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허락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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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허락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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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허락은 필요 없어
2022.11.12.
“……누구세요?”
하준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큰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수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기억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 가서 의사 선생님 좀 불러올게요.”
하준이 문을 향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수아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입술.
“설마 지금 장난친 겁니까?”
마주한 하준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화를 참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에 수아는 빠르게 미소를 지워냈다.
“혹시 화났어요?”
“…….”
화났네. 화났어. 말없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준의 모습에 수아는 확신했다.
“미안해요. 저는 그냥 장난으로…….”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장난을 합니까?”
이런 상황? 그의 말을 되뇌던 수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그런데 하준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오늘 부산으로 출장 갔잖아요.”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하준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아까 문서 창고에서 통화했잖습니까. 기억 안 납니까?”
“문서 창고요?”
수아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수아 씨! 수아 씨! 무슨 일이에요. 수아 씨!]
기억을 잃기 전 들려오던 하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설마 저 때문에 올라온 거예요?”
“그럼 뭣 때문에 왔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저 때문에 부산에서 올라왔다고요? 진짜? 진짜로?”
목소리를 높이는 수아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는 듯 하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와달라면서요. 살려달라면서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제가 어땠을 것 같아요? 계속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뾰족하게 들려왔다.
어쩌지.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올라와서 화났나 봐.
“그,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내려가는 건 어때요?”
수아는 하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저더러 다친 수아 씨를 두고 일을 하러 가라는 겁니까?”
하준의 눈매에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 이게 아닌데. 수아는 그가 자신의 말을 오해한 것 같아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 저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올라왔을 테니까 미안해서 그러죠.”
“수아 씨가 왜 제 일까지 걱정합니까. 제가 그런 것도 해결 못 할 것 같아 보입니까?”
“…….”
수아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쩐지 주눅이 들어 고개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기죽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하준은 아차 싶었다.
“놀랐을 텐데 제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혹시 창고에서 일어났던 일 기억납니까?”
“음. 그러니까 그게.”
하준의 물음에 수아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에 밥을 먹고 사무실에 왔는데 책상 위에 지훈 팀장님의 메모가 있었어요.”
“지훈이는 그런 메모를 남긴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네? 그럴 리가요. 분명히 팀장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믿을 수 없다며 수아가 눈을 키웠다.
“지훈이에게 확인했습니다.”
말도 안 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누군가가 나를 일부러 그곳으로 불러냈다는 말이야?’
‘내가 누군가에게 그 정도로 원한을 산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누가 어째서 그런 일을 했다는 거지?’
“수아 씨. 수아 씨.”
“…….”
눈의 초점을 잃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수아는 자신을 부르는 하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아 씨!”
결국 하준이 수아의 어깨를 잡고 나서야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네? 네? 저 불렀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합니까?”
“아니. 그냥…….”
“범인은 무슨 수를 써서든 제가 잡을 겁니다. 그러니까 수아 씨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낫기나 해요.”
“네. 그럴게요. 남친 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애써 웃으며 대답은 했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안함까지 깨끗하게 지워낼 수는 없었다.
“누워서 좀 더 쉬어요.”
하준은 수아의 등을 받치고 있는 베개를 톡톡 두드렸다.
“저는 괜찮아요. 하준 씨야말로 급하게 올라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인제 그만 집에 가서 쉬어요.”
수아의 말에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집에 가라고요?”
“네. 아무래도 쉬기에는 집이 편하니까요.”
“저는 장소보다는 사람에 영향을 받는 편입니다.”
“네? 그게 무슨.”
수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자 하준이 곧장 말을 이었다.
“집보다는 수아 씨의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준이 말끝에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아니 신, 신발은 왜 벗어요?”
하준은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고는 곧장 침대 위로 올라와 수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VIP 병실의 침대는 두 사람이 눕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뭐예요. 올라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요.”
수아의 말에 예쁘게 입꼬리를 올린 하준이 천천히 몸을 움직여 수아의 귓가로 다가왔다.
“침대에 올라오는 건 허락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였지만 침대 위에서 들으니 어쩐지 야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꿀꺽. 수아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 진짜.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집에 가서 자요.”
수아가 살짝 하준을 밀어냈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누워만 있을게요. 입!”
하준은 빠르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는 이것 보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하아. 진짜.
