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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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경고
2022.10.15.
급하게 처리할 일로 인해 하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수아는 다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데이트하시느라 바쁘신 몸께서 어쩐 일로 전화를 하셨데?]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가자던 것을 거절한 탓이리라.
미안하다는 말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니 역시나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데이트가 벌써 끝났을 리는 없고 남친님 어디 가셨냐?]
“응. 회사 일 때문에 잠깐 통화하러 갔어.”
[그럼 얌전하게 기다릴 일이지 왜 전화질이야? 외로운 솔로 염장 지르려고 걸었냐?]
하여간. 말본새하고는.
쏘아붙이는 말투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수아는 대꾸하지 않고 제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나 지금 어디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준 씨가 어디 대단한 데라도 데려갔나 보지?]
다은의 물음에 수아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뱉었다.
“한강공원.”
[한강공원?]
잘못 들은 건가. 다은이 되물었다.
“나 지금 한강공원에서 돗자리 펴고 앉아 있어.”
[하준 씨가 데려간 거야?]
“응. 와보니까 여기네.”
[헐. 하고많은 데 중에서 왜 하필 거기를 데려갔데?]
수아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알지? 김지수 때문에 민철이랑 헤어지고 나서 여기 한 번도 온 적 없는 거.”
[알지. 한강공원 글자만 봐도 그때 일 생각난다면서 싫어했잖아.]
“그래서 두 번 다시 올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휴.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냐.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괜찮고?]
“사실 그때 일이 생각나서 기분이 좀 그랬었는데…….”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던 수아가 하준을 발견하고는 말을 멈췄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라고 하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 끝난 모양이었다.
“미안.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수아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언제 왔어요? 급하다던 일은 잘 해결된 거예요?”
하준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느닷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하준이 말을 덧붙였다.
“여기 한강공원 싫어하는 거 말입니다.”
아. 통화내용을 들었구나. 어디부터 들은 거지? 설마 전부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수아는 당황스러웠다.
“싫어하냐고 물었을 때 솔직하게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수아 씨가 그렇게 싫어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저만 즐거워했잖습니까.”
변명하려던 수아의 말을 그가 빠르게 채갔다. 원망이 담긴 듯한 말투였다.
그게 아닌데. 당신 혼자만 즐거워 한 게 아닌데.
오해를 풀어야겠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지켜보던 하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수아 씨가 말해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려고 했는데 지금 물어봐야겠습니다.”
“뭘요?”
“혹시 지수랑 아는 사이입니까?”
“그, 그걸 어떻게…….”
“서로 좋지 않은 사이라는 것만 어쩌다 알게 됐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았다는 뜻일까. 그럼 민철에 대해서도?
들킬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수아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말하기 곤란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요. 곤란하지 않아요.”
아직 대답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갑자기 말을 거두자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지나간 과거 따위 곤란할 게 뭐 있어. 몇 년 동안 오지 못했던 한강공원에 와서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사실 저랑 지수는 대학교 동창이었어요.”
수아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빼앗아 간 잔인했던 지수의 행동들에 대해.
수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하준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지수로부터 저를 지키겠다고 한 거였습니까?”
“제가요?”
하준에게 지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설마요. 제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물론 기억을 못 하겠지만.”
말투에 잠깐 가시가 돋는 듯하더니.
“그저께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지수에게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저를 지킬 거라고.”
그저께라면 김유나 팀장님과 술을 마신 날이었다.
김지수 때문에 마신 술이었기에 마음속 이야기가 술김에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결론은. 저도 과거의 그 사람처럼 김지수에게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네요.”
하준의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수아의 눈이 흔들렸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당황한 수아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럼 뭡니까? 지켜줘야겠다는 말의 뜻은?”
“그러니까 하준 씨가 막 흔들릴 거라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하준 씨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뱉어내는 말의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느낌.
“지수가 하준 씨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결국 수아는 본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준 씨 잘못이 아니라는 거예요.”
당신의 사랑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데.
“순전히 제 잘못이에요. 김지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지 못하는 제 잘못.”
마음이 전해졌을까. 수아는 슬쩍 하준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히 수아의 말을 듣고 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내일 진성 그룹에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네? 진성 그룹엔 왜요?”
엉뚱한 하준의 대답에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브랜드 론칭이 완료될 때까지 김지수랑 매일 마주치게 될 거 아닙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러지 말아요.”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까?”
굳이 음성으로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이럴 땐 무조건 말리고 보는 게 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직원 교체를 제시할 겁니다.”
“그럴 줄 알고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왜죠? 저한테 그럴만한 힘은 충분히 있습니다.”
“알아요. 하준 씨라면 직원 교체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는 거.”
알면서 왜 하지 말라는 건지. 하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수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수 때문에 힘든 건 사실이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냥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해보려고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보지 않고 살면 됩니다. 애써 힘들게 노력할 필요 없어요.”
