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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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누구세요.
2022.11.08.
부산에서 출발한 하준의 자동차는 서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회의 날짜는 본사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박 비서는 부산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일 때문에 일정을 조율하느라 분주했다.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는 하준의 일정에서 다시 부산방문을 끼워 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출장도 2달 만에 겨우 시간 맞춰 내려온 건데.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홀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박 비서의 시선에 룸미러 속 하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그의 얼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당겨 문 입술을 얼마나 잘근거렸는지 하준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의아했다.
분명 밥을 먹고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단 몇 분 사이에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다니.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기에 박 비서는 그저 말없이 하준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적막을 깨고 하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됐어? 수아 씨는? 수아 씨는 찾았어?”
수아?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박 비서의 눈썹이 들썩였다.
박 비서는 하준의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아 씨는 찾은 거야?”
[어. 찾았어.]
“어디에서 찾았는데?”
[문서 창고.]
“문서 창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하준의 미간이 구겨졌다.
“거기엔 왜 간 건데? 네가 보낸 거야?”
[아니. 누군가 일부러 수아를 거기로 유인한 것 같아. 나를 사칭해서 메모까지 남겼더라고.]
“메모라니? 무슨 메모?”
[수아 책상 위에 문서 창고에서 서류를 찾아오라는 내용의 메모가 있더라고.]
일부러?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살려달라던 수아의 간절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면서 하준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수아 씨는? 많이 다친 거야?”
[지금 치료를 받는 중이라 잘 모르겠어. 어쨌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한국병원으로 바로 와.]
“그래. 알겠어. 내가 도착할 때까지 수아 씨 잘 부탁한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와.]
통화를 마친 하준이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박 비서님. 한국병원으로 빨리 가주세요.”
경직된 하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가 좀 더 빨리 전화를 해야 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오늘 출장을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수아가 혼자 아파하고 있을 동안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하준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준은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
한국병원.
치료를 마친 수아가 VIP 병실로 옮겨졌다.
“형. 수아 선배님 괜찮겠지?”
시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응. 괜찮을 거야.”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에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야말로 지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지훈은 잠들어 있는 수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수아. 부탁인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빨리 일어나 주라. 20년이나 기다렸는데 더는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지.’
지훈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던 그때.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지훈은 서둘러 병실 문을 나섰다. 시우도 그 뒤를 따랐다.
역시나 예상대로 발소리의 주인은 하준이었다.
하준은 지훈이 병실 문을 나서는 동시에 그의 앞에 다다라서는 다급하게 물었다.
“수아 씨는? 수아 씨 상태는 어떤데?”
“이마에 찢어진 부위 봉합은 잘 됐대. 문제는 뇌출혈인데. 그건 부기가 가라앉아야 알 수 있는 거라 경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하시더라. 일단은 깨어나는 게 우선이야.”
하준이 흥분하지 않도록 지훈은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직도 못 깨어난 거야?”
“응. 금방 깨어날 거라고는 하셨는데 아직이네.”
지훈이 문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들어가 봐.”
하준이 걸음을 옮겨 천천히 병실 안으로 들어갔고, 지훈은 병실 앞 의자에 앉았다.
“하준이 형 오늘 부산으로 출장 간 거 아니었어? 혹시 형이 연락한 거야?”
“어? 어.”
“아무리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는 하지만 사원 한 명이 다쳤다고 출장 갔던 부회장까지 올라올 필요가 있나?”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무려 부산과 서울인데.
시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난처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준이한테 수아는 그냥 사원 한 명이 아니거든.”
“그냥 사원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물었다.
“수아가 하준이 여자 친구라는 뜻이야. 두 사람 지금 사귀고 있어.”
형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그 사람이 수아 선배라고?
“아.”
시우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회사 사람들 아무도 몰라. 너도 모른 척해.”
“응. 알겠어.”
시우가 급하게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돌려 병실 문을 바라보던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 사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일단은 그 메모가 가장 의심스럽고.”
도대체 누가 그런 메모를 남긴 걸까.
지훈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칭해 수아를 유인했다는 사실에 큰 분노를 느꼈다.
