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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거짓말처럼 (67/105)


67. 거짓말처럼
2022.11.19.



 


“다은아. 자?”

이미 누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아직. 왜? 잠이 안 와?”

“아까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잠이 안 오네. 우리 수다 떤 지도 오래됐는데 얘기 좀 하다가 잘까?”

“그럼 그럴까?”

금방이라도 많은 이야기가 오갈 것 같았는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정적을 깨고 다은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일. 지수가 한 짓 맞지?”

“……모르겠어.”

수아가 말끝을 흐렸다.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널 모르냐? 너도 사실은 범인이 김지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

정곡을 찔린 듯 수아의 입술이 말을 잃었다.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참 대단하게도 그 메모가 지훈이 보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온몸의 감각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수.

다은의 말처럼 지수가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계속 그의 곁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면 그 무서운 집착으로 다음에는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향한 화살이 잘못 날아들어 혹시라도 그를 다치게 하면 어쩌지.

그게 아니더라도 수준이 맞는 결혼을 통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의 발목을 내가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당장에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평생 동안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원망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자신 없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떠나는 게 맞는 걸까.

목까지 차오른 깊은 절망감 속에서 혼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드르렁. 드르렁.

다은의 코 고는 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참 잘도 잔다.”

아무렇지도 않게 정곡을 찔러대더니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잠들어 버릴 줄이야.

침대에 기대앉아 다은이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아가 피식 웃었다.

VIP 병실의 보호자 침대가 꽤나 큼직해서 다은이가 불편하지 않게 잠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수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은의 발 아래에 밀려나 있는 이불을 올려 덮어주고는 머리를 식힐 겸 병실 문을 나섰다.

로비의 한쪽은 전면이 유리여서 창문에 비친 밤하늘이 마치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수아는 시선을 창밖에 두고 반짝이는 별과 달을 바라봤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일까.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잡아야 할까. 아니면 그를 위해 놓아주어야 할까.


‘아. 하준 씨 목소리 듣고 싶다.’

멍하니 하준을 떠올리던 수아가 번뜩 정신을 차린 건 이미 그의 이름을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 뒤였다.


[수아 씨?]

그토록 듣고 싶던 하준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하준 씨. 혹시 제가 깨운 거예요?”

[아니요. 잠깐 서류 좀 보고 있었어요.”]

“다행이네요. 혹시나 자는데 깨웠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 걱정하지 말고 깨워도 되니까 언제든 전화하고 싶을 때 해요. 24시간 대기조처럼 기다릴게요.]

“어? 후회할 텐데. 술 먹고 새벽에 전화해서 징징대면 어떻게 하려고.”

[후회라니. 당연히 저한테 전화해야죠. 설마 다른 사람한테 하려고 했습니까?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여간 무슨 말을 못 한다니까. 알겠어요. 맨정신일 때도 술에 취했을 때도 무조건 하준 씨한테만 전화할게요. 됐죠?”

[네.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 안 자고 뭐 합니까?]

“아까 너무 많이 잤는지 잠이 안 오네요.”

[양을 세어서라도 자야 하지 않겠어요? 잠을 많이 자야 빨리 낫는 건데.]

“네. 안 그래도 양을 세어볼까 하던 참이었어요. 하준 씨도 어서 자요.”

[목소리가 안 좋은데.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뭘 알고 묻는 건지. 하준의 물음에 괜히 뜨끔했다.


“아니에요. 그냥 목소리가 가라앉은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혹시 어디 아픈 데 있으면 다은 씨한테 바로 말해요.]

다은이한테?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다은이는 꿈나라에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답니다. 피식 웃다가.


“보고 싶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네?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어서 자라고요. 저도 이제 자야겠어요.”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수아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요. 잘 자요. 그럼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그렇게 하준과의 통화는 끝이 났지만, 수아는 병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눈이 감기고, 까맣게 변한 눈앞으로 그와의 추억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산에서 처음 만났던 날.

편의점에서 함께 일했던 날.

아픈 그를 간호했던 날.

그와의 첫 키스 날.

하나하나 추억을 되새기며 하준의 모습을 떠올리던 그때,


“수아 씨!”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수아 씨.”

한 번 더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하준 씨?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몇 번.

사라지기는커녕 그는 점점 더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진짜 하준 씨구나.


“헉. 헉. 수아 씨. 저 왔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건지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호흡을 내쉬는 건지 하준은 상체를 구부린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 자고 여긴 왜 왔어요?”

수아가 서둘러 일어나 하준의 등에 손을 올렸다.

아. 손으로 전해지는 그의 떨림에 수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직도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도대체 여기는 왜 온 건지.


“하준 씨. 괜찮아요?”

수아의 물음에 하준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하아.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 질 거예요.”

하준은 연신 깊은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조절하려 애썼다.

어떻게 하지. 안절부절하던 그때. 불현 듯 기억하나가 수아의 뇌리를 스쳤다.


[수아 씨가 옆에 있어 준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아는 망설임 없이 하준을 와락 껴안고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저 여기 있어요. 하준 씨 옆에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숨 쉬어요.”

하아. 하아.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뒤죽박죽 엉켜있던 그의 호흡이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들어 할 거면서 대체 여긴 왜 왔어요.”

