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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말로 하지 않아도 (48/105)


48. 말로 하지 않아도
2022.09.13.



“아으. 진짜. 김유나아아!”

전화를 끊은 지훈은 신경질적인 기색으로 유나의 이름을 부르짖고는 일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을 돌려보냈다.

곧 들이닥칠 김유나의 예정된 행동들 때문이었다.

어찌나 아르바이트생을 붙잡고 늘어지는지.

편의점에 찾아오는 여자가 있는지 물어보지를 않나.

혹시나 찾아오는 여자가 있으면 바로 연락 달라며 명함을 건네지를 않나.

그런 유나의 행동들 때문에 그만둔 아르바이트생만 해도 여러 명이었다.

아마 계속 근무를 했다면 수아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지 않았을까. 다행히 근무하는 동안 수아는 유나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수아가 그만두고 그녀만큼 꼼꼼하고 부지런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유나 때문에 그런 아르바이트생을 놓칠 수는 없었다.


“오빠! 나왔어.”

얼마나 속도를 내면서 온 건지.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나가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아르바이트생은 어디 가고 오빠가 이러고 있어?”

“네가 아르바이트생을 왜 찾아? 할 말 있어서 온 거면 빨리하고 가. 보다시피 엄청 바쁘니까.”

지훈은 진열된 빵의 뒷면을 확인하며 유통기한을 살폈다.


“오늘 마케팅팀 조기 퇴근했다며. 왜 말을 안 했어?”

“매번 얘기하지만, 도대체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말해줬으면 나도 거기에 맞춰서 퇴근했을 거 아니야.”

도대체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거야?


“너 이렇게 땡땡이치는 거 하준이한테 얘기해도 되냐?”

“어. 얘기해도 돼. 그렇다고 해도 하준 오빠가 나를 해고할 수는 없을 테니까.”

유나는 그게 뭐 별거냐며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들어 올렸다.


“김유나. 부모님 믿고 너무 까분다.”

“아닌데? 나는 내 능력 믿고 까부는 건데?”

유나는 턱을 들어 올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같이 유능한 인재를 해고하면 회사의 손해 아니겠어? 설마 하준 오빠가 그 정도도 계산 못 하지는 않을 테고.”

하긴. 그동안 유나가 디자인한 제품들이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

유나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지훈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어려서부터 유나는 항상 그랬다.

언제나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모두 드러내곤 했다.


[오빠가 좋아.]

[짝사랑도 해볼 만하네.]

[나랑 연애할 생각 없어?]

유나의 고백에 자기 나름대로는 거절을 했다고 했는데도 아직도 제자리인 걸 보면 그녀는 지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하아.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얼굴 봤으면 이제 그만 가지? 바쁘다고 했잖아.”

“내가 도와줄게. 나 엄청 한가해.”

유나는 허락 따위는 필요치 않다며 당당하게 계산대 안으로 들어갔다.

저 고집을 누가 꺾을까.

지훈도 유나를 따라 계산대 안으로 들어갔다.


“도와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방해나 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어.”

“응. 아주 얌전히 조각상처럼 앉아 있을게.”

유나는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계산대에 턱을 괸 채로 시선을 보내왔다.

그 모습에 지훈은 고개를 잘게 가로저으며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던 물을 집어 들었다.

왜 유나만 보면 유독 목이 타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훈이 뚜껑을 열고 물을 입에 머금는 순간.


“물 말고 나를 먹을 생각은 없어?”

풉! 뭐, 뭘 먹어?

목구멍을 채 넘어가지 못한 물들이 지훈의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콜록콜록. 뭐? 너 지금 뭐, 뭐라고. 콜록.”

사레가 들린 듯 반복된 기침과 함께 지훈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뭘 그렇게 당황해? 그냥 의견을 묻는 거잖아.”

