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유일한 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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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유일한 증표
2022.09.20.
하준과 달달한 시간을 보낸 수아는 시간에 딱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탕비실을 나서던 민준이 다가왔다.
“놓고 온 물건만 찾아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 간 김에 커피도 마시고 올라오느라고요.”
“커피는 혼자 마시고 온 거예요? 혹시 숨겨둔 남자친구라도 만나고 온 거 아니에요?”
“네? 나, 남자친구라니. 무슨 그런…….”
혹시 뭘 알고 묻는 건가?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지?
괜히 가슴이 뜨끔한 수아는 말도 안 된다며 허공에서 손을 크게 내저었다.
“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뭡니까? 진짜로 만나고 온 겁니까?”
“아니.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어떻게 만나고 와요.”
하준 씨 미안. 미안해요.
“수아 씨 남자친구 없어요?”
“네. 없어요.”
흐음. 남자친구가 없단 말이지. 의외라는 듯 민준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 드디어 TF팀이 다 모였나 보네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고 자리로 돌아가던 길. 민준이 TF팀 사무실을 바라봤다.
“아까 얼핏 들었는데, 부회장님 오시는 대로 저희 팀이랑 인사 나누는 시간을 가질 거라던데요?”
“같은 층을 쓰니까 서로 잘 지내라는 뜻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그런 거겠죠.”
직원들의 이야기에 수아의 시선이 TF팀 사무실로 향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하준 씨는 더 바빠질 텐데.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수아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데 때마침 하준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위치상 TF팀 사무실을 가기 위해서는 마케팅팀 사무실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회장님. 팀원들 모두 대기하고 있습니다.”
박 비서의 목소리에 수아는 파티션 위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앗.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내밀자마자 하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하준은 기다렸다는 듯 짧은 미소를 보내고는 곧장 TF팀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바쁘시겠지만 잠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마케팅팀 사무실로 박 비서가 들어왔다.
“이쪽은 내일부터 진행될 브랜드 론칭 TF팀. 이쪽은 저희 현성 그룹 마케팅팀입니다. 서로 인사들 나누시죠.”
마치 이제 막 경기를 마친 운동선수들처럼 두 팀의 팀원들은 한 명씩 마주 보며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거의 끝났나? 몇 명이 남았는지 슬쩍 확인하던 수아의 눈이 순식간에 크게 벌어졌다.
……김지수? 설마. 아니겠지. 왜 여기에 김지수가 있겠어.
애써 부정해보려는데,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의 모습은 틀림없이 김지수였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내 트라우마의 시작. 김지수.
어떻게 여기에서 마주칠 수가 있어? 어떻게?
지수가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수아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어느새 지수의 걸음이 수아의 앞에서 멈췄다.
‘아는 척하지 마. 제발. 제발.’
“처음 뵙겠습니다. 김지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지수는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 저는 이수아라고 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주 잡은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저 여자가 진성 그룹 외동딸이지?”
“맞아요. 부회장님한테 오빠라고 부르는 거 제가 봤어요.”
“예쁘긴 예쁘네. 역시 돈이 좋긴 좋아.”
사무실로 돌아가는 지수를 향한 직원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 그랬구나. 네가 진성 그룹 외동딸이었구나.
김지수. 그 이름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 호흡이 가빠지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수아는 지수를 마주한 순간부터 애써 눌러놓았던 악몽 같은 기억들이 떠올라 전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느리게만 느껴지던 시곗바늘이 어느덧 6시를 가리켰다.
직원들은 하나둘씩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서두르지 않았을 수아였지만, 오늘은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손길이 분주해졌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6시가 되자마자 수아는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아는 다은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와 달라 부탁했다.
나를 위로해달라고. 손발이 떨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나를, 어서 와서 위로해달라고.
“뭐? 누구를 만났다고?”
한걸음에 달려온 다은이 손에 쥐고 있던 캔맥주를 쾅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내리쳤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며칠 전 회사 앞에서 보았던 사람이 김지수가 맞았구나.
다은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걔는 도대체 왜 자꾸만 네 인생에 나타난다니? 진짜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어.”
“김지수가 진성 그룹 외동딸이었어.”
“진성 그룹 외동딸이라면…….”
기억을 더듬던 다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준 씨한테 오빠라고 불렀다던 그 여자?”
“……응. 게다가 하준 씨랑 같은 팀에서 일한대.”
“같은 팀?”
“이번 브랜드 론칭은 진성 그룹이랑 협업으로 진행한다고 했었거든.”
“…….”
꼬일 대로 꼬인 악연에 다은은 말문이 턱 막혔다.
“설마 또 그러진 않겠지?”
설마 하준 씨마저 빼앗기는 건 아니겠지.
