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내가 바라는 것 (56/105)


56. 내가 바라는 것
2022.10.11.


alt="">

 
주차를 마친 하준이 보닛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수아는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alt="">

‘왜 하필이면 이곳을 선택한 걸까.’

한강공원은 민철과 지수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던 곳이었다.

믿었던 사랑과 우정을 한꺼번에 잃었던 곳.

혹시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까 봐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인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이야.

하아.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트렁크에서 돗자리와 쇼핑백을 꺼낸 하준이 수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alt="">

“예상은 했지만, 사람들이 진짜 많네요.”

alt="">

“그러게요.”

생각이 많아져서일까. 그가 건네는 말에 살가운 대꾸를 하지 못했다.

alt="">

“앉을 자리를 찾으려면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죠?”

alt="">

“네.”

그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하준이 앞을 막아섰다.

alt="">

“수아 씨.”

alt="">

“네? 왜요?”

alt="">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alt="">

“아.”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내 스스로를 향한 질타가 이어졌다.

이수아.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건 하준 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alt="">

"제가요? 아닌데. 아프기는커녕 너무 건강해서 탈인데요.“

수아는 서둘러 표정을 감추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alt="">

“진짜로 괜찮은 거 맞습니까?”

아닌 것 같은데. 하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alt="">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그런 의미로 이건 제가 들게요.”

화제를 돌리려 수아는 하준이 들고 있던 돗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앗. 하준은 놀라며 손을 뒤로 숨겼다.

alt="">

“왜요. 도와줄게요. 돗자리는 가벼워서 괜찮아요.”

alt="">

“아니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이리 달라며 수아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하준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돗자리에 금이라도 박아놨나. 뭘 저렇게까지 사수를 해.

alt="">

“그럼 돗자리 말고 다른 거 도와줄게요. 뭐 도와줄까요?”

alt="">

“음.”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던 하준이 입을 열었다.

alt="">

“도와줄 건 없고 수아 씨가 해줬으면 하는 건 있습니다.”

alt="">

“그게 뭔데요?”

alt="">

“행복한 생각.”

뜻 모를 그의 말에 수아는 대꾸 없이 눈만 깜빡였다.

그런 수아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하준이 말을 덧붙였다.

alt="">

“데이트하는 동안 행복한 생각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alt="">

“저는 수아 씨가 행복하다면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니까요.”

alt="">

“…….”

수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바라는 게 나의 행복뿐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천천히 그와 시선을 맞추는데 언제나처럼 온기가 가득했다.

아. 미련하게도 나는 지나간 불행을 신경 쓰느라 바로 눈앞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구나.

하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래. 과거에 실패했다고 현재도 실패하란 법은 없지.

잊자. 잊자. 제발 잊어버리자.

alt="">

“좋아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 부탁 들어줄게요.”

수아는 일렁이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alt="">

“이러다가는 있던 자리도 다 뺏기겠어요. 우리 빨리 가요.”

수아가 앞서 걸었고 하준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자리를 찾았고, 결국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나름의 명당자리를 찾아냈다.

하준이 준비한 돗자리를 펼치자 수아는 재빠르게 그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alt="">

“이거 덮어요.”

하준은 미리 준비해둔 무릎담요를 펼쳐 그녀의 다리 위에 살며시 올려주었다.

alt="">

“오. 무릎담요. 역시 우리 애인님은 센스가 남다르시네요.”

아주 짧은 치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닥에 앉아 있을 생각에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하준은 엄지를 신나게 흔드는 수아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고는 곧장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시선은 흐르는 강물을 향했고 자연스럽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깐의 정적 후에 수아가 물었다.

alt="">

“어떻게 한강공원에 올 생각을 했어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수많은 장소 중에서 왜 하필 이곳을 골랐는지.

하준은 쑥스러운 듯 시선을 살짝 내리며 대답했다.

alt="">

“인터넷에서 검색어 찬스를 좀 썼습니다.”

alt="">

“검색어가 뭐였는데요?”

alt="">

“음. 그게.”

잠시 망설이더니.

alt="">

“설레는 데이트요.”

현성 그룹 부회장님께서 설레는 데이트를 검색할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풉. 수아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애쓰는 사이 하준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alt="">

“찾아본 바에 의하면 설레는 데이트 1위가 ‘한강공원에서 남자친구랑 도시락 먹기’였습니다.”

alt="">

“아. 그렇구나.”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alt="">

‘왜 그런 걸 물었을까. 왜 하필 여기를 왔냐는 뜻인가?’

그녀가 던진 질문하나에 생각이 많아졌다.

수아의 표정을 살피던 하준이 미간을 좁혔다.

alt="">

“혹시 한강공원 싫어합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길까요?”

그런 표정으로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을 하라는 거야.

잔뜩 긴장한 듯한 그의 모습에 수아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alt="">

“설마요. 설레는 데이트 1위인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alt="">

“그럼 다행이고요.”

그제야 구겨졌던 하준의 미간이 반듯해졌다.

alt="">

“수아 씨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같이 도시락 먹을까요?”

alt="">

“도시락이요?”

alt="">

“말했잖습니까. 설레는 데이트 1위.”

