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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함정 (63/105)


63. 함정
2022.11.05.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하준의 자동차는 수아의 오피스텔 앞에 서 있었다.

자동차에 기대선 채 화보와도 같은 모델 포스를 풍기며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 하준이었다.


 
걸음을 서두른 수아가 하준의 앞에 다다랐다.


“왔으면 연락을 하지.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방금 왔습니다.”

말을 마친 하준은 급히 수아의 팔을 살폈다.


“오늘은 좀 어때요? 밤새 아프진 않았습니까?”

“전혀요.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아요.”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하준은 조수석 문을 열어 수아를 태우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 준 뒤, 차를 출발시켰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준이 말을 꺼냈다.


“오늘 부산으로 출장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창밖을 향하던 수아의 시선이 급하게 하준을 향했다.


“오늘이요?”

“네. 갑자기 잡힌 일정이라 미리 말할 수가 없었어요.”

“오늘 가면 언제 올라오는데요?”

“음. 가봐야 알 것 같긴 한데 일단은 2박 3일 정도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산이라니. 그것도 2박 3일씩이나.

3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못 본다는 생각에 수아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서두르면 내일 저녁에라도 올라올 수 있을 겁니다.”

하준이 수아를 흘깃 보며 말을 덧붙이자 수아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히 저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못 보는 대신 영상 통화하면 되죠.”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었다.

정면을 향하던 하준의 시선이 수아를 향해 움직였다.


“저 때문입니다.”

“네?”

“서두르려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요. 수아 씨를 못 보면 못 견딜 것 같으니까.”

순간 수아의 볼에 화르륵 열이 올랐다.


‘연애는 처음이라더니 설렘 포인트를 너무 잘 알고 있잖아.’

어쩐지 하준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요. 밥도 제때 잘 챙겨 먹고 틈틈이 휴식도 취하고, 그리고 잠도 잘 자고.”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수아의 당부에 하준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수아 씨가 이렇게 걱정해주니까 좋네요. 앞으로도 계속 걱정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좋다고 하니 걱정은 해주겠지만 걱정해야 할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럼요. 확실히 알아들었습니다.”

하준이 웃으며 수아의 왼손 위에 자신의 오른손을 포갰다.

*

회사에 도착하고 얼마 후 하준은 이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는 부산으로 출발했다.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가 지났을까.

수아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하준 씨랑 통화해야 하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안 가네.’

시간이 빠르게 흘러 3일이라는 시간이 어서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는데 야속하게도 시간은 평소보다 더디게 흘러갔다.

드디어 찾아온 점심시간.


“저는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요. 먼저 식사하세요.”

수아는 소중하게 휴대폰을 가슴에 품고는 비어 있는 회의실을 찾아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찾아낸 회의실. 수아는 주변을 살핀 뒤 곧장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아 씨.]

휴대폰 너머에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하는 동안 제 목소리 듣고 싶지 않았어요?”

[당연한 걸 뭘 묻습니까.]

“그럴 줄 알고 점심시간 되자마자 바로 전화한 거예요.”

[저도 지금 막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한발 늦었네요.]

“흠. 좀 더 분발하셔야겠어요.”

수아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일은 잘되고 있어요? 힘들지는 않아요? 밥은요? 점심 식사는 했어요?”

끊임없는 질문 세례 또 시작됐네.

연속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하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고, 늘 하던 일이라 힘들지 않습니다. 밥은 이제 먹으러 갈 거고요. 박 비서님이 맛있는 해물탕집을 알고 있다고 해서 가보려고 합니다.]

“잘됐네요.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어요. 저도 이제 점심 먹으러 가 봐야겠어요. 점심 먹고 또 전화할게요.”

[그래요. 수아 씨도 점심 맛있게 먹어요.]

통화를 마친 수아는 서둘러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모두가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마케팅팀 사무실.

검정 옷에 검정 모자에 검정 마스크까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춘.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모습의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던 남자는 이내 수아의 책상 위에 메모지 한 장을 내려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 배불러. 오늘 비빔밥 진짜 맛있지 않았어요?”

점심 식사를 마친 수아와 직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직원들은 식당에서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우겠다며 다 함께 탕비실로 향했다.


‘어? 저게 뭐지?’

직원들의 뒤를 따르던 수아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를 발견했다.

[문서 창고에서 작년 6월 마케팅팀 회의자료 좀 가져다주세요. -팀장-]

팀장님?

수아의 시선이 지훈의 자리를 향했다.

지훈은 오전부터 홍보팀과 회의를 한다며 자리를 비운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

수아는 포스트잇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서둘러 문서 창고로 향했다.

문서 창고로 들어선 수아는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적혀 있는 연도를 확인했다.

점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

달칵.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곳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오자 수아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거, 거기 누구 있어요?”

