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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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반복
2022.11.15.
“어? 시우 씨.”
생각지 못한 시우의 방문에 수아가 눈을 키웠다.
“걱정돼서 와봤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워낙 뼈가 튼튼해서 별로 다치지도 않았어요.”
수아가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참! 시우 씨가 팀장님이랑 같이 저 도와주셨다면서요. 정말 고마워요.”
시우를 향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데.
“어머. 수아야 이분은 누구셔?”
시우가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다은이 물었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수아 선배님과 한 팀에서 일하고 있는 민시우라고 합니다.”
“시우 씨 부모님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아들이 있으시니.”
다은은 제 이상형에 가까운 시우의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야! 너는 갑자기 무슨 말을. 시우 씨한테 실례잖아.”
“칭찬하는 게 뭐가 실례야. 시우 씨 혹시 기분 나빴어요?”
“아니요. 기분 나쁘기는요. 오히려 감사하죠.”
시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식사는 하셨어요? 의사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수술한 게 아니라서 식사는 해도 된다고 하시던데.”
“아. 저는 괜찮…….”
“저는 아까 선배님 도와드리느라 못한 일을 마저 하느라고 아직 저녁을 못 먹었거든요.”
수아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시우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다지 식욕이 없어 거절하려던 수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 뭐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
“그, 그랬구나. 그럼 빨리 먹어야죠.”
그렇게 세 사람은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리 식당의 메뉴를 확인한 시우는 빨리 나으려면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면서 수아를 설렁탕집으로 이끌었다.
얼마 후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식당을 나섰다.
“시우 씨.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도와준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밥까지 얻어먹어서 어떻게 해요.”
“아니에요. 맛있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사실 여기엔 응원의 의미도 담겨 있거든요.”
빨리 나으라는 말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데.
“부회장님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별안간 불끈 쥔 주먹을 흔들어대는 시우의 모습에 수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지? 혹시 병원에서 하준 씨랑 마주쳤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안 맞는데. 뭐지? 그보다 어떻게 하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는 사이 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
“사람들은 저마다 비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비밀은 꼭 지켜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우는 안심하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웃음이었다.
“고마워요. 오늘은 진짜 정말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푹 쉬시고 얼른 나으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시우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뒤돌아 걸어갔다.
“수아야. 너는 정말 회사 다닐 맛이 나겠다. 매일 같이 저런 아기 사슴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웬 아기 사슴? 어딜 봐서 아기 사슴이라는 거야?”
“어머. 시우 씨 눈 못 봤니? 세상의 때라고는 요만큼도 묻어 있지 않은 맑고 깨끗한 아기 사슴의 눈망울이라고.”
“하아. 정말 못 말린다. 못 말려.”
수아와 다은은 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바라보고 있던 시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저예요. 어떻게 됐습니까?”
[네. 눈에 띄지 않게 조치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례비는 지금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시우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려나?”
“주책이다. 주책.”
수아와 다은이 실없는 농담과 함께 병실로 들어서는데.
“이제야 오네.”
느닷없이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를 향해 수아와 다은의 고개가 돌아갔다.
“김지수!”
목소리의 정체를 먼저 알아챈 건 다은이었다.
“너지? 네가 우리 수아 이렇게 만든 거지?”
너 잘 만났다. 다은이 사나운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정다은. 그 더러운 성격은 아직도 못 버렸구나?”
“뭐? 더러운 성격? 그래. 이 더러운 성격에 네가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수아는 가만히 두었다가는 진짜 사고를 칠 것 같아 다급히 다은의 팔을 붙잡았다.
“설마 내 병문안을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왔어? 할 말 있어서 왔으면 할 말만 빨리하고 가줬으면 좋겠는데.”
“그래. 나도 길게 있을 생각은 없어. 대신 너랑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지수의 시선이 다은을 향했다.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
“왜? 내가 있으면 못할 말이라도 있어? 그냥 해!”
숨길 게 뭐가 있냐며 다은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다은아.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줘. 잠깐이면 돼.”
수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은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오. 내가 아픈 수아 때문에 참는다. 빨리하고 꺼져라. 네 얼굴 오래 보고 싶은 사람 여기에 아무도 없으니까.”
다은은 문을 거칠게 열고는 병실을 나섰다.
“자. 이제 얘기해봐. 둘이서만 해야 할 얘기가 뭔지.”
“그래.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니까. 짧게 말하고 갈게.”
그래. 무슨 얘기 인지 들어나 보자. 수아는 굳은 얼굴로 지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하준 오빠랑 사귀니?”
지수의 질문을 듣는 순간 수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른 수아는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너한테 말해줘야 할 이유 없다고. 네가 아무리 하준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말이야.”
“우리 곧 결혼할 거야.”
“뭐? 결혼?”
