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한 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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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한 번만 더
2022.09.17.
다음 날 아침 마케팅팀 사무실.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들을 진행하느라 모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지훈이 시우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 모두 바쁜 건 알지만 잠깐만 하던 일 멈추고, 주목해주세요.”
지훈에게 향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그의 옆에 서 있는 시우에게로 향했다.
“오늘부터 우리 마케팅팀으로 출근하게 된 민시우 사원입니다.”
지훈이 시우를 소개했다.
“민시우 씨는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갑작스럽게 국내 본사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해외 지사라는 말에 대단하다며 웅성거리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시우 씨 팀원들에게 인사하시죠.”
지훈의 말에 시우는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십니까. 민시우라고 합니다. 뭐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던 출근 날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은 시우의 결정이었다.
TF팀의 업무가 내일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카페에서 보았던 김지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은 수아가 처음 왔던 그 날처럼 시우를 환영해주었다.
“음. 민시우 씨 자리는 저기 수아 씨 옆이 좋겠네요.”
자리를 안내하는 지훈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 사이를 지나 시우는 수아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반가워요. 저는 이수아라고 해요.”
“민시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사실은 저도 입사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선배님이라는 호칭은 좀 그래요.”
“하루라도 일찍 입사하셨으면 당연히 선배님이시죠.”
어이쿠. 요놈 보게. 사회생활 잘할 관상이네그려.
수아는 시우의 넉살에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외국에서만 있어서 한국에서의 회사생활은 모르는 게 많습니다. 많이 알려주세요.”
“하긴. 그렇겠네요. 아무래도 외국이랑은 분위기가 다르긴 할 거예요. 저도 신입이라 아는 게 많지는 않지만, 우리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봐요.”
“네. 많이 의지하겠습니다. 선배님.”
두 막내의 소곤거리며 웃는 소리가 파티션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어느덧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며 점심시간을 알렸다.
“시우 씨.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시우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수아를 따랐다.
구내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TF팀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까 보니까 TF팀 출근한 것 같던데요?”
“근무는 내일부터잖아. 오늘은 구성원들이랑 인사나 하라는 의미 아닐까?”
“그럼 진성 그룹 외동딸도 왔겠네요?”
“저번에 보니까 진성 그룹 딸이 부회장님한테 오빠라고 하던데요? 둘이 잘 어울리기는 하더라고요.”
“혹시 벌써 사귀고 있는 거 아니야?”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원래 재벌 자녀들 결혼은 서로 수준 봐가면서 한다잖아.”
“맞아요. 사업파트너 고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그런 면에서는 그 진성 그룹 딸이랑 우리 부회장님이 딱이겠네.”
TF팀에서 시작한 대화의 주제가 진성 그룹의 딸과 하준과의 관계로 흘러가고 있었다.
수준……. 사업파트너…….
하긴 진성 그룹의 외동딸은 수준으로나 사업파트너로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겠지.
직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 단어들이 수아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아니야.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잖아.
지금 하준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하준 씨를 믿어.
수아는 밀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수아와 시우를 비롯한 몇몇 직원들은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구내식당 밥이 엄청 맛있네요.”
“오늘 제육볶음 진짜 맛있었죠? 그 칼칼한 양념의 비법은 언젠가 꼭 배워보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시우가 식당 밥에 대해 칭찬하자 수아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어? 부회장님.”
누군가의 목소리에 시우와 수아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하준과 박 비서를 발견하고는 급히 인사를 건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앞에 서 있는 것도 모르지?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수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하준은 미간을 좁혔다.
“부회장님. 점심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
타이밍도 참.
심기가 불편해진 하준은 민준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숫자만 응시했다.
한동안 민망하고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보다 못한 박 비서가 하준의 대답을 대신했다.
“부회장님께서는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으셔서 식사 전이십니다.”
“아. 그, 그러셨구나. 어서 식사를 하셔야할 텐데. 하하.”
직원들은 힘겹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밥을 못 먹었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준을 바라보던 수아가 왔던 길을 향해 급히 발끝을 돌렸다.
“선배님. 어디 가시게요?”
시우의 말에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직원들과 하준의 시선이 동시에 수아를 향했다.
“아. 깜빡하고 식당에 놓고 온 게 있어서요. 먼저들 올라가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말을 마친 수아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왜지? 회사에서는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불편한 건가?
하준의 미간에는 전보다 더 깊은 골이 생겼다.
*
부회장실. 박 비서는 하준에게 TF팀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었다.
“부회장님. TF팀 구성은 마쳤으며.”
‘내가 밥도 못 먹었다는데,’
“업무 진행은 내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자기는 배부르게 먹고.’
“사무실 구성도 오늘 중으로.”
‘나랑은 회사에서 아는 척도 하지 말라 해놓고.’
“인사는 오늘 나누는 것으로.”
똑같은 회장님 아들인데 시우랑은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탁! 박 비서가 브리핑자료가 있는 결재판을 덮었다.
어떻게 된 게 한 번을 안 듣냐. 한 번을.
“부회장님. 잠시 후에 다시 브리핑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무슨 일이냐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박 비서는 가슴 속 답답함을 애써 내리누르며 부회장실을 나섰다.
“하아. 어렵다. 어려워.”
하준은 그제야 입안을 맴돌던 깊은 한숨을 꺼내놓았다.
수아를 사랑할수록 왜 이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아. 한숨소리가 멈출 줄 모르고 연신 흘러나왔다.
