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예상을 벗어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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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예상을 벗어난 반응
2022.10.18.
점심 식사 후 오후 업무가 시작되자 민준이 수아의 자리로 다가왔다.
“수아 씨. 이거 회의자료 15부만 복사해줄래요?”
“네.”
수아는 민준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들고 복사기로 향했다.
복사기 시작 버튼을 누르려는데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수아 씨?”
김지수였다. 지수는 환하게 웃으며 수아에게 다가왔다.
이건 또 뭔 수작인지. 수아는 아는 척하지 말자 해놓고 왜 또 이러는 건지 따져 물으려다 듣는 귀가 많아 포기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김지수 씨.”
“저희 팀 복사기가 아직 설치되지 않아서요.”
느닷없이 자기 팀 복사기 얘기는 왜 꺼내.
“혹시 복사하실 거면 하시는 김에 제 것도 부탁드려도 될까 해서요.”
하. 어이가 없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네 복사 심부름을 하라고?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는데 눈앞의 김지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손에는 두꺼운 서류뭉치를 든 채로.
당연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매몰차게 말하고 싶은데 어쩐지 그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뱉는 순간 타인을 도울 줄 모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리 주세요.”
짜증은 나지만 짜증 나지 않은 것처럼 수아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네. 고마워요. 이수아 씨.”
그러나 수아가 서류를 건네받기 전 누군가에게 빼앗겼다.
“선배님.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시우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가 언제 다가왔는지 수아가 받으려던 서류를 재빠르게 낚아챈 것이었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해도 되니까 시우 씨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할 일 해요.”
“아닙니다. 이런 업무는 막내인 제가 하는 겁니다.”
무슨 막내야. 얼마 차이 안 난다니까 그러네.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지수의 서류를 들고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때마침 사무실로 들어서던 지훈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다가왔다.
“팀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시우는 이때다 싶었는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지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TF팀 김지수 씨가 수아 선배님께 복사 일을 시키셨는데 막내인 제가 대신 하겠다고 하니까 자꾸 싫다고 하셔서요.”
“복사 일이라고요?”
시우의 말에 지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TF팀 업무가 이수아 씨한테 넘어온 거죠?”
그의 표정은 서늘했고 말투에는 가시가 잔뜩 솟아 있었다.
“큰일 났다. 우리 팀장님 한번 화나면 진짜 무서운데.”
“그러게요. 우리 팀장님 다른 팀에서 업무 떠넘기는 거 엄청 싫어하시는데.”
“김지수 씨 한 소리 듣겠네.”
상황을 지켜보던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팀 복사기가 오후쯤에나 설치된다고 해서요.”
지훈 오빠는 당연히 내 편을 들어주겠지. 별일 아니라는 듯 지수의 말투가 가벼웠다.
“그래서요?”
“네? 그래서라뇨?”
예상과는 다른 지훈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는지 지수가 눈을 키우며 되물었다.
“TF팀 업무는 TF팀에서 해결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지훈은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복사기는 다른 팀에도 비치되어 있으니 급한 업무라면 다른 팀에 가서 김지수 씨가 직접 하시죠.”
말을 마친 지훈은 시우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뭉치를 가져다가 지수에게 내밀었다.
“설마 복사기 사용법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죠?”
지훈은 마지막까지 싸늘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서류뭉치를 받아든 지수는 사무실로 급히 되돌아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잠깐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훈의 몸이 한 바퀴를 돌아 수아를 향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떠넘기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수아 씨 자신을 위해서도 팀을 위해서도.”
“네. 명심하겠습니다.”
수아의 대답에 지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료 복사를 끝낸 수아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희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깜짝 놀랐죠?”
앗. 깜짝이야. 당신 때문에 더 놀랐어. 수아가 눈을 키웠다.
“방금 봤다시피 우리 팀장님은 일 떠넘기는 걸 굉장히 싫어하세요. 아무 이유 없이 넘어오는 일에 대해 철벽 방어하시기로 유명하시죠.”
아. 그렇구나.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다른 팀을 돕지 않는 건 아니에요. 정식 도움 요청 건에 대해서는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데요.”
자식 칭찬을 듣는 부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수아는 지훈에 대한 칭찬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야! TF팀 제대로 관리 안 할래?”
“갑자기 무슨 말이야? TF팀 관리라니.”
하준은 다짜고짜 찾아와 언성을 높이는 지훈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너희 팀 복사기 말이야.”
지훈은 흥분된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무실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지수가 수아 씨한테 복사업무를 시켰다고?”
“그래. TF팀 복사기가 없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런 건 업무 시작하기 전에 미리미리 설치를 해놨어야지.”
상황을 단번에 파악한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그건 복사기 때문이 아니었을 거야.”
“복사기 때문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야?”
“아마 일부러 시킨 거겠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뭘 일부러 시켰다는 거야.”
지훈은 뜻 모를 말만 내뱉는 하준의 태도가 답답했다.
“지난번에 네가 얘기했던 수아 씨랑 김지수 관계 말이야.”
