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남다른 스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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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남다른 스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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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남다른 스케일
2022.11.01.
“왔어?”
지수는 자주 가는 바의 VIP룸에 앉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친구 현주를 반겼다.
“내가 얘기했던 건? 가지고 왔어?”
마음이 급했는지 지수는 현주가 채 앉기도 전에 물었다.
“그럼. 내가 누구냐. 당연히 가지고 왔지.”
현주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수아의 반지였다.
지수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사무실로 향하던 길. 별생각 없이 바라본 탕비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저런 잡다한 일이나 하는 주제에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헤거리는 건지’
코웃음을 치며 지나가려는데.
“선배님. 혹시 그거 커플링이에요?”
멈칫. 시우의 목소리가 지수의 발목을 붙잡았다.
커플링이라고? 지수는 급히 탕비실 안을 살폈다.
지수는 잠깐이었지만 분명하게 보았다. 수아의 목에 걸린 반지가 햇살에 비쳐 반짝이고 있는 것을.
사무실로 돌아온 지수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우정 반지라고 했지만, 어느 누가 우정 반지를 목에 걸고 다니겠는가. 커플링이 분명했다.
‘설마 하준 오빠랑 맞춘 커플링은 아니겠지?’
사실 지수는 부회장실을 나오던 수아와 마주친 날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일개 사원이 혼자서 부회장실을 찾은 것도 그렇고. 하준을 좋아한다는 자신의 말에 대한 수아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수아와 하준의 반지 모양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확인.
하준의 반지는 이미 확인했으니 수아의 반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때.
“다녀오겠습니다.”
사무실 너머에서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백화점 어느 지점이라고 했었죠?”
“강남점이요. 제일 가까운 곳부터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외근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조심해서 갔다 와요. 너무 늦을 것 같으면 거기에서 바로 퇴근해도 되고요.”
“네. 알겠습니다.”
지수는 재빠르게 휴대폰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켜 사무실을 나서려는 수아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리고는 현주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보답으로 신상 백 하나를 사줄 테니 그녀의 목에 걸린 반지를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오라는 메시지와 함께.
신상 백이라는 말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현주는 그길로 또 다른 친구를 불러 일부러 싸우는 척하며 수아의 반지를 가져왔다.
지수는 서둘러 반지를 살폈다.
하준의 반지와 똑같지는 않지만 어쩐지 비슷한 모양인 듯 보였다.
좀 더 세밀히 살피던 지수는 반지 안쪽에 새겨진 이니셜을 발견했다.
[H·J ♡ S·A]
‘하! 민하준. 이수아. 너희 둘 진짜였어?’
선명하게 새겨진 이니셜에 지수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뭐야? 두 사람 진짜로 사귀는 사이인 거야?”
“…….”
질문에 답이 없었다.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
“다른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수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아, 아니. 두 사람 커플링까지 나눠 낀 사이라며.”
“그게 뭐 어때서?”
“응?”
“커플링이야 빼버리면 그만이고, 연인 사이야 깨버리면 그만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
현주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민하준을 갖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누구한테도 뺏길 생각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가지고야 말 거야.”
반지를 그러쥔 지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다음 날 아침.
병원에서 받은 방수 커버 덕분에 문제없이 샤워를 마친 수아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거실로 들어섰다.
띵동.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 화면을 살피던 수아가 눈매를 키웠다.
“하준 씨?”
굴욕 하나 없는 얼굴로 인터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은 하준이었다.
수아는 서둘러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잘 잤습니까? 팔은 좀 어때요?”
문을 열자마자 하준이 수아의 팔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에요?”
“아. 다친 손으로 출근 준비하기 힘들 것 같아서 도와주러 왔습니다.”
“네? 괜찮은…….”
“들어오세요.”
하준의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아의 집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 이분들은 누구…….”
“좀 전에 말했는데. 출근 준비 도와주러 왔다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냐고요.
수아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대표로 보이는 여자가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헤어와 메이크업 부분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헤, 헤어랑 메이크업이요?”
수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박 비서님 말로는 회사 행사 때 오시는 분들이라고 하시던데. 맞습니까?”
하준이 시선을 돌리자 또다시 여자의 대답이 이어졌다.
“네. 회사 중요 행사 때 회장님. 부회장님. 그리고 임직원분들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헐. 그렇게 대단한 분들께서 왜 이 좁아터진 집에 온 거냐고. 대체 왜!
아니야. 이건 꿈일 거야. 머리를 가로저으며 도리질하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하준이 수아를 의자에 앉혔다.
“자. 출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시작합시다.”
다시 던져진 하준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잠시 후.
“어떠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바로 수정 가능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거울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자신이 해오던 것은 화장이 아니었음이 새삼 느껴졌다.
“수정이라뇨. 완벽해요. 아주 마음에 쏙 들어요. 역시 전문가의 손길은 다르네요.”
수아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사이. 하준의 눈짓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현관을 빠져나갔다.
“출근 시간에 딱 맞췄네요. 그럼 내일도 이 시간에 오는 거로 하면 되겠죠?”
하준의 말에 수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일도 온다고요?”
“네. 수아 씨 팔이 다 나을 때까지는 계속 오게 할 생각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헐.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수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봤다.
