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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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분실
2022.10.25.
하준과 수아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회사에서 힘든 일 없었어요?”
하준의 느닷없는 질문에 수아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지수 일을 알고 묻는 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네. 없었어요.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정말입니까?”
하준이 수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그럼요. 정말이죠.”
“왜 거짓말합니까?”
수아의 대답에 하준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
“오늘 지수 때문에 힘들었잖아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저한테는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하준 씨가 알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서요.”
하아. 이 아가씨가 정말 뭘 모르네. 하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더 안 좋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별로 큰일도 아니었고 다행히 팀장님이 막아주셔서 잘 해결된 문제라 얘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이래서 돌려보내고 싶은 겁니다. 김지수라면 언제든 또다시 오늘과 같은 일들을 벌이고도 남을 거니까요.”
하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진성 그룹에 연락해야겠습니다. 수아 씨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 진짜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이렇게 일이 벌어져도 수아 씨는 숨기기만 할 테니까요.”
말을 뱉는 하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를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 사과를 해야 했다.
“오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하지만 얘기할 필요성을 못 느낄 만큼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어요.”
“저는 그 별것 아닌 일까지도 다 알고 싶은 겁니다.”
그의 눈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정도도 말하지 못할 만큼 제가 믿음이 안 갑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하준 씨를 못 믿으면 누굴 믿는다고.”
수아가 펄쩍 뛰며 하준의 말을 부정했다.
“이제부터는 사소한 일이라도 다 말할게요. 그럼 되죠?”
“항상. 뭐든지. 저와 같이 상의하는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약속할게요.”
결국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후에야 하준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었다.
다음 날.
수아와 시우는 탕비실에서 홍보용 샘플 키트를 체크하고 있었다. 수량 파악 후 박스에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밥 같이 먹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완성된 박스에 테이프를 붙이던 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감사하긴요. 저도 맛있게 먹었는데요.”
“거절하시려다가 같이 먹어주신 거잖아요.”
그녀의 동정심에 호소하고서야 얻어낸 기회 아니었던가.
“설마 집에 가셔서 괜히 먹었다고 후회하신 건 아니죠?”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에,
“조금 후회스럽긴 했어요.”
장난스럽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시우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눈을 키웠다.
“아니. 좀 더 괜찮은 곳에서 먹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편의점 라면은 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아. 난 또 뭐라고. 시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는 좋았는데요. 그렇게 밖에 앉아서 라면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낭만적이고 좋았어요.”
“컵라면과 낭만이라. 신선한 조합이네요.”
수아가 피식 웃고는 앞에 놓인 박스를 옮기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어? 혹시 그거 반지예요?”
“네?”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세웠다.
이런. 허리를 숙이면서 목걸이가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선배님. 혹시 그거 커플링이에요?”
남자친구가 있는 건가. 시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아니요. 커플링은 무슨. 그냥 우정 반지예요. 우정 반지.”
“우정 반지라면 친한 친구들이랑 맞추는 반지인 거죠?”
“네. 그, 그렇죠.”
“그럼 그 친한 친구들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원래 이렇게 집요한 사람이었나. 시우의 질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다, 당연히 여자죠.”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 건가. 태연하게 대답하고 싶은데 자꾸만 어버버 말을 더듬게 되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서둘러야겠어요.”
수아는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더 남아 있을지 모를 시우의 질문을 미리 차단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우는 그녀의 반지가 커플링이 아니라는 것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샘플 키트를 정리한 수아는 서둘러 외근 나갈 준비를 했다.
신상품 고객 설문 조사 확인을 위한 외근이었다.
“팀장님. 매장 다녀오겠습니다.”
명분은 외근이었지만 근무 시간에 회사 밖을 나와 백화점을 간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백화점에 들어서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수아는 매장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을 먼저 들렀다.
매장 직원들과의 첫 만남이니만큼 화장도 수정하고, 옷차림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가방 속 팩트를 꺼내 드는데 여자 두 명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들은 들어오면서부터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가방인데 어떻게 할 거냐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수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흘낏 쳐다봤다. 아마도 가방 앞쪽에 나 있는 선명한 선이 싸움의 원인인 듯했다.
제일 아끼는 가방에 저렇게 흠집이 나면 화가 날 만도 하지. 게다가 저 브랜드면 가격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수아는 화를 내는 여자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산 지 일주일밖에 안 된 건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그까짓 거 다시 사주면 될 거 아니야!”
“지금 그까짓 거라고 했냐?”
어. 싸움이 너무 커지는 것 같은데. 말려야 하는 건가.
수아는 연신 두 사람의 모습을 힐끗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가.
“그래! 그랬다! 어쩔래?”
“이게 정말!”
결국 말싸움은 몸싸움으로 번져 갔고 수아는 금세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저, 저기. 이러지 마시고 말로 해결을…….”
결국 수아는 머리채를 붙잡힌 여자의 앞을 막아섰다.