“아니요. 한번 노력해볼래요. 그래야 불안해하지 않고 하준 씨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저 진짜 괜찮아요. 만약 정말 힘들다고 느껴지면 그때는 하준 씨한테 도움을 요청할게요.”
“진짜 괜찮겠습니까?”
“네. 진짜 진짜 괜찮습니다.”
“그럼 힘들어지면 참지 말고 꼭 얘기하는 겁니다.”
“네. 꼭 이야기할게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하준이 수아의 손을 붙잡았다.
“저는 수아 씨가 아닌 다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러니까 저를 지키겠다는 생각 말고 수아 씨 마음부터 잘 지켜요.”
응?
“제 마음이요?”
“자꾸만 흔들리는 수아 씨 마음 말입니다.”
느닷없이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 눈썹이 꿈틀대는데 하준이 말을 덧붙였다.
“도처에 깔려 있는 남자직원들로부터 마음을 잘 지키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김민준 대리가 있겠네요.”
아. 난 또 뭐라고. 이쯤 되면 질투 대마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하준 씨 하는 거 봐서요.”
“음. 그거라면 자신 있죠.”
하준이 표정으로 당당함을 드러냈다.
하긴. 그에게 흠잡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비주얼이 부족하기를 해. 능력이 부족하기를 해. 게다가 다른 여자들은 정말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남자.
당당해도 돼. 뻔뻔해도 돼. 그게 뭐든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수아는 둥둥 떠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하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늦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수아는 고개를 바짝 들어 하준과 시선을 맞췄다.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어여쁘게 밀려 올라간 입술이 다시 말을 건네 왔다.
당신이 부탁하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할 거라고.
다음 날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더없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수아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수아 씨 주말 동안 좋은 일 있었나 보다.”
“저요?”
“그래. 금요일은 죽상으로 퇴근하더니 주말 사이에 얼굴이 환해졌잖아.”
죽상이라니. 설마 그 정도였을까.
“좋은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요새 웃을 일도 별로 없는데, 같이 좀 좋아하자.”
“정말이에요. 주말 내내 집에서 잠만 잤는데요.”
“그래? 하긴. 그게 제일 효율적이긴 하지.”
“맞아. 주말은 무조건 휴식이 최고야. 이제 뼈도 늙었는지 어디 가서 맘껏 흔들지도 못해.”
“아오. 대리님. 벌써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벌써라니. 내 나이가 몇인데. 안 그래도 요즘 필라테스가 좋다길래 그거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니까.”
“대리님 필라테스 하시게요? 저는 벌써 시작했는데.”
“그래? 그거 진짜 효과가 있긴 한 거야?”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고 수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를 정리했다.
*
“하준 오빠.”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던 하준을 향해 지수가 다가왔다.
사무실에서 수아를 볼 생각으로 입가 가득 맺혀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좋은 사이도 아니었지만, 수아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 표정 관리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굳이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부회장님.”
하준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말투로 호칭을 지적했다.
“네. 부회장님.”
지수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그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호칭을 정정했다.
더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하준은 곧장 걸음을 옮겼고 그를 놓칠세라 지수도 서둘러 움직였다.
“부회장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의 큰 보폭을 맞추려 걸음을 서두르던 지수가 물었다.
“지금 끼고 있는 반지. 설마 커플링은 아니죠?”
하준이 걸음을 멈추고 지수를 바라봤다.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아, 아니. 갑자기 없던 반지가 생겼으니까요.”
“그런데 왜 커플링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까?”
“네?”
“없던 반지가 생겼고 그 위치가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이라면 결혼반지 또는 커플링이라는 추론이 나와야 정상 아닌가?”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목소리였다.
“말도 안 돼. 오빠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여자에게 따뜻한 시선 한번 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미모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자신의 끈질긴 대시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그가 어떻게.
도대체 어떤 여자가 그런 민하준의 마음을 가졌다는 건지.
“그게 왜 말이 안 되는 일인지 모르겠군.”
당혹스러워하는 지수와는 달리 하준은 태연하기만 했다.
“누군데?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군데?”
지수는 믿을 수 없다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그럼 그렇지. 금방 성격을 드러내는 그녀의 태도는 하준의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김지수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는 진성 그룹이 아닙니다.”
얼음이라도 박혀 있는 듯 그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계속 이런 식으로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면 정식으로 진성 측에 직원 교체를 건의할 수도 있습니다.”
“직원 교체라고? 내가 진성 그룹 회장의 외동딸인 거 잊었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의 말에 발끈한 지수가 언성을 높였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말끝을 늘인 하준이 한 걸음 다가서며 상체를 기울였다.
“진성을 교체하는 수밖에.”
뭐라고? 뭘 교체한다고?
가까워진 거리 탓에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곧장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지수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