수아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얕게 가로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낮게 가라앉은 하준의 목소리가 고요했던 병실의 적막을 깼다.
“수아 씨. 혹시 그거 알고 있습니까?”
“어떤 거요?”
수아가 고개를 살짝 꺾어 하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지금 누워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거요.”
무슨 말이지? 잠시 생각하다가.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수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 정말 그러네요. 생각도 못 했어요. 괜찮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어쩐지 대답을 망설이는 듯한 그의 모습에 수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아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이라도 빨리 나가요.”
하준은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수아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뭐하긴요. 병원에서 빨리 나가야 할 것 아니에요.”
하아.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당신은 내 걱정을 하는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준은 수아의 어깨를 붙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수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말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요. 저는 하준 씨가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준은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 조금 힘들긴 합니다.”
“…….”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고, 손발도 조금 떨리는 것 같고, 식은땀도 흐르는 게 확실히 정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아으. 정말. 진작 말을 했어야죠.”
수아가 타박하듯 말했다.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준의 얼굴에 어떤 결심이 드러났다.
“20년 동안 매일같이 도망만 다녔습니다.”
상처로 가득했던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요.”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있긴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니.
“수아 씨가 옆에 있어 준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내 곁을 지켜주기만 한다면. 그래만 준다면.
“제 곁에 있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준의 다정한 눈빛이 수아의 얼굴에 닿았다.
하아. 당신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짧은 한숨과 함께 수아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당신을 지켜줄 거니까.”
가슴을 울리며 들려오는 수아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심장으로 날아와 꽂혔다.
“고마워요. 상처를 벗어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볼게요.”
“열심히 노력할 필요 없어요. 하루하루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샌가 아물어 있을 테니까.”
시간은 바다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니.
“가끔 생각은 나겠지만 아. 예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지, 라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내가 그랬듯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
쪽. 수아가 하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바로 그때.
“야! 이수아! 어머나!”
요란하게 병실로 들어서던 다은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뒤돌아섰다.
“저. 다시 나갈게요. 하던 일마저 하세요.”
“아니요. 들어오셔도 됩니다. 흠.”
민망함에 헛기침하며 하준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은은 가늘게 뜬 눈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이내 수아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누가 그런 거야?”
수아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던 다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설마 김지…….”
“그,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누가 연락해줬어?”
수아가 급하게 다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준의 앞에서 김지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은 씨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제가 연락했습니다.”
지켜보던 하준이 말했다.
“연락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지금부터는 제가 있어도 되니까 하준 씨는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아니. 제가 있어도 되는데요.”
“어머.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 분이 무슨 그런 말을.”
다은의 말에 동의한다며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도 이것저것 시키기에 하준 씨보다는 제가 더 편할 거예요. 씻는 것도 도와줘야 하고. 어? 그럼 씻는 것까지 하준 씨가 도와주실래요?”
“아닙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오는 게 좋겠습니다.”
씻는 걸 도와주라니. 직구로 날아든 다은의 멘트에 하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반응이 귀여워 피식 웃은 수아가 말했다.
“아침에 올 필요 없어요. 회사일 다하고 천천히 와요. 다은이는 어차피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게 없어서 괜찮아요.”
“그럼 회사일 마치는 대로 올게요. 다은 씨, 수아 씨 좀 부탁합니다.”
“네. 수아는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업무 보고 오세요.”
하준은 그래도 다은과 함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병실을 나섰다.
하준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은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가 그런 것 같아?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없어?”
“짐작 가는 사람? 글쎄. 다른 사람한테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혹시 김지수 아니야?”
김지수. 사실 내가 회사에 있는 것을 제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기에 의심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로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하다가 문득.
“아! 복사기.”
그 사건으로 많은 직원 앞에서 그 창피를 당했으니 김지수 자존심에 큰 타격이 왔을 수도 있었다.
“복사기? 무슨 복사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은의 물음에 수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그녀를 범인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설마 그 일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 네가 하준 씨 여자 친구라는 걸 알게 된 게 아닐까?”
“뭐? 아니야 그럴 리가.”
“그건 모를 일이지. 너 대학교 때 생각 안 나? 그때도 민철이 때문에 다 알면서 너한테 일부러 접근했던 거잖아.”
하아. 이제 정말 잊고 싶은데.
“모르겠어. 어쨌든 하준 씨가 범인 찾아준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려보자.”
바로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