“너는 무슨 여자애가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아니. 이렇게 ‘나 잡아 드세요’ 하는데도 오빠가 반응이 없으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잖아.”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지훈과는 달리 유나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유나가 말을 하려는데 띵동 소리와 함께 앞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어, 어서 오세요.”

지훈은 서둘러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어? 점장 오빠다. 오빠!”

여고생 두 명이 지훈을 향해 달려오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 그동안 왜 안 나왔어요? 기다렸잖아요.”

오빠? 기다려? 누가 누굴 기다려?

여고생을 바라보는 유나의 미간이 일그러졌고, 이런 반응을 예상한 지훈은 서둘러 유나의 눈치를 살폈다.

왜 하필 지금…….

금방이라도 뭔 일을 낼 듯 보이는 유나의 표정에 지훈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어. 그동안 바빠서 못 왔지. 너희는 잘 지냈어?”

“아니요. 오빠가 없는데 어떻게 잘 지냈겠어요.”

드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또각. 오늘따라 구두 소리는 왜 이리도 날카롭게 들리는 건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구두 소리가 고막을 뚫었다.

어느새 지훈의 옆에 다다른 유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고생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 여고생들. 여기 점장 오빠한테 관심 있나 봐?”

서늘함이 서린 눈동자와는 달리 유나의 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훈은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것은 곧 사고를 칠 거란 전조증상과도 같았으니.


“네. 그런데요? 아줌마는 누구예요?”

아. 이 여고생들아. 눈치는 도대체 어디에 두고 온 거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여고생의 도발에 유나의 인내심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면 내가 누군지 알려나?”

찰나의 순간. 유나가 지훈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빠르게 입술을 덮쳐왔다.


 
시간이 멈춘 듯 지훈과 여고생들의 호흡도 함께 멈췄다.

이윽고 포개졌던 입술이 떨어지고 유나의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갔다.


“내가 누군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겠지? 알았으면 그만 나가주는 게 어때? 하던 일을 마저 할 생각이라.”

유나는 충격에 빠진 여고생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지훈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 짜증나!”

결국 여고생들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편의점을 뛰쳐나갔다.


“김유나! 이게 무슨 짓이야!”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던 지훈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왜 저런 어린 것들한테까지 빈틈을 보이냐고.”

“너 진짜…….”

유나는 계산대에 기대선 지훈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내가 오빠를 기다리겠다고 한 건 오빠의 마음이 준비될 때를 기다리겠다는 거지,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면서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뜻은 아니야. 기억해둬.”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의 말을 날린 유나는 이내 계산대를 벗어났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저녁 알바생 오면 전화해. 저녁 같이 먹자.”

그래도 우리의 첫 입맞춤인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유나의 모습에 지훈은 말문이 막혔다.

싱글거리며 편의점을 나서는 뒷모습은 왠지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전화해. 도망가면 알지?”

끝까지 협박의 말을 잊지 않는 유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지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너랑 나랑은 안 된다고…….”

하. 깊은 한숨과 함께 지훈은 마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



“공방이라…….”

하준은 목적지로 보이는 가게 앞에 서서 간판에 적혀 있는 글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빨리 들어가요.”

가게의 안을 채 살펴보기도 전, 하준은 수아의 손에 이끌려 공방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을 반기는 주인의 뒤로 아기자기한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인용 책상마다 설치된 스탠드와 다양한 도구들.

하준은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수아가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수아 씨. 여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하준의 모습을 발견한 공방 주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친구분이 미리 말씀을 안 하셨나 보네요. 저희 공방은 반지 공방이에요.”

“반지 공방이요?”

주인의 말에 하준이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하준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공방의 이곳저곳을 살폈고, 수아는 그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하준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수아 자신도 예약 완료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망설였으니.

연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반지를 만들자는 자신을 보며 너무 앞서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너무 성급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머릿속을 채우는 상념들로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수아는 결국 예약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비록 비밀연애를 하고는 있지만 아무런 표시도 없이 지내자니 자꾸만 조바심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라도 임자가 따로 있다는 표시를 해놓고 싶었다.