아. 한강공원에서 남자친구랑 도시락 먹기.

하준은 가지고 온 쇼핑백에서 4단짜리 도시락을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헐. 김밥에 유부초밥에 샌드위치에 과일까지.

뚜껑이 열릴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갖가지 음식들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alt="">

“우와. 온갖 소풍 음식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네요.”

alt="">

“수아 씨가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준비해봤는데. 이 중에 좋아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겠죠?”

alt="">

“설마 이거 하준 씨가 직접 만든 거예요?”

alt="">

“난생처음으로 요리라는 걸 해 봤습니다. 그래서 맛은 보장할 수가 없어요.”

어쩐지 그의 표정이 시무룩해 보였다.

alt="">

“여기에서는 음식도 시켜 먹을 수 있다니까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그의 동공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아가 젓가락을 드는 순간 하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시락을 향해 움직이는 젓가락의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하준은 숨 쉬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시선을 집중했다.

이윽고 수아의 입속으로 김밥 하나가 들어갔다.

우물우물.

아무 말 없이 김밥을 씹던 수아의 입술 사이로 속삭이듯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alt="">

“맛있다.”

믿을 수가 없어 수아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되뇌던 하준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alt="">

“맛있다고요? 지금 맛있다고 한 겁니까?”

alt="">

“네. 맛있다고 한 거 맞아요.”

가게에서 파는 자극적이고 강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하준이 직접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최고의 요리재료인 그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는데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alt="">

“제가 상처받을까 봐 거짓말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태어나 처음으로 만든 음식인데 맛있을 리가. 하준은 수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alt="">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진짜로 맛있다니까요? 부회장님 그만두고 지금 당장 요리사 해도 되겠어요.”

수아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alt="">

“하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잔뜩 굳어 있던 하준의 어깨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alt="">

“걱정은 그만하고 하준 씨도 같이 먹어요.”

이후 두 사람은 도시락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수아가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alt="">

“와. 진짜 너무 맛있었어요. 오랜만에 과식했네요.”

alt="">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

하준이 도시락통을 정리하기 시작하던 그때.

하암. 하준의 입에서 하품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요리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가 4단 도시락을 만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 일 때문에 시작이 늦어진 것도 문제였지만 반복되는 실패가 더 큰 문제였다.

하준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겨우 도시락을 완성할 수 있었고, 그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하준의 느닷없는 하품에 수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alt="">

“설마 도시락 만드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잔 거예요?”

alt="">

“그, 그러니까 그게…….”

당황했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라고 하려니 거짓말이라 마음에 걸리고, 맞다고 하려니 도시락의 부족한 완성도가 마음에 걸렸다.

하준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수아가 먼저 소리를 냈다.

alt="">

“저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어떻게 해요.”

그가 도시락을 꺼내놓았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요리는 처음이라던 그가 4단 도시락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수아는 요 며칠 그가 자신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alt="">

“많이 피곤하죠?”

alt="">

“괜찮습니다.”

수아의 마음을 읽은 듯이 하준은 싱긋 웃었다.

alt="">

“괜찮기는요. 이리 누워 봐요.”

수아가 접혀 있던 다리를 쭉 뻗고는 손으로 톡톡 치며 눈짓했다. 베고 누우라는 뜻이었다.

alt="">

“아무한테나 빌려주는 다리가 아닌데 하준 씨한테만 특별히 빌려줄게요. 사양은 사양하겠습니다.”

수아는 망설이는 하준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alt="">

“진짜 괜찮은데…….”

결국 그는 어색한 움직임 끝에 수아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alt="">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잖아요. 눈감고 조금만 쉬어 봐요.”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나긋한 목소리였다.

수아는 천천히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역시 피곤했구나. 하준의 눈이 금세 스르륵 감겼다.

하준의 눈이 감긴 것을 확인한 수아의 눈도 이내 감겼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람과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서로에게 전해지는 체온까지.

눈을 감는 순간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좋다.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좋다.

수아는 어쩐지 다시 이곳에 온다고 해도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금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게 좋아서 그때의 상처 따위는 생각나지 않을 것 같으니.

나는 하준 씨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나는 하준 씨를 사랑하고 있구나.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alt="">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수아는 잠깐 졸았다 싶은 생각이 들어 급히 눈을 뜨고 하준을 내려다보았다.

헉.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건지. 고개를 내리자마자 하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alt="">

“뭐예요. 언제부터 눈뜨고 있었어요?”

alt="">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계속 수아 씨만 보느라 시계를 볼 시간이 없어서.”

하준이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alt="">

“일어났으면 깨웠어야죠.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게 어디 있어요. 아래에서 쳐다보면 엄청 못생겨 보였을 텐데.”

차마 그를 밀어낼 수는 없어 수아는 두 손으로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하준이 수아의 손목을 잡고는 살며시 내렸다.

alt="">

“예쁜 얼굴 왜 가립니까.”

alt="">

“거짓말하지 마요. 아래에서 보는데 예쁠 리가 없어요.”

설마 그럴 리가.

alt="">

“수아 씨가 어떤 모습이래도 언제나 예뻐해 줄 남자친구가 여기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하준의 목소리가 수아의 귓가로 녹아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