“출근 준비는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굳이 또 오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수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가 찰떡같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알아보니까 화장하는 게 세심함이 필요한 작업이라 다친 손으로는 어렵다고 하던데요.”
찰떡은 개뿔.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 알아보고 오는 거야?
“아니에요. 저는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세밀하게 화장을 하는 편이 아니라서 괜찮아요.”
이 정도까지 했으면 제발 알아들어라.
회사 임원들 담당하시는 대단한 분들의 헤어와 메이크업은 받고 싶지 않다고. 이 스케일 남다른 남친님아.
“흠. 알겠습니다. 수아 씨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뭐.”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얻은 수아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회사에 도착하니 어제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직원들이 안부를 물어왔다.
“팔 다쳤다면서요? 괜찮아요?”
“하필 오른손이네. 많이 불편하겠다.”
“이참에 며칠 쉬지 그랬어요.”
그들의 걱정 어린 말들이 고마워 대답하는 내내 수아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제 너 외근 혼자 보낸 것 때문에 민하준한테 욕을 얼마나 먹었는지 아마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지훈의 메시지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지훈이 여기 다크서클 좀 보라며 눈 아랫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풉.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유나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하던데.]
지훈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유나 팀장님이요?]
[응.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놀랐을 때는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면서 자기가 사겠다고 하네.]
[오. 맛있는 거 얻어먹는 자리라면 저야 언제든 환영이죠.]
[그래. 그럼 하준이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하준 씨한테 다른 약속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다른 약속은 무슨. 민하준한테 회사일 말고 다른 약속 같은 건 없어. 있다고 하더라도 네가 간다고 하면 열 일 제쳐놓고 따라올 녀석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네. 알겠어요.]
맛있는 거라니. 뭘 먹으려나. 수아는 군침을 꿀꺽 삼키며 업무를 시작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해서인지 시간이 평소보다 더 빨리 흐르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찾아온 퇴근 시간.
수아는 약속한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훈의 차에 올랐다.
퇴근 시간이라 오고 가는 직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준의 차보다는 지훈의 차를 타는 것이 더 수월했다.
유나가 알려준 음식점에 도착한 지훈과 수아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쪽에 위치한 룸으로 이동했다.
“수아 씨. 어서 와요.”
룸에는 먼저 도착한 유나와 하준이 앉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수아는 하준의 옆자리로 지훈은 유나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배고플 것 같아서 미리 시켜놨어요. 하준 오빠가 수아 씨는 소고기 좋아한다길래 소고기로 시켰는데 괜찮죠?”
“그럼요. 괜찮죠.”
소고기 얘기 좀 그만하지? 수아는 민망함에 하준을 슬쩍 노려봤다.
“여기가 TV에도 나오는 맛집인데 수아 씨 입맛에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한번 먹어봐요.”
“네. 잘 먹겠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포크를 잡는데 하준이 수아의 앞에 있던 접시를 제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수아의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아. 이 배려심. 어떡할 거야.
수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림 같은 모습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하준의 모습을 감상했다.
“아. 부럽다. 내 것도 누가 좀 잘라줬으면 좋겠다.”
유나가 말끝을 늘이며 지훈을 향해 자신의 접시를 스윽 내밀었다. 잘라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수아는 팔을 다쳤으니까 잘라주는 거잖아. 너는 두 손 다 멀쩡하면서 왜 나한테 잘라 달라는 거야?”
지훈은 입술을 씰룩이며 투덜대면서도 유나의 접시를 가져와 그녀의 스테이크를 잘라주었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늘 아침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에는 헤어, 메이크업 팀을 데리고 갔구나?”
지훈의 말에 하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어.”
지훈이 쯧쯧쯧 혀를 찼다.
“왜? 보기 좋기만 한데. 여자 친구를 위해서 회사 메이크업 팀을 부르는 남자친구라니. 얼마나 멋있어.”
옳지. 잘한다. 유나의 말에 하준이 눈이 빛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기는 개뿔. 결국에는 단독 외근 나가지 말라는 말까지 나왔잖아. 2인 1조 외근이라나 뭐라나.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2인 1조 외근이요?”
수아가 고개를 돌려 하준을 바라봤다. 설명을 원하는 눈치였다. 하준이 입을 열었다.
“2인 1조로 다니게 되면 어제 같은 위험 상황에서도 좀 더 빠르고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이. 그건 어렵죠. 다들 할 일들이 많은데 어떻게 매번 2인 1조로 다니겠어요.”
“정말로 어려운 일인지 내일부터 한번 시행해볼까요?”
“아니요. 하지 말아요.”
수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일은 단독 외근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 뿐이라고요.”
“그래도 혼자보다는 두 명이 있는 편이 좀 더…….”
“글쎄 괜찮다니까 그러네. 자꾸 이럴 거예요?”
수아가 미간을 좁히며 언성을 높이자 하준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나가 지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빠는 저런 팔불출이 되어 볼 생각 없어?”
갑자기 왜 이래? 느닷없는 물음에 지훈이 눈을 키웠다.
“한 번만이라도 김유나만을 위한 팔불출이 되어보란 말이야. 이 철벽 선생아.”
“…….”
말을 마친 유나는 거친 손놀림으로 눈앞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고, 지훈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