하준의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그에게 뭘 먹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었다.
음식점에서 주문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그렇다고 아무거나 사다주고 싶지는 않은데.
결국 수아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여러 개의 삼각김밥을 골랐고, 계산을 마친 뒤 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준 씨.]
[네. 수아 씨.]
언제나와 같이 그의 답문은 순식간에 날아왔다.
[저 지금 문서창고로 가고 있는데, 혹시 잠깐 내려올 수 있어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수아는 하준의 메시지를 읽고는 곧장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꽤 남아 그가 먹는 것까지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아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문서창고의 문이 열리고 하준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하준 씨. 여기요. 여기.”
수아는 어디에서 찾았을지 모를 의자 2개를 가져다 놓고는 하준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하준은 수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하준 씨한테 급하게 줄게 있어서 불렀어요. 눈감고 손 내밀어 봐요.”
이제 막 앉은 사람한테 다짜고짜 눈을 감으라니.
하준이 가만히 앉아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빨리요. 시간이 얼마 없다고요.”
수아가 있지도 않은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재촉했다.
하준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손을 내밀었다.
수아는 비닐봉투 속 삼각김밥을 꺼내기 시작했다.
부스럭 부스럭. 요란한 비닐 봉투 소리가 적막했던 문서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저 괜찮은 거죠? 혹시 무슨 일 당하는 거 아니죠?”
무슨 일이라니. 어이가 없다며 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걱정돼요? 이대로 확 보쌈해서 데리고 갈까 하는데, 설마 반항할 생각인 건 아니죠?”
수아의 말에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뭘 힘들게 보쌈을 합니까? 제 발로 걸어갈 수 있는데.”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수아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마주한 것처럼 얼굴에 화르륵 열이 올랐다
“그, 그럼 오늘 말고 다음에 하준 씨가 스스로 찾아오는 거로 타협을 봅시다.””
“좋습니다. 그럼 날짜는 미리 알려줘요. 그날은 신경 써서 차려입고 찾아갈 테니까.”
상상이나 했을까.
여자와 함께 아무도 없는 창고에 앉아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올 거라는 걸.
손끝에 닿는 수아의 따스한 체온에 조금 전까지 마음을 괴롭히던 서운함과 불안함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하준 씨. 이제 눈 떠봐요.”
“어? 이건…….”
서서히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삼각김밥에 하준이 반가움을 드러냈다.
“아직 점심도 못 먹었다면서요. 간단하게 먹더라도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속이 든든하니까요.”
아. 이걸 사러 그렇게 급하게 돌아섰던 거였구나.
하준은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삼각김밥을 못 먹어본 사람도 있나 싶어서 엄청 신기했는데.”
문득 그와 창가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던 날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돼요. 현성 그룹 아드님이 어디에서 삼각김밥을 먹어봤겠어요.”
빙긋 웃는 수아를 바라보던 하준은 이내 배웠던 대로 삼각김밥의 포장지를 벗겨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열심히 오물오물 씹고 있는 하준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팀에 신입사원이 왔어요.”
시우를 말하는 듯했다.
“아. 그래요.”
하준은 모르는 일인 듯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수아의 말에 오물거리던 하준의 입이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는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렇다고 말을 하자니 시우와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 속에서 하준은 난처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하준 씨. 혹시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그의 표정을 살피던 수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안 좋은 일이요?”
“아니. 지금도 그렇고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아! 엘리베이터.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우랑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렇게 즐거웠냐고 물으면 수아 씨가 대답해줄까?
괜히 작은 일에 신경 쓰는 소심한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래. 얘기하지 말자.
그래. 얘기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굳히려는데,
“얘기해 봐요. 우리 비밀 없기로 했잖아요. 네? 네?”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떼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같이 있던…….”
엘리베이터 앞이라면.
“아. 혹시 시우 씨 말하는 거예요? 그 직원이 오늘 새로웠다는 민시우 씨예요. 그런데 시우 씨가 왜요?”
말을 할까. 하지 말까.
이 짧은 순간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른다.
“……왜 그렇게 웃었습니까?”
“네? 뭐라고요?”
엉뚱한 그의 질문에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준 씨. 혹시 지금 또 질투하는 거예요?”
“그, 그게 아니라…….”
“제가 시우 씨랑 같이 웃은 것 때문에 지금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질투 같은 거 절대로 아닙니다.”
말과는 다르게 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긴요. 하준 씨 얼굴이 지금 질투라고 말해주고 있는데요?”
악. 귀여워. 너무 귀여워. 수아가 빨개진 하준의 얼굴을 감쌌다.
“하준 씨. 나 봐요.”
민망함에 도망 다니던 하준의 시선이 천천히 수아를 향했다.
“제가 이번 한 번만 말해주는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이던 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하준 씨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제일 멋있고, 제일 좋아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미 제 마음은 하준 씨로 가득 차서 다른 남자가 들어올 틈이 없다고요. 알겠어요?”
방긋거리며 묻는데 어떤 표정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버벅거리며 하준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 번만 더 말해줘요. 녹음해놨다가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들어야겠습니다.
“안 돼요. 한 번만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한테 한 이야기는 무효입니다. 무효.”
하준이 휴대폰을 흔들며 재촉했다.
수아는 하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두 팔을 펼쳐 그를 품에 안았다.
“질투할 만큼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나중엔 내가 질투해줄게요. 그럼 지금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하준 씨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