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시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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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시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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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시계의 의미
2022.11.22.
지하철의 문이 열리자 많은 사람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수아가 걸음을 떼려던 순간 불쑥 나타난 하준의 손이 수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조심해요. 부딪히지 않게.”
하준은 수아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 안. 하준의 두 팔 사이 공간에 갇힌 수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쩌죠? 처음부터 너무 난코스네요.”
출근 시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를 지옥철로 떠민 것 같아 내심 미안했다.
“상관없습니다.”
“정말요? 지금부터는 이것보다 더 힘들 텐데도?”
“정말요. 어디를 가든 수아 씨와 함께라면 행복할 테니까요.”
귓가에 흘러든 하준의 목소리에 수아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실없이 너무 좋아하는 건가 싶어 애써 입꼬리를 내리누르려는데 하준이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학로요.”
“대학로요?”
하준이 눈을 키우며 되물었다.
대학로라면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와 음식점들. 그리고 다양한 공연장이 있는 곳.
그 인파 속에서 수아를 어떻게 지켜야 하나. 하준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이번 역은 혜화. 혜화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대학로로 가실 분은 혜화역 1번 출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에 수아는 들뜬 얼굴로 하준을 바라봤다.
“우리 이번에 내리면 돼요.”
“네.”
“대학로 못 가본지 진짜 오래됐는데. 하준 씨는 대학로 와본 적 있어요?”
“아니요. 와본 적은 없습니다.”
순간 수아의 표정이 굳었다.
지하철도 타본 적이 없고, 서울에 살면서 그 흔한 대학로 한번을 와본 적이 없단다.
도대체 이 남자는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상처로 가득한 과거에 갇혀 일만 하고 살았을 인생.
짐작은 했었지만 새삼 그의 인생이 가엽고 안쓰러웠다.
힘들었을 지난 시간을 보상받으면서 앞으로는 행복해야 할 텐데. 내가 더 힘들게 하면 어쩌지.
불현듯 찾아든 걱정에 수아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겁니까?”
수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준이 물었다.
“네?”
“수아 씨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 아니에요. 너무 오랜만에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타서 그런가. 멀미 하나 봐요.”
하준의 차로 출퇴근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동안 잘만 타고 다녔을 지하철에서 멀미라니.
누가 믿겠냐는 생각으로 하준을 올려다본 수아는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의심 없이 믿어주리라는 것을.
“빨리 내려야겠습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하준은 또다시 수아를 품에 안은 채로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다다른 대학로 입구.
평일 오전이었지만 대학로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정말 사람들이 많네요.”
인파에 놀란 하준이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그쵸? 사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시간에 저 사람들은 출근도 안 하고 왜 여기에 있을까 하는 생각.”
수아의 시선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했다.
“아무리 봐도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떤 직업을 가진 걸까.”
엉뚱한 그녀의 말에 하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도 회사원인데 지금 여기 와 있잖습니까. 저 사람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겠죠. 월차든 병가든. 아니면 백수일 수도.”
“아! 그런가?”
별 뜻 없이 뱉은 하준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수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변한 수아의 표정을 바라보던 하준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표정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은 늘 그랬듯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오늘 뭐 하면서 놉니까? 이렇게 나와 본 게 처음이라 완전 기대되는데요. 이렇게 기대해도 괜찮은 겁니까?”
“네. 아마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수아가 손가락으로 오른쪽 거리를 가리켰다.
“첫 번째 코스는 맛집 탐방이에요. 떡볶이 먹으러 갑시다!”
수아는 활짝 웃으며 하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떡볶이집.
“여기 떡볶이집이 엄청난 맛집이래요. TV에도 여러 번 나왔다고 하던데요?”
가게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연예인들의 사인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정독하듯 메뉴판을 살피던 수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장님.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튀김 1인분. 사이다 1병 주세요.”
주문을 마친 수아가 젓가락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는 테이블 위를 두드리며 발을 굴렀다.
그 모습은 마치 음식이 나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얼마 후 테이블 위에 주문한 메뉴가 놓였다.
“너무 맛있겠다. 그쵸?”
수아는 떡볶이를 덮고 있는 치즈를 동그랗게 돌리더니 떡과 함께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하준을 향해 내밀었다.
“하준 씨 아 해봐요. 아.”
수아는 하준이 상체를 기울이며 다가와 입을 벌리자 준비한 떡볶이를 넣어주고는 반응을 살폈다.
“어때요? 맛있어요?”
“네. 조금 맵긴 한데 맛있습니다.”
하준도 수아가 했던 방법을 따라 떡볶이와 치즈를 적당히 섞어 수아에게 먹여주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먹여주며 순식간에 떡볶이를 해치운 두 사람은 다음으로 한 옷가게를 찾았다.
