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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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운명
2022.10.29.
TF팀 사무실을 향하던 하준의 시야에 비어 있는 수아의 자리가 들어왔다.
혹시나 근처에 있을까 걸음을 늦추며 주변을 살피다가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수아 씨 어디 갔어?”
“외. 근.”
하준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묻자 지훈 또한 입 모양으로 답했다.
외근 간다는 말 없었는데. 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TF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지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 수아 외근 나간 거 몰랐어?]
[설마 수아가 얘기 안 해준 거야?]
[이런. 왜 말을 안 해줬을까.]
[벌써 네가 귀찮아진 거 아니야?]
[하긴 이제 정이 떨어질 때도 되긴 했지.]
지훈은 약 올릴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연이어 메시지를 보내며 하준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메시지를 확인하던 하준은 멈칫하더니 이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훈은 피식 웃었다.
민하준이 언제부터 이렇게 놀리기 쉬운 상대였을까. 그의 변화가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한편, 사무실을 나선 하준은 곧장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일하는 중인가? 왜 전화를 안 받지?’
다시 전화를 걸려다가 혹시나 싶어 메시지로 보냈다.
[외근 나갔다더니 많이 바쁜가 보네요.]
다행히 답장은 빠르게 날아왔다.
[이번에 새로 입점한 브랜드에 대한 만족도 조사지 때문에 회의 중이에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 데리러 갈까요?]
백화점에서 회사로 돌아오는 길.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요. 다음 달에 진행할 프로모션 내용도 전달해야 하고 이것저것 회의할 것들이 많아서 언제 끝날지 몰라요.]
기대와는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단독으로 나간 첫 외근 아니었나? 첫날부터 언제 끝날지 모를 긴 회의라니. 생각하다가 문득.
‘설마 매장 직원이 남자인가? 회의를 핑계로 수아 씨를 못 가게 붙잡는다거나 퇴근하고 같이 커피라도 마시자고 곤란하게 하는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추측들과 망상들이 머릿속을 채우더니.
[이제 정이 떨어질 때도 되긴 했지.]
불현듯 떠오른 지훈의 메시지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장이라도 백화점으로 달려가 매장 직원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인을 해야겠는데 무작정 찾아가려니 문제가 있었다.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데리러 오지 말라던 수아의 메시지.
분명 부담 주기 싫어서 한 말일 텐데 그런데도 찾아간다면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고민하던 하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부회장실로 향했다.
“박 비서님. 오후에 잡혀 있는 일정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현성백화점 강남점으로 가죠.”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불시점검 차 가보려고 합니다.”
“네. 차 준비시키겠습니다.”
그의 불시점검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까지 이렇게 갑자기 통보한 적은 없었는데.
박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준의 뒤를 따랐다.
백화점에 도착한 하준과 박 비서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번 달 신규 입점한 매장부터 둘러보죠.”
의도성이 다분한 지시였지만 박 비서가 알 리 없었다.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직원들이 곳곳에서 웅성거렸지만 하준은 개의치 않았다.
혹시나 그녀를 놓칠까 걸음을 서두르던 바로 그때.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수아가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쫓던 하준의 시선이 여자 화장실 문 앞에서 멈췄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가 했더니.’
하준은 피식 웃고는 이내 화장실과 가장 가까운 매장으로 들어가 진열된 상품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 중이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면서 기다리기를 몇 분. 나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수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던 그때. 화장실을 나서는 여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 여자 봤어?”
“응. 저렇게 바닥에 엎드려서 찾을 정도면 엄청 비싼 거 잃어버린 것 같지?”
“그러게. 팔에 붕대까지 감고 있던데, 도와줄 걸 그랬나?”
설마 수아 씨를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준은 기다리다 못해 여성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 부회장님.”
거긴 여자 화장실인데. 당황한 박 비서가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여자 화장실인 것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들어간다고? 왜? 무엇 때문에? 납득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박 비서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당장 확인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하준의 표정에 박 비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하준이 여자 화장실로 들어섰고, 박 비서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앞을 막아섰다.
한편 화장실에 들어간 하준은 단번에 수아를 찾아냈다.
바닥에 엎드린 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그녀를.
수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손에 둘린 하얀 붕대와 그 위에 번져 있는 핏자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준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하준 씨?”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체 지금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평소의 그답지 않은 차가운 말투였다.
“일단 나갑시다.”
하준이 바닥에 앉아 있는 수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수아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잃어버린 걸 찾을 때까지는 나갈 수가 없어요.”
“그게 뭐든 똑같은 거로 다시 사줄 테니까 그만 일어나요.”
“아니. 그럴 수가 없어요. 다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잃어버린 게 대체 뭐기에 이러는 겁니까?”