하준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수아의 마음을 그랬다.


“그러니까 여기가 반지를 만드는 곳이라는 겁니까?”

“네. 여자친구분께서 커플링 제작으로 예약을 해주셨습니다.”

하준의 물음에 직원은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커플링이라니.


“아. 죄송하지만 잠시만…….”

하준은 말끝을 흐리며 수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공방을 나섰다.


“미안합니다.”

“네? 뭐가요?”

하준의 느닷없는 사과에 수아의 눈썹이 들썩였다.


“커플링 말입니다.”

“커플링이 왜요?”

“수아 씨가 커플링을 가지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제가 먼저 준비를 해야 했던 건데. 미안합니다.”

하준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쳐졌다.


“지금이라도 이거 취소하고 맞추러 갈까요?”

그가 싫어하면 어쩌나.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조금 전까지도 마음을 괴롭히던 걱정들이 하준의 말 한마디에 모두 바스러졌다.

수아의 입술 사이로 미소가 번졌다.


“아니요. 우리의 첫 커플링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것 말고, 제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었어요.”

하준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첫 커플링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 정말 수아 씨는…….”

정말 너는 20년 전 그 시절부터 나에게 변함없이 감동을 안겨주는구나.

하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빨리 들어가서 만들어요. 하준 씨가 내 남자라는 증표를 가지고 있어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으니까요.”

수아는 환하게 웃으며 하준을 이끌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증표를 만들기 위해 나란히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



“오늘 스페셜한 데이트는 어떠셨나요?”

수아는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 서서 하준에게 물었다.


“다음 데이트 계획이 부담스러워질 만큼 완벽했습니다.”

“부담스러울 게 뭐 있어요. 우리 둘만 함께 있으면 되는데.”

우리 둘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달콤한 단어였던가.

어느새 하준의 입에 미소가 담겼다.


“오늘 반지가 완성돼서 서로 손에 끼워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해요.”

수아는 자신의 비어 있는 왼손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반지의 마무리 광을 내는 작업은 공방 주인이 해주기로 하였기에 반지는 내일 찾기로 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저도 그렇긴 한데. 하루니까 어떻게든 참아봐야죠.”

말끝에 하준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나저나 수아 씨 괜찮겠어요?”

“네? 뭐가요?”

“반지 말이에요. 회사에서는 비밀연애 하자면서요. 그런데 반지 보면 다들 눈치채지 않겠어요?”

“반지는 하준 씨만 할 거니까 괜찮아요.”

“저만 하라고요? 그럼 수아 씨는 안 하겠다는 거예요?”

하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아니요.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저는 목걸이에 끼워서 걸고 다닐 거예요.”

“목걸이요?”

“네. 저는 목걸이로 차고, 하준 씨는 임자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야 하니까 반지로 차고요.”

허. 수아의 말에 하준은 당황스럽다며 탄식했다.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수아 씨도 임자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야 남자직원들이 다가서지 않을 텐데요.”

“음. 아니죠. 저는 반지가 없어도 남자직원들이 다가오지를 않아요.”

하준의 말에 수아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반면에 하준 씨는 너무나 완벽한 사람이라서 반지라는 표시가 없으면 여러 여자가 탐을 내서 안 돼요.”

아무래도 서로의 이미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듯한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남자직원들이 다가오지를 않는다고?

아무래도 수아는 서로의 이미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수아에게 접근하려는 남자직원들의 숫자가 지훈이에게 전해 들은 것 만해도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섰고,

수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남자직원들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참을 인’자를 몇 번을 새겼는데.

나야말로 반지가 필요 없을 정도의 청정 지역 아니던가?

수아의 말에 전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녀의 결정이 그러한 것을.

더 많이 사랑하는 내가 백번 양보하는 수밖에.


“대신 회사 밖에서 데이트할 때는 목걸이 말고, 반지로 하는 겁니다.”

“네. 그럼요.”

수아는 당연하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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