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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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변화
2022.09.24.
“하아. 들어가기 싫다.”
회사 앞에 도착한 수아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하준이 내려준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부터 김지수랑 하루 종일 같은 층에서 일해야만 하는 거지?’
처한 상황이 어이가 없고,
‘하준 씨가 김지수랑 딱 붙어서 일하는 꼴을 어떻게 하루 종일 보냐고!’
직면할 상황이 절망스러웠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갔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 다시 출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싫다.”
김지수가 싫은 건지. 아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자신이 싫은 건지.
한숨에 실린 작은 음성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수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아 씨. 수아 씨.”
사무실에 들어와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옆자리의 희수가 의자를 바짝 당기며 다가왔다.
“수아 씨. 대박 사건이야. 대박 사건.”
무슨 일 때문인지 희수가 들뜬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우리 부회장님 연애하시는 것 같아. 저기 봐봐. 부회장님 왼쪽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거.”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수아는 빨리 보라며 자꾸만 눈짓하는 희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더니 정말 고개를 돌리자마자 책상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 정말 작정을 했구나. 수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저 반지는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눈이 부시네.
도대체 광을 얼마나 정성껏 넣으신 건지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반지의 반짝거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내 반지도 지금쯤 저렇게 반짝이고 있겠지.
수아는 반지가 걸려 있는 목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혹시 진성 그룹 딸이랑 맞춘 커플링 아닐까?”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수아의 손이 멈칫했다.
“오. 진짜 그럴 수도 있겠네요.”
“모야. 그럼 애인이랑 한 공간에서 같이 일하는 거야?”
아니.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쪽으로 빠지는 건데.
하준 씨 애인은 김지수가 아니라 나라고 나!
여직원들의 목소리에 순간 화르륵 열이 올랐다.
아으. 목이 탄다. 목이 타.
신경질적으로 텀블러를 집어 든 수아는 정수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아는 제 앞을 막고 인사를 건네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김지수였다.
“이수아 씨 좋은 아침입니다.”
가지런한 치아를 한껏 드러내며 지수가 인사를 건네 왔다.
아오. 저 앞니를 확 그냥.
“네. 좋은 아침이네요. 김지수 씨.”
수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답하고는 빠르게 지수를 지나쳤다.
“성격 좋아 보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재벌 외동딸인데도 성격이 싹싹하니 괜찮은 것 같네요.”
“얼굴에 집안에 거기다 성격까지. 다 가졌네. 다 가졌어.”
겨우 아침 인사 하나에 온갖 칭찬들이 쏟아졌다.
흥. 다들 그녀의 숨겨진 본성을 모르니 그런 칭찬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더는 지수에 대한 칭찬을 듣고 싶지 않았던 수아는 커피를 핑계로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뭘 했다고 진이 다 빠졌는지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수아 씨.”
사무실을 빠져나온 보람도 없이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저 좀 보시죠.”
“제가 지금은 좀 바쁜데요. 무슨 일이시죠?”
“잠깐이면 됩니다.”
지수는 제 할 말만 하고는 곧장 비상구로 향했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해. 흥분하면 지는 거야.
수아는 들썩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녀를 따랐다.
비상구로 들어서자 누가 있는지 계단의 위, 아래를 살피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김지수 씨.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조심스럽습니까?”
확인을 마친 지수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수아의 앞에 섰다.
“너 대체 언제부터 이 회사에 다닌 거야?”
그래. 너도 나만큼이나 당황스럽겠지. 우리가 같은 곳에서 근무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지수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모든 대답을 해주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내가 그걸 왜 너한테 말해야 하는데?”
“뭐?”
“내가 언제부터 근무했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 이수아 많이 변했네?”
수아의 날카로운 반응에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지수는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대학생 때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 사회 물 좀 먹었다고 건방져졌네.
지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데 설마 그대로일까.”
“…….”
망설임 없이 받아치는 모습에 지수가 다시 당황하는 사이 수아는 곧장 말을 이었다.
“너랑 나 좋은 인연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않나? 나는 너랑 이렇게 마주 보고 서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어제도 모른 척했던 거였고.”
“다행이네. 그럼 다시는 이렇게 따로 불러내지 마. 앞으로도 우리는 쭉 모르는 사이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수아의 눈빛은 매서웠고 목소리는 단호했다.
남자친구를 빼앗기고도 아무 말 못 하고 눈물만 흘리던 예전의 수아가 아니었다.
“김지수. 우리 다시는 엮이지 말자. 제발.”
할 말을 마치고 비상구 문을 나서는 수아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얼음물이라도 들이킨 듯 목구멍이 얼어붙을 것 같은 시원함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왜 이렇게 당당하지 못했을까. 뭐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당당했다면 나는 민철이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속이 시원하면서도 뭔지 모를 답답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뭐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
부회장실.
TF팀의 프로젝트 진행 계획서를 검토한 뒤 부회장실로 올라온 하준은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준아. 이거 결재…….”
결재서류를 들고 책상으로 다가오던 지훈의 걸음이 멈췄다.
“뭐냐? 그 번쩍거리는 거는?”
햇살을 머금은 채 번쩍거리고 있는 하준의 왼쪽 손을 향해 턱짓하며 지훈이 물었다.
사무실에서는 이미 한바탕 소동이 있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홍보팀과 회의를 하느라 사무실을 들르지 못한 탓에 이제야 발견한 것이었다.
“이거?”