“어머 몰랐니? 우리는 집안끼리 결혼이 약속되어 있는 사이야. 하준 오빠가 그건 말하지 않았나 보네?”
결혼이 약속된 사이라니. 그에게서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지수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도 오빠랑 좋은 시간 보내라는 회장님의 지시 때문이었는데. 하준 오빠가 아직 너한테 말을 못 했나 보구나. 아니. 할 필요가 없는 건가?”
“…….”
“넌 어쩜 대학생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니? 그때나 지금이나 주제를 몰라. 이제 알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이지.”
지수가 뱉어낸 말들이 수아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아니야! 흔들리지 마.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때처럼 흔들리지 않을 거야.
수아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네 말대로 그때는 철없던 대학생이라 뭣도 모르고 민철이를 놔줬었지.”
흔들리는 마음과는 달리 목소리는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때의 내가 아니거든.”
순간 수아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주제?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주제가 그리 대단하진 않지. 하지만 민철이도 하준 씨도 잘난 너보단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은데. 안 그래?”
“너! 지, 지금 뭐라고 그랬어!”
수아의 말이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지수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당황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네가 나보다 나은 거라고는 돈밖에 없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해버렸으니 속이라도 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말하는 내내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하! 사랑 좋지. 그래서? 너의 그 대단한 사랑이 하준 오빠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데?”
악에 받친 듯 지수의 얼굴이 거세게 일그러졌다.
“넌 하준 오빠랑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얼마짜리인지는 알고 있어?”
“뭐?”
“여기에 우리 진성 그룹이 얼마를 투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냐고.”
수아의 동공이 또다시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내 전화 한 통이면 그 돈 다시 회수할 수도 있어.”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수아가 미간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
“이 어마어마한 금액의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질지 아니면 무산될지는 네 결정하나에 달렸다는 소리야.”
딱딱하게 굳어버린 수아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하준 오빠를 계속 만나겠다면 나는 이 프로젝트 엎을 생각이야. 그럼 네가 그렇게 사랑한다던 하준 오빠는 어떻게 될까? 회장님 눈 밖에 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하아. 돌고 돌아 또다시 제자리다.
빌어먹을 운명 따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던 지난날의 결심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를 놓아야 하는 걸까. 하준 씨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정말 지수가 돈을 회수하겠다고 한다면?
그로 인해 프로젝트가 무산되어버린다면?
나 하나 때문에 회장님과 하준 씨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 들어찬 수많은 상념이 서로 부딪히고 얽히면서 끔찍한 두통을 만들어 냈다.
“김지수. 너야말로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남자 하나를 갖기 위해 온갖 짓을 해대는 너란 인간. 정말 지긋지긋하다.”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하준 오빠만 붙잡을 수 있다면.”
“혹시 하준 씨의 돈 때문이니?”
“……뭐?”
“나한테 민철이를 놓아달라던 그때 네가 그랬었잖아. 돈 때문이라고. 이번에도 그것 때문이냐고 묻는 거야.”
잠깐 말을 망설이던 지수가 이윽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겠니?”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진성과 사돈을 맺을 자리에 성한 그룹이랑 현성 그룹이 비교가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민철이와 결혼하지 않았던 거구나. 하아.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랑보다 돈이 더 중요한 게 이쪽 세상이야. 하긴 뭣도 없는 네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니?”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상. 결국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래서? 너는 어떤 결정을 내릴 건데?”
지수의 물음이 이어졌다.
“이대로 하준 오빠랑 사랑 타령하다가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걸 지켜볼래? 아니면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하준 오빠를 놓아줄래?”
정말 미치게 저주스럽다. 너란 인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 대신 너무 길게 끌지는 말아줘. 내가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아서 말이야.”
숨겨지지 않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수아는 애써 마음을 내리눌렀다.
“분명히 말하는데 만약 내가 하준 씨를 떠난다면 그건 순전히 하준 씨를 위해서야. 네 협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래. 그렇다고 치자.”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리던 지수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래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네가 하준 오빠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지 않니?”
숨겨지지 않은 비아냥거림이 지수의 얼굴에서 묻어났다.
“할 말 끝났으면 그만 가줄래? 이래 봬도 내가 환자거든.”
“그래. 이만 갈게. 대답은 되도록 빨리해주길 바라.”
빨리 꺼져줘. 제발.
“그럼 몸조리 잘하고. 다음에 또 보자.”
지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병실을 나섰다.
잠시 후. 병원 밖에서 분노를 가라앉힌 다은이 병실로 돌아왔다.
“야! 저게 뭐라고 하디?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인 거야?”
그래. 차라리 헛소리였으면 좋겠다. 어이없음에 한 번 웃어버리고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게.
“별일 아니야. 회사에서 자꾸 마주치지 말자고.”
“하! 그 얘기를 꼭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한테 일부러 찾아와서 해야 한다니? 야!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응. 그래야지.”
수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