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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하필이면 (55/105)


55. 하필이면
2022.10.08.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은 침실.

수아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집 근처에서 조금만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준이 팔짱을 낀 채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수아는 시선을 떨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려고 했죠. 당연히 그러려고 했는데 갑자기 김유나 팀장님을 만나는 바람에…….”

말하던 도중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김유나 팀장님.”

수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침대 이불을 들쳤다.

설마 유나가 거기 있을까. 지켜보던 하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분명히 같이 마셨는데…….”

유나를 찾으려는 듯 수아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하아. 이 여자가 정말. 하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는 다른 방에 있습니다. 제가 수아 씨를 챙기고 있는 것처럼 지훈이가 유나를 챙기고 있을 테고 말이죠.”

“아.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하면서 다행이라고 하는 겁니까?”

어제? 수아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바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술이 모자란다며 몇 병 더 추가로 시켰었고. 그다음엔. 그다음엔…….

헐. 보고도 기억 못 할 비주얼이 아닌데 이번에도 기억 속엔 하준이 없었다.

……엄마.

오늘부터 다은이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또다시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기면 다은이의 딸이 되겠다던 지난날의 결심이 뇌리를 스쳤다.

이제 진정 술을 끊어야 하는 날이 찾아온 건가…….

아. 금주 생각만으로도 술이 땡긴다. 마치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프듯이.


“수아 씨가 약속 있다고 할 때마다 어디 불안해서 잠이나 잘 수 있겠습니까? 매번 술만 마셨다 하면 이러니.”

“죄송합니다…….”

그러게. 못 볼꼴을 보이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민망함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그렇다고 그렇게 기죽을 건 또 뭐야.

풀이 죽은 수아의 모습이 안쓰러워 하준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유나는 왜 만난 겁니까?”

하준의 물음에 수아의 시선이 올라왔다.


“일부러 만난 건 아니고 우연히 회사 앞에서 만났어요.”

“친구 만난다고 했잖아요.”

“아. 그게…… 약속이 갑자기 취소가 돼가지고…….”

지수 때문에 혼자 술을 마시려 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습니까? 혹시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있기야 있었죠. 지수라는 끔찍한 인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인간.

당신에게만큼은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인간.


“아니에요. 다들 잘해주셔서 안 좋은 일 같은 거 없어요.”

수아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혹시나 누가 괴롭히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말해요.”

뭘 알고 묻는 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그의 질문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말하면요? 말하면 어떻게 해줄 건데요?”

“어떻게 해줄까요?”

“음. 글쎄요.”

뭐가 좋을까. 눈동자를 굴리는데 하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수아 씨가 원하는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게 해줄게요.”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수아 씨를 괴롭히려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설사 그게 다른 회사 사람이더라도.”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그러니까. 이런 든든한 애인이 있다는 거 잊어버리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숨기지 말고 얘기하는 겁니다.”

“네. 알겠어요.”

그가 말한 다른 회사 사람이 김지수를 뜻한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수아는 그저 알겠다며 해맑게 웃었다.


“오늘은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고, 내일은 뭐 합니까?”

내일? 내일 데이트하자는 뜻인가?


“제가 내일은 데이트가 있어서 좀 바쁠 예정입니다만.”

수아는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머. 주말인데 하준 씨는 안 바쁜가 보네요?”

“네. 저는 내일 한가합니다.”

장난인 줄 알면서도 그녀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한다는 것처럼 들려 뱉어낸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헐. 혹시 삐진 건가?

점점 가늘어지는 하준의 눈매에 아차 싶었는지 수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데이트 때문에 바쁜데, 하준 씨도 당연히 바빠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데이트는 저 혼자 하나요?”

수아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하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일 수아 씨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네. 그럼 저는 예쁘게 입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두 사람은 내일의 데이트를 떠올리며 말랑말랑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

다음 날.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하준은 주방에 서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힘 조절이 관건인데…….”

어느새 또 터져버린 김밥을 내려다보며 하준이 중얼거렸다.

벌써 몇 개의 김밥을 터트린 건지. 식탁 위에는 명을 달리한 김밥들의 잔해가 처참한 모습으로 쌓여 있었다.

어디 김밥뿐이겠는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 유부초밥들과 널브러져 있는 식빵 조각들까지.

누가 보면 세계 요리대회라도 나간다고 착각할 정도로 온갖 재료들과 도구들이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하준은 손의 힘을 최대한 뺀 상태로 다시 김밥을 돌돌 말기 시작했다.

그렇지. 몇 번의 실패 끝에 완성한 김밥을 한입 크기로 잘라 그릇에 담았다.