“너는 뭐야? 너는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핸드백 주인은 수아의 머리채도 잡아챌 듯 날카롭게 노려봤다.
“이런다고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여자의 팔을 잡고는 어떻게든 떼어내려 애를 쓰는데 흥분한 상태인 사람을 말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수아는 그녀들에게 붙잡혀 여기저기 끌려다니기 시작했고, 어? 하는 찰나의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화장실 벽 쪽으로 넘어졌다.
“아. 아야.”
하필이면 화장실 청소 용품이 쌓여 있는 곳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니 움찔하기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이렇게 요란한 소리가 났는데도 싸움에 열중한 탓인지 두 사람은 수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가 너 신고할 거야! 나와! 당장 경찰서 가게!”
“그래. 가자 가! 나도 너 폭행으로 신고할 거야!”
그럴 거면 처음부터 경찰서로 갈 것이지 왜 화장실에 들어와서 싸우고 난리냐고.
화장실 바닥에 앉아 두 여자가 빠져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아는 이내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아으. 그냥 모른 척할걸. 괜히 나서가지고.”
옷을 정돈하려고 들어왔는데 더 엉망이 된 꼴이 우스웠는지 수아는 픽하고 웃어버렸다.
“앗! 늦겠다. 늦겠어.”
약속한 시각이 다 되었음을 확인한 수아는 거울도 보지 못한 채 머리와 옷을 대충 정돈하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안녕하세요. 본사에서 나온 이수아입니다.”
수아는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어?”
매장 직원은 수아가 내민 명함을 받으려다 그녀의 오른쪽 팔을 쳐다보고는 눈을 키웠다.
“어머. 피 나는 것 같은데. 혹시 다치신 거 아니에요?”
“피요?”
무슨 말인가 싶어 수아는 직원이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헐. 진짜 피네.
언제 다친 건지 옷 위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언제 다쳤지?”
“이 정도 상처면 꽤 아프셨을 텐데 언제 다친 건지 모르세요?”
둔한 건지. 느낌이 없는 건지. 수아의 중얼거림에 직원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 화장실.”
의심 가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청소도구 어딘가에 긁힌 모양이었다.
“일단 병원부터 빨리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피를 보고 나니 아픔이 느껴졌다. 게다가 핏자국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불안했고.
“그럼 일단 근처 병원에서 치료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네. 준비해놓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수아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꽤 심하게 부딪혔던 건지 결국엔 15바늘이나 꿰매고 나서야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쳇. 괜한 오지랖으로 병원비만 깨진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거렸다.
시간을 확인하려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하준의 전화였다.
‘병원에 왔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액정에 뜬 그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수아는 고민에 빠졌다.
‘병원이라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텐데.’
숨기지 않고 뭐든 말하기로 했으니 말 해야지 싶다가도, 병원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를 병원에 오게 하는 건 싫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전화는 부재중 전화로 넘어갔고, 이내 하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외근 나갔다더니 많이 바쁜가 보네요.]
[네. 이번에 새로 입점한 브랜드에 대한 고객 만족도 조사지 때문에 왔는데 아직 회의가 안 끝났어요.]
수아는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회사에 복귀해서 천천히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구나. 아직 일이 많이 남았어요? 데리러 갈까요?]
[아니요. 다음 달에 진행할 프로모션 전달도 같이할 예정이라 언제 끝날지 몰라요.]
[그러면 시간 날 때 전화해줘요. 목소리라도 들어야 일할 힘이 날 것 같아요.]
[알겠어요. 끝나자마자 바로 전화할게요. 그럼 수고해요.]
[네. 수아 씨도 수고해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
하준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약이 나왔고 수아는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머. 많이 다치셨나 보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붕대가 감긴 수아의 팔을 발견한 직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요. 그냥 몇 바늘 꿰매기만 했어요.”
“하필 오른쪽 팔이라 많이 불편하시겠네요.”
“에효.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에요. 차라리 왼쪽이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 후로 몇 마디가 더 오고 간 뒤 수아와 직원은 고객 설문 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설문지가 목표한 양만큼 수합되지 않아 수아는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수아는 매장을 나서며 습관적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
순간 수아의 눈이 터질 듯 커다래졌다. 분명 쇄골 근처에 있어야 할 반지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없지? 아침에 안 하고 나왔나?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화장대에 앉아 목걸이를 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 불안한 모습으로 잠시 생각하던 수아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곧장 여자화장실로 향했다.
제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까 싸움을 말리던 과정에서 목걸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리라.
“넘어진 곳이 이쯤이었는데.”
수아는 화장실 바닥을 더듬거리며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상처가 벌어졌는지 붕대 위로 붉은빛이 배어 나오는데도 수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지를 찾기만 한다면 상처야 다시 치료하면 그만이었기에.
그렇게 계속해서 바닥을 더듬거리던 그때였다. 탁! 누군가가 수아의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