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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질투의 방향 (53/105)


53. 질투의 방향
2022.10.01.



“수아 씨. 지난번에 부탁한 현성백화점 입점 브랜드 리스트 좀 넘겨줄래요?”

“네.”

우울할 땐 우울하더라도 일은 해야겠기에 리스트 자료를 들고 지훈의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료를 넘기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 저도 모르게 시선이 TF팀 사무실로 향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분주하게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뭐야? 굳이 저렇게 딱 붙어서 회의를 할 필요가 있어?

많고 많은 자리 중에서 하필 저 자리에 앉을 건 뭐야?

하준의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 싱글거리고 있는 지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르륵 열이 올랐다.

후우. 차라리 보지를 말자.

수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 알코올 땡긴다.

아무래도 오늘은 알코올을 넘겨야지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수아는 퇴근 후 회사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이 건네는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냉장고로 걸음을 재촉했다.

망설임 없이 캔맥주 2개를 집어 들었다.

야외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따기 전. 수아는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준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냈다.


[하준 씨. 오늘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급하게 먼저 퇴근했어요. 회의에 방해될까 봐 메시지로 남겨요. 내일 만나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대뜸 전화벨이 울렸다.


“회의하는 거 아니었어요?”

[조금 전에 끝났습니다.]

“아. 그랬구나. 방해될까 봐 메시지로 보낸 건데.”

[그런 걱정하지 말고 언제든 전화해요.]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집에 빨리 들어가서 편히 자요.”

[혹시 오늘도 술 마실 겁니까?]

“네.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술은 벌써 손에 들려 있지 말입니다. 수아가 시선을 맥주캔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어제도 많이 마셨는데 그러다 몸 상하면 어떻게 하려고.]

“오늘은 조금만 마실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따가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까요?]

“아니에요. 어차피 집 근처에서 만날 거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말고 먼저 자요.”

[그럼 진짜 조금만 마셔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요.]

“그래요. 하준 씨도 조심히 들어가고 잘 자요.”

[수아 씨도 잘자요.]

목소리가 참 달달하네. 내 마음 같지 않게…….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수아가 중얼거렸다.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맥주캔을 입에 가져다 대려는데.


“……혹시 수아 씨?”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회사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만날 줄이야.

수아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어머. 혹시나 해서 불러본 건데 진짜 수아 씨였네.”

“김유나 팀장님?”

차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 우연히 수아를 발견한 유나가 아는 체를 해온 것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수아는 엉거주춤 일어나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설마 지금 혼술하는 거예요? 멋지다.”

유나는 어느새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수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도 술 한잔하고 싶은 기분이라 지훈 오빠 부를까 했는데. 혹시 괜찮으면 나랑 한잔할래요?”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수아가 눈을 키웠다.


“내가 쏠게요. 나랑 같이 마셔요. 네? 네?”

“아……. 그럼 그럴까요?”

혼자 조용히 마실 생각이었는데. 같이 마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수아는 별생각 없이 유나를 따라나섰다.

수아를 태운 유나의 차는 번화한 도로를 달려 어느 고급스러운 호텔에 도착했다.

수아는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은 처음이었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빛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호텔 안에 있는 바였다.

수아는 처음 경험해보는 낯선 분위기에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유나의 뒤를 졸졸 따랐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지나고, 안쪽에 위치한 복도를 지나자 VIP 프라이빗 룸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보였다.

프라이빗 룸은 가운데에 큰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주변으로는 U자 형태의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유나가 먼저 소파에 앉았고, 뒤를 이어 수아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연예인으로 착각할 만큼 근사한 외모의 직원이 룸 안으로 들어왔고,

유나는 수아가 평소 들어본 적도 없는 신기한 언어들을 사용하며 주문을 했다.

아마 와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짐작이 들어맞았는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양주와 와인. 그리고 다양한 과일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수아 씨. 우리 오늘 이거 다 마시고 갑시다.”

“좋아요!”

수아는 저 술을 김지수라 생각하고 모조리 마셔 없애버리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



“아니이. 수아야. 나 정도면 진짜루 완벽! 아쭈우 완벽하지 않니이?”

“그러뉘까아. 언니정도면 너어무우 완벽이지이. 대체 뭐를 더 바라냐고오.”

어느샌가 두 사람의 호칭은 수아와 언니로 바뀌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두 사람은 발음조차 제대로 내기 어려울 정도로 취한 상태였다.


“나같이 완벽한 여자가 조타고 이렇게 매달려 주는데에 도대체 왜 싫다는 거냐고오! 민지훈 이 나아쁘은 노마아!!”

유나의 외침에 수아도 용기를 얻었는지 눈썹에 잔뜩 힘을 주고는 이내 외치기 시작했다.


“민하주우운. 너도 아쭈우 나빠. 지수가 옆에서 웃어주니까 조으냐? 암껏뚜 모르면서. 내가 질투해주겠다고 해찌마안 이런 질투를 원한 건 아니었따고오. 방향이 틀려따고오!”

만약 프라이빗 룸이 아니었다면 바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아주 진상이 따로 없는 술주정이었다.


“민지훈 이 나뿐노마!”

“민하준 이 나뿐노마!”

그렇게 두 사람이 술주정의 끝을 보여주던 그때. 프라이빗룸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야! 김유나! 너는 왜 남의 영업장에 와서 진상질이야!”

“어? 우진 오빠다. 우진 오빠아아아.”

아무래도 유나와 수아의 술주정을 보다 못한 직원이 사장인 우진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야! 정신 좀 차려봐. 대체 무슨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나뒹구는 병의 개수를 대충 세어보아도 여자 둘이 마셨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양이었다.


“민지훈 불러. 민지훈!”