“응. 그게 왜?”
“알아냈어.”
“알아냈다고? 진짜? 어떻게?”
지훈이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수아 씨한테 들었어.”
“그래서? 둘이 무슨 관계인데? 말해봐. 빨리.”
“그게…….”
지훈의 재촉에 하준은 잠깐 말을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지훈에게 해도 되는 걸까. 좋지 않은 과거 이야기를 그녀의 허락 없이 전해도 되는 걸까.
고민스러웠지만 결국 하준은 지훈에게 말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같은 팀에 있으니 여러 상황으로부터 수아를 보호해줄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하준은 수아에게 들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네. 복사기 때문이 아니었네.”
모든 것을 알게 된 지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매일 마주쳐야 할 텐데 수아가 많이 힘들겠다.”
“그렇지. 그래서 진성 그룹에 직원 교체를 요청하겠다고 했더니 수아 씨가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고.”
“당연하지.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잖아. 게다가 직원 교체를 요구할 명분도 없는데.”
“명분?”
“그래. 명분. 수아의 전 남친을 뺏어갔다는 게 직원 교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지훈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던 하준의 입이 열렸다.
“차라리 김지수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는 게 나으려나.”
“무슨 얘기. 수아는 내 여자 친구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정곡을 찔렸는지 하준이 흠칫 놀랐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
하. 민하준. 이성적인 판단은 할 생각이 없는 거냐. 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사이가 안 좋다는데 너까지 나서서 수아 편을 들면 김지수 성격에 가만히 있겠냐?”
하긴. 내세울 거라고는 돈과 자존심밖에 없는 인간이니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겠군.
하준이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이 사귀는 거 밝힐 때는 꼭 수아랑 상의하고 밝히도록 해.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래. 알았다.”
하준이 지훈에게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수아 씨한테는 네가 알고 있다는 거 내색하지 말고. 오늘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때도 네가 힘 좀 써줘라.”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럼 간다.”
지훈이 부회장실을 나섰고,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김지수.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창밖을 바라보던 하준의 입술 사이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흘러 시계가 어느덧 퇴근 시간을 향하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던 수아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빠르게 액정을 확인하니 하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수아 씨. 미안해서 어쩌죠? 오늘 회의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먼저 퇴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최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회의까지 길어진다니. 수아는 혹시나 그가 건강이라도 해칠까 걱정스러웠다.
[네. 그럼 먼저 퇴근할게요. 회의 열심히 해요.]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뭔가 부족하다 싶었는지 수아는 다시 키패드를 터치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라도 듣게 끝나면 전화해요. 기다릴게요.♥]
하트라니. 수아는 제 손으로 누르고도 쑥스러웠는지 피식 웃고는 곧장 퇴근길에 올랐다.
1층을 알리는 안내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수아는 층수를 확인한 뒤 서둘러 내렸다.
“아. 배고프다.”
6시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기에 수아는 배를 움켜쥐며 걸음을 옮겼다.
“저랑 같이 저녁 드실래요?”
앗. 깜짝이야.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시우 씨?”
“배고프시다면서요. 저도 지금 엄청 배고픈데.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먹어요.”
“음.”
수아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시우가 목소리를 냈다.
“같이 먹기 싫으시구나.”
눈썹을 툭 떨구더니
“괜찮아요. 매일 혼자였는데요 뭐. 벽보고 앉아서 혼자 먹는 것도 이제 익숙해요. 에효.”
이어 어깨까지 툭 떨군다.
아으 진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하냐고.
“그래요. 같이 먹어요. 그럼.”
수아가 힘없이 돌아서던 시우의 걸음을 붙잡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회사 근처 편의점에 도착했다.
각자 원하는 컵라면을 골라 물을 붓고는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마주 앉았다.
시선을 컵라면에 고정한 채 수아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지훈 팀장님 멋있지 않았어요?”
“맞아요. 엄청 멋져 보이더라고요.”
“평소에는 장난도 많이 치시는데 일할 때는 칼같이 하시는 것 같아요.”
“오늘처럼 윗사람이 맺고 끊는 걸 확실하게 해주시면 아랫사람들이 일하기는 좋을 것 같아요.”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그게 쉽지는 않죠. 우리 팀장님은 회장님 조카분이시라 가능하신 거예요.”
“아. 회장님 조카분이셨구나.”
시우는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러니까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거예요. 저 같은 일개 조무래기들은 하라면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하는 거고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할 말이 있을 땐 당당하게 말해야죠.”
시우의 말에 미간을 좁힌 수아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죠. 시우 씨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일개미들은 할 말이 있어도 없어야 해요.”
말하다 보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수아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삐빅삐빅. 때마침 3분을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앗! 3분 다 됐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수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야식은 라면이 진리지. 시우 씨, 면 불기 전에 어서 먹어요.”
뭐가 그리 급한지 수아는 말을 뱉음과 동시에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다람쥐야 뭐야. 엄청 귀엽네.
마치 먹이를 먹는 다람쥐처럼 귀여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