수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반지요. 우리 커플링을 잃어버렸단 말이에요.”
*
박 비서의 도움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하준의 자동차로 향했다.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화장실에서부터 차에 올라탄 지금까지도 수아는 미안함에 하준과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그까짓 반지 다시 맞추면 그만입니다.”
말끝에 아차 싶었는지 하준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우리 커플링이 그까짓 거라는 게 아니라 커플링보다는 수아 씨가 더 소중하니까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오해는 무슨. 저는 오해할 자격도 없어요. 미안해요. 진짜로 미안해요.”
정성을 담아 직접 만든 첫 커플링을 며칠 만에 잃어버렸으니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하아. 계속 그렇게 미안해할 거면 차라리 지금 당장 새 커플링을 맞추러 갑시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용서해준 거로 알게요.”
수아는 당장이라도 주얼리 매장을 찾아갈 것 같은 하준의 모습에 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다니까. 하여간 말도 참 안 들어요.”
하준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커플링 문제는 다음에 새로 맞추는 걸로 마무리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갑시다.”
“다음 문제요?”
잃어버린 커플링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던가? 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팔 말입니다.”
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수아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이번에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까?”
“…….”
제 잘못을 알기는 아는 건지. 수아는 아무 말도 못 한 채로 하준의 얼굴만 바라봤다.
“사소한 일이라도 모두 얘기하겠다던 약속은 애초에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겁니까?”
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따지듯 물었다. 그것이 자신이 느낀 서운함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아까 메시지 보냈을 때 매장 아니었죠?”
헐. 수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병원이었습니까?”
네. 언제나 그 설마가 사람을 잡는 법이지요.
수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 왜 그때 말하지 않은 겁니까.”
“회사에 들어가서 말하려고 했어요. 사실 이게 붕대를 이렇게 감아놔서 그렇지 별로 큰 상처도 아니에요.”
15바늘이나 꿰맨 상처이지만 지금 그 말을 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겁니까?”
하준의 물음에 수아는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던 하준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겠네요.”
수아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한 일에 오지랖 부리다간 이렇게 다칠 수도 있다는 거.”
쳇. 그걸 꼭 그렇게 콕 찍어서 말할 건 뭐람.
수아는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괜한 심술이 났다.
“그래도 그 오지랖 덕분에 우리가 만났다는 걸 잊으면 안 되죠.”
하. 말이나 못 하면. 하준은 어이가 없다며 픽 웃었다.
“그게 오로지 수아 씨 오지랖 덕분만은 아닐걸요?”
“다른 게 또 있다고요? 그게 뭔데요?”
“아마도 운명?”
“…….”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당황한 수아와는 달리 하준은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수아 씨는 몰랐겠지만, 우리 만남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약 20년 전부터.”
느닷없이 웬 20년 전? 말도 안 되는 말을 참 진지하게도 한다며 수아는 피식 웃어버렸다.
“오지랖도 상황을 좀 봐가면서 부리는 게 어떻습니까? 이러다가 큰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됩니다.”
“오지랖이라는 게 원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거라 제가 어떻게 해보기가 어렵…….”
날아와 꽂히는 따가운 시선에.
“……기는 하겠지만 우리 애인님께서 이토록 간절히 원하시니 노력은 한번 해보겠습니다.”
순식간에 말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제야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시동을 걸려는데.
“아니에요. 회사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요.”
“회사요? 설마 지금 이 상태로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미소를 띠고 있던 하준의 입가가 굳어졌다.
“아직 끝내지 못한 업무가 있어서 그래요.”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회사 업무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죽하면 을은 아플 때도 회사 사정 봐가면서 아파야 한다는 말이 있을까.
수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지금 수아 씨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잊고 있는 사실이요?”
“수아 씨가 끝내지 못했다는 그 업무.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고, 더 이상의 고집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도 팀장님한테 연락은 해야죠.”
“이미 전달했습니다.”
“벌써 했다고요? 언제요?”
그가 전화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언제 연락을 했다는 건지.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박 비서님한테 전달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아. 박 비서님. 수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전벨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야!”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뻗는 순간 팔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왜 그래요? 아픕니까?”
순식간에 하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니. 안전벨트를 하려다가.”
“그냥 가만히 있어요. 이런 건 제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네.”
달칵. 안전벨트는 이미 채워진 것 같은데 하준의 얼굴은 여전히 수아의 코앞에 머물러 있었다.
흠. 수아가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하준이 입을 맞춰왔다.
“이건 걱정시킨 벌이에요.”
아. 그가 말한 벌이 윙윙 날아다니는 벌이었나?
입 안 가득 꿀이라도 머금고 있는 건지. 무슨 목소리가 이렇게 달콤하단 말인가.
이런 벌이라면 매일매일 받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