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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관계 (54/105)


54. 관계
2022.10.04.



 


“민하준. 여기.”

하준이 탄 엘리베이터가 바가 있는 층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지훈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좀 전까지 유나와 수아가 머물렀던 프라이빗 룸으로 향했는데, 언제 정리를 했는지 깔끔한 모습이었다.

지훈과 하준은 각자 평소에 즐겨 마시던 술로 주문했다.

얼마 후 주문한 술과 안주들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고 지훈과 하준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너랑 나. 같이 앉아서 술 마시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지훈이 먼저 하준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자 하준도 지훈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수아랑은 어때? 잘 돼 가고 있는 거야?”

“뭐. 그냥 그렇지…….”

뭘 그런 걸 묻냐며 하준이 급히 술 한 잔을 비웠다.


“내가 너한테 여자 친구 얘기를 물어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 안 그래?”

“…….”

하준은 대답 대신 쑥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큰아버지 큰어머니한테는 언제 소개시켜 드릴 거야? 엄청 좋아하실 것 같은데.”

사실 지난번 하준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한 이후 현성과 혜선으로부터 수시로 전화가 걸려왔다.

하준이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하시니 방향을 트신 거겠지.

처음에는 이름이 뭐냐. 나이는 몇이냐. 직업은 뭐냐.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냐. 호구조사를 하시더니.

최근에는 빨리 엄마, 아빠한테 소개시켜드리라고 재촉해보라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글쎄……. 수아 씨가 준비되면 소개시켜드려야지.”

“수아가 아니라 네가 준비가 안 된 건 아니고?”

지훈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다시 술 한 잔을 비우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너는? 유나랑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유나랑 어떻게 할 생각이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여자 친구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유나 이야기로 빠지는 건데? 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네가 유나를 대하는 태도가 도통 이해되지가 않아서 묻는 말이야.”

“내 태도?”

“유나가 거는 전화는 무조건 받고, 유나가 어디 가자고 하면 항상 같이 가고, 주말에는 만나서 쇼핑도 같이하잖아. 유나를 싫어한다는 사람의 태도라기엔 좀…….”

“내가 유나를 싫어해? 누가 그래?”

“그럼 아니야?”

“응. 아닌데. 나 유나 좋아해. 귀엽잖아. 사랑스럽고.”

뜻밖의 대답이었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긴 했어도 분명 지훈의 입에서 유나가 좋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왜 자꾸 밀어내는 건데?”

“그건……. 너만 알고 있어라.”

잠시 망설이던 지훈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준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지훈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유나가 대학교 졸업하고 현성 그룹에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였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인 듯 지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루는 유나 어머님이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유나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냥 같은 회사니까 부탁하시나 보다 했지.”

“뭔가 다른 뜻이 있으셨다는 거야?”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를 유나 짝으로 골라놓은 사윗감이 있으니 다른 쓸데없는 놈들이 유나 곁에 얼씬대지 못하도록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

“…….”

“회사 오너인 큰아버지께 부탁하시면 될 일을 왜 나한테 따로 말씀하셨을까 생각해봤거든?”

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봤는데?”

하준이 정적을 깨며 물었다.


“결론은 하나더라고.”

“하나?”

“우리 부모님과의 친분 때문에 돌려 말씀은 하셨지만, 결론은 너는 내 딸의 짝이 아니다. 그러니 너도 유나 곁에서 얼씬거리지 마라. 그 뜻 아니겠어?”

“…….”

말을 들어보니 지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하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나 어머님께서 미리 점찍어두셨다는 그 남자랑 유나 조만간 선보게 할 거라고 우리 어머니한테 자랑하셨다고 하시더라. 그때까지만 참아보려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하준의 말에 괜찮다며 지훈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는 별 관심도 보이지 않던 민하준에게 위로를 받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마음은 쓰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술 한 잔을 더 들이켜려던 그때.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지훈이 눈을 키웠다.


“너 혹시 수아랑 김지수 관계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수아 씨랑 김지수?”

“아,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

지훈은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아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지만, 문득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지훈과 유나는 비상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뮤지컬공연 초대권 생겼는데 나랑 같이 가줄 거지?”

“그런 건 전화나 문자로 얘기하라고 했지. 자꾸 바쁜 사람 불러내지 말고.”

뭔가 대단한 용건이 있는 것처럼 빨리 비상계단으로 오라는 유나의 메시지에 걸음을 서둘렀던 지훈이었다.


“전화로는 잘생긴 오빠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하긴 목소리도 얼굴만큼 멋지긴 하지만.”

미간을 좁히는 지훈의 모습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까분다. 이런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장난 아니라고 했다. 오빠만 오케이하면 엄마한테 말해서 바로 결혼 진행할 수 있다니까?”