수아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준 씨랑 같이 있을 때는 이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빨리 찾아서 나가는 게 좋겠어.’

밀려드는 두려움에 수아의 눈과 손의 속도가 빨라졌다.


“6월 회의록. 6월 회의록. 아! 찾았다.”

마침내 찾아낸 회의록을 빼내던 바로 그때.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류들이 정리되어 있던 철제 앵글이 수아를 향해 쓰러졌다.


“꺄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앵글이 쓰러짐과 동시에 그 위에 정리되어 있던 수많은 서류뭉치까지 수아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수아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보았지만, 여자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온 힘을 다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각 문서 창고 앞을 지나가는 직원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듯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이제는 눈앞에 보이는 물건들의 형태가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수아의 시야에 저만치 앞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휴대폰이 들어왔다.

아마도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수아는 붙잡은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간신히 눌렀다.


[수아 씨.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휴대폰 너머에서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준……씨.”

[수아 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수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하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도와…… 주세요. 살려 주…….”

더 이상의 말은 잇지 못한 채 수아의 의식은 흐려져 갔다.


[수아 씨! 수아 씨! 무슨 일이에요. 수아 씨!]

 

*

현성백화점 부산점 회의실.

살려달라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수아와의 통화가 끊겼다.

하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화연결음은 들려왔지만, 끝내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하준은 급한 마음에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

“너 지금 어디야? 수아 씨랑 지금 같이 있어?”

지훈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하준은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다.


[나 지금 홍보팀이랑 회의하느라 홍보팀 사무실에 와 있는데? 수아는 갑자기 왜? 수아한테 무슨 일 있어?]

“모르겠어. 좀 전에 수아 씨랑 통화했는데 신음소리랑 도와달라는 소리밖에 안 들려.”

[도와달라는 소리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지금은 통화연결도 안 되고 있어. 빨리 수아 씨 좀 찾아봐. 나도 지금 바로 올라갈게. 지금 출발해.”

[야! 민하준!]

지훈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준은 박 비서를 향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수아를 찾으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야.”

휴대폰 액정을 멍하니 쳐다보던 지훈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비서님.”

[네. 민지훈 팀장님.]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짧게 용건만 말씀드릴게요.”

[네. 말씀하십시오.]

“아마 하준이가 차 키를 달라고 할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나중에 설명 드릴 테니까 절대 차 키 넘겨주시면 안 돼요.”

[네. 일단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훈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 비서님 차 키요. 차 키 주세요.”

하준의 모습에 박 비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평소 냉철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무언가에 홀린 듯 어지럽게 얽힌 시선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 키 주세요. 지금 당장 서울로 가야 합니다.”

“부회장님. 지금은 운전하실 상태가 아니십니다. 운전은 김 대리님이 하실 테니 자동차로 이동하시죠.”

박 비서가 차분하게 하준을 자동차로 이끌었다.

*

박 비서와의 통화를 마친 지훈은 서둘러 마케팅팀 사무실로 돌아와 수아를 찾았다.

사무실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시우 씨. 혹시 이수아 씨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때마침 탕비실을 나서던 시우에게 물었다.


“글쎄요. 아까 탕비실에서 커피 마시기로 했었는데 안 오시기에 다른 데 가셨나보다 했는데요.”

수아를 찾으려던 시우의 시야에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가 들어왔다.

메모를 확인한 시우가 곧장 지훈에게 메모지를 건넸다.

팀장이라고? 나는 이런 메모를 남긴 적이 없는데.

대체 누가 이런 메모를 수아에게 보낸 거지?

그렇다는 건 수아는 지금…….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지훈은 불안한 표정을 지워내지 못한 채로 문서 창고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서 있던 시우도 지훈을 따라 달려나갔다.

두 사람에게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 따윈 없었다.

계단을 통해 문서 창고로 향했다.


“수아야!”

“선배님!”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지훈과 시우가 들어섰다.

쓰러져 있는 철제 앵글과 어지럽게 뒤섞인 서류뭉치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앵글을 세우고 몇 개의 서류뭉치들을 치워내자 놀랍게도 그 속에 깔려 있던 수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옷 여기저기에는 앵글에 긁힌 상처들로 핏자국이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다.


“수아야 정신 차려봐! 수아야! 시우야. 빨리 119!”

“어? 어.”

지훈의 말에 시우는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아를 섣불리 옮길 수는 없었다.

지훈과 시우는 우선 수아를 덮치고 있는 서류뭉치들을 치워내기로 했다.

서류 뭉치들이 치워지자 수아의 몸의 상처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지훈의 중얼거림에 시우가 눈을 키웠다.


“뭐야? 그 메모 형이 남긴 거 아니었어?”

“말도 안 돼. 내가 그런 쪽지를 남길 리 없잖아.”

“그럼 누군가가 일부러 선배를 여기로 유인했다는 거야?”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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