유나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지훈의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하아. 김유나 또 시작됐어.”

우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지훈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이내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김우진 오랜만이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야. 웬일이나 마나 너 지금 당장 여기로 좀 와야겠다.”

[왜? 뭔데? ……설마 또?]

“그래. 김유나 여기 와 있어.”

“민지훈 데리고 오라고오오. 민지후우운!”

[하아. 한동안 잠잠하다 했다.]

지훈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만취의 목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민하준도 오라고 그래! 민하주우운!”

고막에 꽂히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지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야? 김유나 혼자 있는 거 아니었어?]

“어. 나도 처음 보는 여잔데. 아까부터 하준이를 찾더라고. 근데 저 하준이가 우리가 아는 하준이인지는 모르겠어.”

“구래. 민하준도 불러! 수아야 언니만 믿어! 언니가 민하준 혼꾸녕 내줄게!”

……수아? 설마 이수아?

아으. 김유나. 너는 순진한 수아까지 꼬드겨서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그 하준이가 우리가 아는 하준이가 맞는 것 같다. 금방 데리러 갈게. 그때까지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만 해주라.]

“그래. 알겠어. 근데 웬만하면 빨리 와라. 이러다 다른 손님들 다 도망가겠다.”

[어. 지금 출발해.]

통화를 마친 지훈은 재킷을 챙겨 들고는 서둘러 옆집으로 향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하준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문을 열었다.


“너 지금 나랑 같이 우진이네 호텔 좀 가야겠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느닷없이 찾아와 우진이네 호텔을 가자니. 하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치 곤란 진상들 빨리 처리하라고 전화 왔어.”

“유나 말하는 거야?”

처치 곤란 진상이라면 김유나지.

지훈과 함께 몇 번인가 유나를 데리러 가본 적이 있기에 금방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너 혼자 가면 되지 나는 왜 끌어들여.”

“나는 김유나. 너는 이수아.”

응? 누구?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하준이 눈을 키웠다.


“지금 이수아라고 했어?”

“그래. 니 여친 이수아. 지금 유나랑 같이 있는 것 같아.”

“아닌데. 오늘 수아 씨 친구들이랑 약속 있다고 했는데? 그럼 그 친구가 유나였다는 거야?”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고. 어쨌든 유나랑 수아가 잔뜩 취해서 우진이 바에서 진상 짓하고 있나 봐. 빨리 가야 해.”

지훈의 말에 그동안 수아가 보여주었던 다양하고 당황스러운 술버릇들이 하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빨리 가자.”

하준은 재킷과 차 키를 챙겨 들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급한 마음에 속도를 내다 보니 전화를 받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하준. 민지훈. 오랜만이다.”

바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던 우진이 다급한 발걸음의 지훈과 하준을 맞이했다.


“어. 연락 줘서 고맙다.”

“고맙긴. 그나저나 유나랑 같이 있는 여자는 누구야? 계속 하준이만 찾던데?”

질문을 던지는 우진의 시선이 지훈을 향했다.

대놓고 하준이에게 ‘저 여자 누구야?’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우진과 하준의 관계가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소개로 하준을 알게 되었지만 친해지고 싶어 말을 걸어 봐도 돌아오는 건 늘 침묵뿐이었고, 대답을 해주는 건 언제나 하준의 옆을 지키던 지훈의 몫이었다.

그 덕에 우진은 하준이 아닌 지훈과 친해지게 되었다.


“혹시 하준이 여자 친구야?”

우진이 슬쩍 하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지훈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불편해하던 수아가 떠올라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얼른 유나 치우러 가야겠다. 조만간 보자.”

“그래. 오늘도 고생해라.”

아주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짓는 우진을 뒤로한 채 지훈과 하준은 걸음을 옮겼다.


“민지훈 이 나쁘으은 노마아!”

“민하준도 나쁘다아아!”

두 사람의 우렁찬 목소리가 룸의 문을 뚫고 나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지훈과 하준은 서둘러 프라이빗 룸의 문을 열었다.


“김유나! 너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어? 민지훈이다아. 지인짜아 민지훈이네에? 지인짜 민지훈이야아.”

유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지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아 씨가 만난다는 친구가 유나였어요? 집 근처에서 마신다면서요. 조금만 마신다면서요.”

하준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흔들거리고 있는 수아의 어깨를 붙잡고는 시선을 맞췄다.


“어? 하준씨이이. 여긴 오또케 알고 왔어요오?”

부정확한 발음과 흔들거리는 움직임이 그녀들의 만취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김유나. 일단 여기서 나가게 일어나봐.”

“수아 씨.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내 손 잡고 일어나 봐요.”

지훈과 하준은 몇 번이나 다리가 풀리는 두 여자를 힘겹게 챙겨서는 바를 벗어났다.

그리고는 이런 상태로 집에 들여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호텔의 주인인 우진찬스를 사용해 스위트룸 2개를 잡았다.


“야! 민지훈! 나쁘은노옴. 너 진짜 진짜아 후회할 거야아. 음냐. 음냐.”

유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지훈의 이름과 함께 욕설 비슷한 말들을 한참 동안 쏟아내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민하준. 자냐?]

수아를 침대에 눕힌 뒤 그 옆에 앉아 잠든 얼굴을 감상 중이던 하준의 휴대폰에 지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니.]

[그럼 잠든 여자들은 더 자라고 두고, 우리도 오랜만에 술 한잔할까?]

지훈의 제안에 하준은 잠든 수아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답문을 보냈다.


[그래. 그러자.]

[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정리하고 내려와.]

[그래. 먼저 가 있어.]

하준은 수아가 깰까 조심스럽게 침대를 벗어난 뒤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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