“일단은 그 메모를 남긴 사람부터 찾아야겠지?”
“그래야겠지. 그런데 되도록 조용하게 진행해야 해. 시끄러워지면 수아한테도 하준이한테도 득 될 게 없어.”
“응. 그럼 수아 선배님은 하준이 형한테 맡기고 우리는 회사로 들어가자.”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병실 문이 열렸다.
“수아 깨어났어?”
지훈의 물음에 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아직도 못 깨어나는 거지. 걱정스러웠지만 지훈은 차마 하준이 보는 앞에서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금방 깨어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지훈은 하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덧붙였다.
“나랑 시우는 회사로 먼저 들어갈게. 아무래도 CCTV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사무실부터 문서 창고까지 빠짐없이 확인해봐. 그중에 의심 가는 사람들은 모두 예의주시하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수아나 신경 써.”
“그래 부탁한다.”
말을 마친 하준은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지훈의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시우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 시우한테 멋진 형을 선물해주고 싶어.”
20년 전 하준을 처음 소개받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형이라는 존재가 생겼던 그 날.
일반적으로는 느닷없이 생긴 형이라는 존재가 반가울 리 없을 테지만 시우는 달랐다.
“하준이 형. 만나서 반가워. 나는 민시우라고 해.”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면서
“좋은 동생이 되어줄게. 그러니까 형도 좋은 형이 되어줘.”
사랑스러운 다짐도 잊지 않았다.
예상과는 전혀 달랐던 시우의 반응에 현성과 혜선은 그동안 많이 외로웠나 보다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준이를 우리 호적에 올리는 건 어때요?”
그건 우연히 듣게 된 엄마와 아빠의 대화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골수를 기증해준 하준이라는 아이의 아버지가 그를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고, 부모님은 그런 그를 입양하고 싶다는 내용의 대화였다.
비록 6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시우는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아이였다.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준 하준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가족으로 맞이하는 것이라 걸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시우는 하준에게 좋은 가족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왔다.
항상 그가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왔었는데 드디어 20년 만에 그 바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중얼거리던 시우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사실 시우의 다행이라는 말속에는 또 다른 의미도 담겨 있었다.
바로 수아를 향한 자신의 마음.
입사 후 수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시우의 마음은 조금씩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여쁜 미소가 좋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좋았으며, 친절한 말투와 활기찬 목소리가 좋았다.
그런데 그런 수아가 온 가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형의 여자 친구라니.
시우는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수아에게 가기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우가 여러 가지 상념들에 빠져 있는 사이 지훈의 차는 회사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 회사 안은 수아의 사고 소식으로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가장 소란스러운 곳은 역시나 마케팅팀 사무실이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민준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게 말이에요. 수아 씨 성격에 누구한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했을 리도 없고.”
“에휴. 팔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야.”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까. 좀 무섭네요.”
그렇게 퇴근 시간이 가까운 시간까지도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지훈과 시우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 퇴근 시간입니다. 그만들 정리하시고 퇴근하시죠.”
“팀장님. 수아 씨는 좀 어때요? 많이 다친 겁니까? 도대체 누가 그런 겁니까?”
민준의 물음에 지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는 치료했고,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입니다. 그러니 괜한 오해들 하지 마시고 어서 퇴근들 하십시오.”
“아니 그래도…….”
팀원들 모두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는데.
“정 그렇게 퇴근하기가 싫으면 야근을 하는 게 어떻…….”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야근이라는 말 한마디에 사무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은 순식간에 썰물과 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단어 하나의 힘이 참으로 대단했다.
“일단은 보안팀부터 가보자.”
지훈과 시우는 서둘러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는 보안팀으로 향했다.
그 시각 수아의 병실.
“……음.”
굳게 닫혀 있던 수아의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가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아 씨! 정신이 들어요?”
소파에 앉아 있던 하준이 총알처럼 튕겨 일어났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
수아의 코앞까지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데 그녀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준은 일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다시 물었다.
“잘 봐 봐요. 저 누군지 모르겠어요?”
초점을 맞추려는 듯 미간을 잔뜩 구긴 수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