과거의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민철이가. 그와 다정히 서 있던 지수가. 그리고 그의 엄마가 던져주던 돈 봉투까지
밀려드는 불안함에 수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야. 하준 씨는 민철이랑은 다를 거야. 네가 하준 씨를 믿어야지. 안 그래?”
단호한 목소리로 다은이 말했다.
[내가 먼저 수아 씨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어요.]
언젠가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게 되면 솔직하게 말해달라던 나에게 하준 씨가 해주었던 말이었다.
하준 씨가 분명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약속했어.
“그래. 믿을 거야. 그리고 이번엔 그때처럼 쉽게 빼앗기지도 않을 거야.”
수아는 결심했다.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때처럼 내가 먼저 손을 놓아버리지는 않겠다고.
수아는 손에 들린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다음 날 아침.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던 아침이 밝아왔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 준비를 마친 수아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20통 – 하준 씨]
부재중 20통?
어젯밤 다은이와 맥주를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5캔 째부터는 기억이 가물거렸다.
그대로 잠든 것 같은데. 그사이에 이렇게 많은 전화가 와 있을 줄이야.
수아는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것 같아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땅으로 꺼질 듯 무거운 걸음으로 오피스텔을 나서던 그때.
“수아 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하준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습니까? 걱정했잖아요.”
단숨에 수아의 앞까지 다다른 하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미, 미안해요. 어제 일찍 잠이 들어서 몰랐어요.”
“혹시 아팠던 겁니까?”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수아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걱정해주는 하준에게 차마 이유를 말할 수가 없어 미안함에 시선을 돌리려는데,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던 그의 옷차림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하준 씨 설마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고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이란.
“당연하죠.”
하준이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고. 전화 연결도 안 되는데 어떻게 집에 갑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올라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하준의 말에 수아의 동공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내 걱정을 하느라 밤새 집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인데. 늘 이랬던 사람인데.
변함없는 하준의 사랑을 의심한 것이 미안해 심장이 욱신거렸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수아 씨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저는 괜찮습니다.”
더없이 따뜻한 그의 목소리에 수아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딱딱하게 굳은 수아의 표정을 살피던 하준이 말했다.
“출근 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은데, 괜찮으면 출근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래요?”
집에서 일찍 나오길 잘했다.
“그럼요. 제가 오늘 입을 옷이랑 넥타이 고르는 것까지 모두 도와줄게요. 어서 가요.”
두 사람은 서둘러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준은 욕실로 들어갔고, 수아는 곧장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하준의 성격을 드러내듯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 중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옷과 넥타이를 골랐다.
얼마 후. 욕실의 물소리가 그치고, 드라이기 소리가 나더니 이내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수아는 샤워가운 안에 가려진 하준의 몸을 자꾸만 떠올리려는 본능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렇게 완벽하니까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 거잖아.
그래서 내가 또 이렇게 불안해지는 거잖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제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수아는 고개를 돌린 채로 손에 들린 옷걸이를 내밀었다.
“오늘은 이 옷으로 입어요.”
“고마워요.”
하준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수아는 넥타이를 들고 하준을 기다렸다.
“넥타이도 매줄게요.”
그의 목을 두른 넥타이를 붙잡고 매듭을 만드는데, 하준이 그런 수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겁니까?”
하준의 물음에 수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싶었지만 가늘게 떨리는 수아의 목소리는 그녀의 불안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
그냥 지금이라도 말해볼까.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 지수에게 시선 따위 주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려면 지수와의 관계를 밝혀야 할 테고, 결국엔 민철의 이야기까지 해야 할 텐데.
하준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수아의 모습에 한 번 더 물어볼까도 했지만 하준은 그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더 이상은 묻지 않기로 했다.
넥타이 매듭을 완성한 수아가 가방을 들고 드레스 룸을 나서려는데,
“수아 씨.”
하준의 목소리가 수아의 걸음을 붙잡았다.
수아는 급히 몸을 돌려 하준을 바라봤다.
“어? 그건…….”
돌아본 수아의 시야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고 있는 하준의 네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수아 씨 퇴근하면 바로 끼워주고 싶어서 어제 오후에 미리 가서 찾아왔습니다.”
증표다. 당신이 내 사람이라는 증표.
어찌나 눈이 부신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그렇게 하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수아 씨 반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목걸이 줄에 걸린 반지가 차르륵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해줄게요.”
하준은 목걸이 줄을 손에 꼭 췬 채로 수아의 뒤에 섰다.
“이게 왜 이렇게 잘 안 되지?”
익숙하지 않아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 건지 하준이 목걸이의 고리 가까이 다가왔다.
움찔. 하준의 따뜻한 숨결이 수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보이지 않는 그의 움직임에 온몸이 반응하던 그때.
“다 됐습니다.”
하아. 하준의 체온이 등 뒤에서 사라지자마자 수아는 멈추었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거울을 보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하준은 등 뒤에서 수아를 살며시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저에게 유일한 증표가 되어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