“보고 싶다면서요. 보고 싶으면 봐야 하는 겁니다.”

아. 내 작은 혼잣말이 들렸나 보다.


“미안해요. 괜한 말을 해서 하준 씨를 힘들게 했네요.”

“미안하긴요.”

“…….”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신나서 달려왔는지 알면 아마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할 걸요.”

이제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하준은 부드럽게 웃었고, 이내 수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창밖에 펼쳐진 밤하늘로 향했다.


“이렇게 좋은 거 혼자 보기 있습니까?”

“그러게요. 이렇게 좋은 거 혼자만 봤네요. 제가.”

“괜찮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같이 보면 되니까요.”

하준이 고개를 돌려 수아와 시선을 맞췄다.


“키스하고 싶은데. 오늘은 수아 씨가 아프니까 참는 겁니다.”

“저 별로 안 아픈데요? 안 참아도 돼요.”

수아가 입술을 쭈욱 내밀며 쪽쪽 소리를 냈다.


“지금은 진통제 때문에 안 아픈 겁니다. 기억 안 나겠지만 여기 큰 반창고가 붙어 있는 데는 꿰맨 겁니다.”

하준이 수아의 머리 위쪽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가리켰다.


“오늘은 제가 온 힘을 다해 참아보겠습니다. 대신 수아 씨 다 낫는 날엔 저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 뭘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때 가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그날은 오늘 참았던 것까지 두 배로 보상받을 겁니다.”

하준은 입술 가득 미소를 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수아 씨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너무 좋네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수아의 숨소리가 일정한 속도에 맞춰 들려왔다. 아마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준은 혹시나 그녀가 깰까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서둘러 병실로 향했다.

침대에 수아를 내려놓고 돌아서려던 하준이 걸음을 멈췄다.


‘잠깐인데 괜찮겠지.’

하준은 곤히 잠든 다은을 슬쩍 쳐다보고는 살며시 수아의 옆에 누웠다.

다은보다 더 일찍 일어나 병실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들의 밤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눈부신 아침 햇살에 다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수아야. 잘 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수아의 침대로 걸어오던 다은은 침대에 하나가 아닌 둘이 있음을 발견했다.


“뭐야. 하루를 못 견디고 쪼르르 달려온 거야? 아이고.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다은은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는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으음…….”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밀려 올라가던 수아의 눈꺼풀이 번뜩 뜨였다.

꿈이 아니었구나.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달려와 준 사람. 내 사람.

수아는 아직 잠들어 있는 듯한 하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맞대었다.

순간 하준의 눈이 떠지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이거 유혹입니까?”

“네. 유혹입니다. 넘어와 주시겠습니까?”

“모르시나 본데 이미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더 넘어갈 게 남아 있어 보입니까?”

하준이 수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웃었다.


“아. 오늘은 진짜 같이 있고 싶다.”

수아가 하준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으며 말했다.


“오늘은 회사 안 가면 안 돼요?”

수아의 말 한마디에 총알처럼 튕겨 일어난 하준이 급히 휴대폰을 잡았다.


“왜요? 뭐 하려고요?”

수아가 급히 그의 휴대폰 액정을 막았다.


“오늘은 출근을 못 할 것 같다고 전화할 겁니다.”

푸핫. 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무슨 말을 못 해.”

“저는 농담 아닙니다. 저 오늘 월차 쓸 겁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월차를 쓰면 어떻게 해요. 그런 건 미리 써서 제출했어야죠.”

“누구한테 미리 제출을 합니까?”

아. 이 남자 부회장이었지.

하준의 말에 아차 싶었는지 수아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쓰는 건 안 되죠.”

“안 될 거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안 쓴 연차들만 합쳐도 1년은 회사에 안 나가도 될 겁니다.”

이미 마음을 먹었다는 듯 그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렇게까지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이 남자와 작정하고 사랑을 해야겠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같이 놀아요. 그 대신 나중에 저 때문에 회사에 일 생겼다고 원망하기 없기에요.”

수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준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박 비서님. 오늘은 제가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급한 건 아니면 연락도 자제해 주시구요. 나머지 결재 건은 내일 처리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하준의 시선이 수아를 향했다.


“우리 이제 뭐 할까요?”

기대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잠시 후.


“수아 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하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


“오늘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서요.”

“아니. 그래도 이건.”

두 사람은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실랑이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 밖을 나온 건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평범한 데이트를 하자는 수아의 말에 일단 병원을 나서긴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요. 병원에는 신나게 놀고 저녁에 돌아오면 되죠.”

“아.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수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하준의 손을 붙잡아 계단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결국 하준은 그녀의 이끌림을 따라 지하철 안으로 들어섰다.

신기하고 낯선 지하철의 모습에 하준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준 씨 혹시 지하철 처음 타 봐요?”

“네. 밖에서만 봤지 안에 들어와 본 건 처음입니다.”

“그럼 길 잃어버리지 않게 여자 친구 손 잡고 잘 따라와요.”

수아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하준은 그런 그녀의 작은 손을 꼬옥 붙잡았다.


[지금 당고개, 당고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데이트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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