하준은 그릇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음식들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는 게 힘은 들지만 꽤나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준이 이렇게 바쁘게 준비를 하는 동안 수아도 그와의 데이트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옷이 많은 것도 아닌데 입었다가 벗었다가를 몇 번 반복하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미니 원피스를 꺼내 대어보다가.


“너무 짧으면 걸어 다니기 불편하겠지.”

캐주얼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대어보다가.


“그래도 데이트인데 이건 너무 편해 보이잖아.”

그렇게 한참이나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던 수아는 결국 잔잔한 패턴이 그려진 화이트 원피스를 선택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여성스러움은 드러낼 수 있는 주말 데이트 룩으로는 완벽한 옷이었다.

옷을 입고 준비를 마친 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각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너무 일찍 서두른 탓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데이트가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갈까 하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하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차가 막히지 않아서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기다릴 테니 서두르지 말고 준비 끝나면 나와요.]

[금방 내려갈게요.]

곧바로 답문을 보내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던 수아가 걸음을 멈췄다.


“어우. 큰일 날 뻔했네.”

수아는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목걸이를 들고는 걸려 있던 반지를 빼내었다.


“이제야 제대로 껴보네.”

수아가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반지를 살폈다.

목걸이를 벗어난 반지를 보면 그가 좋아하겠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그의 반응에 수아의 입술 끝이 스윽 올라갔다.

수아는 다시 걸음을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어떤 옷을 입고 왔을까. 어디에서 데이트를 하게 될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니 자동차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준의 모습이 보였다.

회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차림이었다.

몇 걸음 다가서니 그의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손목을 접어 올린 화이트 셔츠에, 발목이 살짝 보이는 블랙 슬랙스, 그리고 화이트 스니커즈.

분명 누구나 입을 법한 평범한 옷들인데 왜 그가 입으면 어느 패션 화보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지.

아무래도 미친 비율과 피지컬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수아는 다시 한번 제 남자친구의 비주얼을 감상하고는 총총총 걸음을 서둘러 하준의 앞에 섰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좀 전에 도착하자마자 메시지 보낸 겁니다.”

“오래 기다리게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수아가 방긋 웃었다.


“수아 씨. 오늘 너무 예쁘네요.”

하준이 말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서둘러 했던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니. 오늘만 예쁘다는 게 아니라 항상 예쁜데 오늘은 더 예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당황을 하는지.

수아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그렇죠? 오늘 유독 더 예뻐 보이죠? 하준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신경 좀 썼어요.”

“더 신경 쓰지 않아도 항상 예쁩니다.”

사탕이라도 입에 머금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이 뱉어내는 말마다 달콤함이 묻어나왔다.


“이제 갈까요?”

“네. 가요.”

수아와 하준은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고, 자동차는 골목을 빠져나와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창밖의 모습들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건지. 올라간 수아의 입술이 내려오질 않았다.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던 수아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요.”

하준이 정면을 향하던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을 마주치고는 살며시 웃었다.

마치 기대하라는 듯.

하긴. 어디인지 미리 알면 뭐 하겠어. 그곳이 어디든 하준 씨와 함께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다시 창가로 향하려던 수아의 시선이 핸들을 잡고 있는 하준의 왼손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오늘은 나도 커플링을 끼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말해줄까. 말까. 수아가 고민하는 사이 신호에 걸렸는지 자동차가 천천히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수아는 슬쩍 하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무방비상태인 그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왼손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하준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내 얼굴 말고 손을 보라고 손.

시선이 마주친 수아는 포개진 손을 향해 눈짓했다.

응? 하준은 왜 그러냐며 눈을 키우고는 이내 수아의 시선을 쫓았다.

……아.

반지를 발견한 하준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약속했잖아요. 회사 밖에서 데이트할 때는 목걸이 말고 반지로 하기로.”

그래. 분명 그렇게 약속을 하긴 했었다. 저 혼자만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웠으니.

하지만 위치만 달라졌을 뿐 그녀도 커플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 약속은 그리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당신은 항상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아. 정말 어쩌자고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 거야.

싱긋 웃는 그녀의 입술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아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려는데.

빵! 갑자기 뒤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출발하지 않으니 경적을 울릴 수밖에.

사실 그깟 경적쯤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키스에 눈이 멀어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엑셀을 밟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한강 공원이었다.

하준의 자동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수아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한강 공원.

민철과 지수가 자신 몰래 만나고 있던 것을 본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장소였다.

한강 공원이라는 글자만 봐도 아픈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그런데 오늘 데이트 장소가 한강 공원이라니.


‘왜 하필…….’

수아의 경직된 입가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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