결혼이라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너에게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주어야 할까.

너와 결혼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그러니까 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면 안 된다고. 그렇게 얘기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굳이 내가 서둘러 말하지 않아도 조만간 선을 볼 텐데. 그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어 볼까.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나타내는 듯 지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또. 또. 심각한 표정 짓는다. 오빠는 내가 결혼 얘기만 꺼내면 꼭 그렇게 심각해지더라? 설마 내가 결혼 생각도 안 하고 오빠를 쫓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난 결혼 생각 없어. 만약 결혼이 네 목표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봐.”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냉정한 말을 쏟아내는 지훈의 모습에 유나가 매섭게 눈을 흘겼다.

나쁜 놈. 저렇게 대놓고 얘기할 건 뭐야.


“아. 됐어. 지금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뮤지컬 얘기나 해. 공연 시간이랑 장소는 내가 메시지로 보내줄 테니까 확인하고 시간 맞춰서 나오기나 해. 알겠지?”

유나는 자신의 할 말만 쏟아내고는 서둘러 비상계단을 빠져나갔다.

지훈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기에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유나의 모습이 사라지고 갑자기 찾아든 두통에 계단에 걸터앉은 지훈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데.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고 또각거리는 여자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봐서는 적어도 2, 3층 정도의 위 또는 아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김지수 씨.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조심스럽습니까?”

들려오는 김지수라는 이름에 지훈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 이수아 많이 변했네?”

곧이어 들려온 이름은…… 이수아?

그럼 지금 이수아랑 김지수가 같이 있다는 거야?

지훈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바닥에 붙이고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랑 나 좋은 인연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않나? 나는 너랑 이렇게 마주 보고 서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어제도 모른 척했던 거였고.”

“김지수. 우리 다시는 엮이지 말자. 제발.”

그 말을 끝으로 누군가가 비상계단을 나갔는지 문소리가 들렸고, 그 사람이 수아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지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건방진 년. 별것도 아닌 게 도도한 척하기는.”

몇 마디 욕설을 더 뱉어낸 지수도 이내 비상계단을 빠져나갔다.

수아와 지수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에 당황했는지 지훈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그것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엿들은 내용에 대해 두 명 중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궁금함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혹시나 하준은 알고 있나 싶어 말을 꺼낸 것이었다.


“뭔데 말을 하다가 말아? 수아 씨랑 김지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아의 일이라면 언제나 진지 모드에 돌입하는 하준이였기에 말을 꺼내고 나서도 아차 싶긴 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인지한 지훈이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비상계단에 있다가 우연히 수아랑 지수가 말하는 걸 들었거든.”

“수아 씨랑 지수? 두 사람이 비상계단에는 왜?”

지훈과 마찬가지로 하준도 놀랐는지 눈을 키우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서 말이야. 혹시 수아가 너한테 지수랑 아는 사이라고 말한 적 있어?”

“아니.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래? 그럼 그 대화는 대체 뭐였지?”

“무슨 대화?”

신경이 쓰인다는 듯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둘이 나눈 대화가 그리 길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더라고. 서로 아는 척하지 말자고 하는 걸 보면 꽤 불편한 사이인 듯했어.”

“불편한 사이…….”

하준은 말끝을 흐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손에 들린 술잔을 비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준은 지훈과의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와 수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민하준. 나뻐어! 나쁘다고오!”

순간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하준이 눈이 번쩍 뜨고는 수아를 바라봤다.

수아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꼬대인가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지수가 그렇게 웃어주니까 좋으냐? 좋으냐고오!”

지수? 김지수? 하준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둘이 아주 딱풀인 줄. 아주 그냥 딱 붙어서는…….”

수아는 말을 하면서도 기분이 나쁜지 눈썹에 잔뜩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지수한테 안 뺏길 거라고! 내가…… 하준 씨…… 지킬 거라고……. 음냐.”

수아는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자신을 지키겠다 말하는 수아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입술 가득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수한테 빼앗긴다니.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준은 제 옆에서 작은 숨소리를 뱉어내고 있는 수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는 수아에게 물어볼 수는 없기에 다음 주부터는 두 사람의 관계를 좀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으음…….”

스위트룸의 넓은 통유리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눈 부신 햇살에 수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물, 물…….”

수아의 목소리가 가뭄이 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끝은 간절하게 물병을 찾았다.


“물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맙습……?”

불쑥 손에 쥐어지는 시원한 생수병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감사 인사를 전하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

수아는 눈앞에 서 있는 하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입만 뻐끔댔다.


“네. 저 민하준 맞습니다.”

“하준 씨가 왜 여기에…….”

수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감이 묻어난 얼굴로 하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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