머. 왜요?”

“그 층에 프로젝트팀 사무실 들어간다고 공사 시작했잖아요. 그 소리가 꽤나 시끄러웠나 보더라고요. 부회장님이 직접 오더 내리셨다던데요?”

“TF팀이랑 사무실 같이 쓰는 건 안 부러운데, 조기 퇴근은 부럽네요.”

“그러게요. 그건 진짜 부러워요.”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의도치 않게 직원들의 대화를 듣게 된 유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케팅팀이라면 지훈 오빠도 퇴근했다는 거잖아?’

유나는 손에 들려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 어디야?”

[밖이야.]

유나의 이름을 확인한 지훈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밖인 건 이미 알고 있고, 밖 어디냐고.”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지훈의 물음에 유나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어쩔 건데?]

“나 오늘 저녁에 오빠네 집으로 쳐들어갈 거야.”

[뭐? 뭘 해?]

당황했는지 지훈이 말을 더듬거렸다.


“쳐들어가서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버릴 거야. 저녁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 지금 가야겠다. 끊어!”

[야! 야! 김유나!]

다급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나는 모른척하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끊기기가 무섭게 휴대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지훈 오빠♡]

흥. 속 좀 타보라지.

유나는 액정을 바라보기만 할 뿐 전화는 받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지훈의 모습이 연이어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부재중전화 3통이 뜨고서야 유나는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

[야! 김유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훈이 언성을 높였다.


“왜? 나 지금 출발해야 해서 엄청 바쁜데?”

[설마 너 진짜로 갈 건 아니지?]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직접 보여줘야 믿으려나 보네”

[안 돼! 절대 안 돼! 원하는 게 뭐야?]

그러게 진작 제대로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유나는 입매를 들어 올리며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원하는 거? 지금 오빠가 있는 장소.”

잠시 정적이 흐르고 휴대폰 너머에서 지훈의 한숨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편의점.]

“편의점? 오케이. 거기서 딱 기다려라. 도망가면 알지? 그대로 핸들 꺾어서 오빠네 집으로 가버릴 거니까.”

유나는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가 외근핑계를 대고 차에 올랐다.

*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던 수아의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

팀장님이나 김 대리님보다 멋질 거라던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단정한 머리칼과 짙은 눈썹. 눈가에 그늘을 만드는 풍성한 속눈썹과 곧게 뻗은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수아의 시선 끝이 하주의 얼굴선을 따라 흘렀다.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일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수아의 시선을 느낀 하준이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너무 대놓고 쳐다봤나?

정곡을 찔려 가슴이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하준 씨 본 거 아닌데요? 창문 본 거예요. 창문. 뷰가 너무 좋아서.”

“아. 창문이요? 전 또 제가 일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넋을 잃고 본 건가 했네요.”

쳇. 자기 봤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능글맞기는.


“네. 넋을 잃고 보긴 했죠. 창문을요.”

그래.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준은 창문을 강조하는 수아의 목소리가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스페셜한 데이트코스는 완성된 겁니까?”

“그럼요. 아주 완벽한 데이트코스가 준비되어 있지요.”

하준이 마지막 결재판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청 기대되는데요? 그럼 이제 가볼까요?”

“아니. 잠깐. 잠깐 기다려 봐요.”

겉옷을 챙겨 들고 다가오는 하준을 향해 수아가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우리가 같이 나가면 박 비서님이 의심할 거예요.”

“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가 먼저 나가서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준 씨는 10분 뒤에 나와요. 10분 뒤! 알았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먼저 나갈게요. 몇 분 뒤라고요?”

도대체가 사람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하준은 포기했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10분 뒤요.”

수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쏙 빠져나갔다.


“어차피 지금 나가나 10분 뒤에 나가나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하준은 중얼거리면서도 수아의 말을 어길 생각은 없는 듯 소파에 앉아 가만히 시곗바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 10분 뒤.


“10분!”

들뜬 표정으로 재킷을 챙겨 든 하준이 부회장실을 나섰다.


“차량 준비시키겠습니다.”

박 비서가 하준의 재킷을 보고는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아니요. 오늘 오후 일정은 없는 거로 아는데, 맞죠?”

“네. 오늘 일정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럼 박 비서님도 이만 퇴근하시죠.”

“네? 퇴근이요?”

박 비서가 무슨 말이냐며 눈을 키웠다.


“저는 개인적인 일로 일찍 퇴근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아. 그럼 저는 하던 업무를 마무리 짓고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눈치 빠른 박 비서가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네. 그럼 내일 뵙죠.”

짧은 인사를 건넨 하준은 몸을 틀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지하주차장에 들어선 하준의 눈동자가 수아의 모습을 찾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주차된 자신의 자동차 근처에 다다를 때쯤. 어디에선가 수아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작게 들려왔다.


“하준 씨.”

“수아 씨? 어디 있는 겁니까?”

“여기요. 여기. 저 여기 있어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자동차의 뒤쪽이었다.


“거기에서 뭐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걸리면 안 되잖아요.”

필요 이상 열정적으로 몸을 숨기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풉. 그래서 거기에 숨어 있는 겁니까?”

“쉿! 그렇게 크게 얘기하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여기 우리 둘뿐입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게 안심한 순간 들키게 되어 있다고요.”

CCTV로 볼 때는 저런 행동들이 더 의심스러울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한 번 더 피식 웃음을 흘린 하준이 자동차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수아는 신속하게 보조석에 올라탔다.

누가 보면 첩보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네.

신기해하며 수아를 바라보던 하준도 운전석에 올랐다.


“스페셜한 데이트를 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제가 주소 찍을게요.”

수아는 미리 찾아두었던 주소를 확인한 뒤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자. 이제 출발. 우리의 스페셜한 데이트를 위하여!”

수아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하준의 자동차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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