하준은 기다렸다는 듯 왼쪽 손을 들어 얼굴 옆에 가져다 댔다.
“보면 몰라? 커플링이잖아. 커. 플. 링.”
목소리에 힘이 실린 걸 보니 꽤나 자랑이 하고 싶었나 보다.
만약 내가 안 오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마땅한 친구도 없어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지훈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려고 했다. 그런데.
반지에 대한 자랑은 어떻게든 참고 들어주겠는데 반지의 제작과정까지 듣고 있자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좋냐?”
지훈은 서둘러 하준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리 첫 커플링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하긴. 저렇게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애한테 그것도 질문이라고.
지훈이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데 하준이 말을 덧붙였다.
“이거 수아 씨랑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직접 만들었다고?”
“응. 첫 커플링은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다면서 미리 예약을 해 놓았더라고.”
둘 다 연애고자라 진도는 제대로 빼고 있는 건지 걱정했었는데 순식간에 커플링까지 맞춰버렸다 이거지?
오. 이수아. 의외로 당찬 구석이 있었네.
지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회장실을 나섰다.
*
신제품 개발부에서 올라온 자료에 대한 마케팅 회의가 길어져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직원들은 굳은 몸을 이리저리 틀며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함께 이동하던 수아는 사무실을 나서기 전 슬쩍 돌아보며 TF팀 사무실을 살폈다.
‘어? 어디 갔지?’
다른 직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하준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
“하준이 거기 없는데.”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팀장님. 깜짝 놀랐잖아요.”
“너네 커플링 했더라?”
“쉿! 그렇게 크게 얘기하시면 어떻게 해요.”
아. 이런 조심성 없는 사람. 수아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지훈과 수아뿐이었다.
“근데 너는 왜 안 꼈어?”
“저는 목걸이로 걸고 있어요.”
“아. 목걸이.”
하긴.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둘 중에 한 명은 반지를 감추는 게 좋겠지.
“그런데 왜 네가 목걸이야? 네가 반지를 꼈어도 되잖아.”
“음. 아니죠. 애초에 반지를 만든 이유가 다른 여자들이 하준 씨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던 거니까요.”
“다른 여자들?”
“네. 임자 없는 사람인 줄 알고 여자들이 막 들이대면 어떻게 해요.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수아의 모습에 지훈은 헛웃음이 나왔다.
들이대긴 누가 들이대. 아니. 설사 들이댄다고 한들 하준이가 받아주기는 하고? 심한 말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오히려 반지를 껴야 할 사람은 하준이가 아니라 너라고 너.
이걸 하준이가 모를 리 없는데. 보나 마나 말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겠지. 불쌍한 놈.
지훈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평소에는 눈치가 참 빠른 것 같은데 왜 이런 거에는 눈치가 전혀 없냐?”
“눈치가 없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어디를 가서도 눈치 없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 그럼 연애 한정인가 보지. 그 없는 눈치는.”
“어머.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래 봬도 연애라면 모르는 게 없는…….”
헙. 아차 싶었는지 수아가 재빨리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이고 그러셨어요? 이렇게 대단한 연애 박사님을 몰라뵙고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놀리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목소리 가득 비웃음이 느껴져 수아는 눈을 치켜뜨며 지훈을 노려봤다.
“아주 얼굴을 뚫기라도 할 기세네.”
“할 수 있었으면 벌써 했어요.”
제 눈에서 출발한 수아의 검지와 중지가 지훈의 눈앞까지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하준이 부회장실에 있으니까 가봐.”
“부회장실이요?”
그렇게도 좋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에서 한겨울 한파가 몰아치더니 순식간에 벚꽃 잎이 흩날린다.
지훈은 하준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며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그래. 얼굴만 잠깐 보고 오는 거야. 밥은 제대로 먹는지 확인도 좀 하고.”
잠시 망설이던 수아는 민망했던지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부회장실.
박 비서의 앞에 선 수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혹시 부회장님 안에 계신가요?”
“네. 계십니다.”
“아. 안에 계시는군요.”
“…….”
왜인지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흐르는 정적을 먼저 깬 건 박 비서였다.
“들어가 보십시오.”
“네? 들어가요?”
“부회장님 뵈러 오신 거 아닙니까?”
“맞아요. 부회장님 뵈러 온 거.”
재빠르게 긍정은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왜 오늘은 무슨 일로 왔냐고 안 물어보시지?
수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회장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에이. 아무렴 어때.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언제 마음이 바뀔까. 수아는 급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닫고 돌아서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하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준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 자는 건가?’
수아는 발뒤꿈치를 세우고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진짜 자나 보네.’
근처까지 다가갔는데도 하준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피곤했나? 생각하다가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아. 차에서 불편하게 있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겠구나.
나 때문에 피곤한 거였네. 수아는 하준에게 미안해졌다.
불편해 보이는데. 어디 누워서라도 자지. 깨워서 편하게 자라고 얘기해볼까.
잠깐 망설이던 수아는 이내 하준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살짝 불러서 깨워보자는 생각으로 살며시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그런데.
어머. 피부 관리라도 받는 건가. 무슨 남자 피부가 웬만한 여자들보다 더 좋아? 이런 걸 도자기 피부라고 하는 건가?
입보다 눈이 먼저 반응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그의 뽀얀 피부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던 그때.
하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으앗. 깜짝이야.
깜짝 놀라 물러서려는데 하준의 커다란 손에 손목이 붙잡혀 그대로 그의 위에 내려앉았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