“어머. 이거다. 이거 딱 하준 씨 옷이네요.”
그녀의 손에 들린 옷은 호피 무늬 셔츠였다.
‘저게 나한테 딱이라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하준이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옷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세상 화려한 호피 무늬 원피스였다.
“그럼 이건 딱 수아 씨 거네요. 잘 어울립니다.”
장난기 가득한 하준의 웃음에 수아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다.
“우리 서로한테 입히고 싶은 옷 한 벌씩 찾아서 여기 거울 앞에서 만나는 거 어때요?”
“네. 좋습니다.”
한동안 하준에게 어울릴 만한 옷들을 고르던 그때. 수아의 귓가에 누군가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저기 저 남자 진짜 잘생겼지? 연예인인가? 키를 보면 모델 같기도 하고.”
“그러게. 저 비주얼이면 일반인이 아닌 건 분명하지.”
“여자 친구 있으려나? 저렇게 완벽한 사람들이 의외로 여자 친구는 없던데.”
“없으면 왜? 네가 대시라도 해보게?”
“못할 건 뭐야. 해볼 수도 있지.”
수아는 굳이 그녀들의 시선을 쫓지 않아도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여간 저 완벽한 외모와 비율은 어딜 가도 눈에 띄는 게 문제란 말이지. 감출 수가 없네. 감출 수가 없어.’
수군거리던 여자 중 한 명이 하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수아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하준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야. 이 옷 어때? 우리 자기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치?”
말은 하준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수아의 시선은 하준에게 다가서려던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저 남자 여자 친구인가 봐.”
여자들은 당황해하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안심하며 하준을 향해 돌아서는데.
“수아 씨 혹시 지금 저한테 자기라고 한 거예요?”
놀랐는지 하준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차. 저 여자들한테 보여준다는 게 너무 당당하게 자기라고 불러버렸네.
“실수예요. 실수로 말한 거니까 그냥 잊어버려요.”
“왜 잊어버립니까. 저는 그 호칭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됩니까?”
하준의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이번에는 수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실수였다니까요. 이제 그만 보고 빨리 나가요.”
수아가 서둘러 옷가게를 빠져나갔고, 그런 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준이 큰소리로 외쳤다.
“자기야. 같이 가야지.”
잠시 후.
하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던 수아의 걸음이 어느 시계매장 앞에서 멈춰 섰다.
빤히 매장 안을 들여다보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같이 들어가서 봐요.”
매장 안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있었지만 수아는 망설임 없이 커플 시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은색과 로즈골드 색상으로 디자인된 커플 시계를 꺼내 들었다.
“반지 대신 시계로 맞추는 겁니까?”
“아니요. 반지는 다음에 맞추는 거로 하고. 이 시계는 하준 씨한테 선물로 주고 싶어서 사는 거예요.”
수아는 고른 시계를 들고 계산대로 다가갔다.
“포장해주세요.”
바로 착용하면 될 것을 왜 포장을 하는 건지. 하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쁘게 포장된 시계를 들고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아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머리가 어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몸을 움직인 것이 무리가 된 듯했다.
하준을 붙잡고 있는 수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아 씨?”
갑작스럽게 느껴진 힘에 하준이 고개를 돌렸고,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수아를 발견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잠깐 어지러워서요.”
“택시 잡을게요. 빨리 병원으로 갑시다.”
“아니.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수아를 바라보던 하준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제 잘못입니다. 아무리 수아 씨가 나오자고 했어도 이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 잘못이에요.”
“사람 미안해지게 왜 그래요. 너무 오랜만에 나온 거라 제가 흥분해서 그런 거예요.”
“그래도 이제는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수아는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그의 걱정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알겠어요. 이제 들어가요. 대신 저기 카페에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요.”
아. 안 되는데.
“커피 한 잔 만요. 딱 한 잔. 네?”
미간을 좁히며 망설이는 하준을 향해 수아가 검지를 세우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커피만 마시고 바로 돌아가는 겁니다.”
“네. 그럼요. 커피만 마시고 곧바로 돌아가겠습니다.”
결국 하준은 수아의 손에 이끌려 카페로 들어갔다.
서로의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수아가 포장된 시계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준 씨를 위한 선물이에요. 뜯어봐요.”
“아까 매장에서부터 하지 않고 굳이 왜 포장을 한 겁니까?”
“선물이니까요. 자고로 선물이라 함은 포장지를 뜯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고요.”
그건 또 무슨 논리인지. 하준은 수아의 엉뚱한 논리에 피식 웃고는 곧장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포장지를 벗겨내자 빛을 머금은 듯 반짝거리는 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 이리 줘 봐요.”
하준이 수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아는 하준의 손에 채워진 시계를 풀어내고는 커플 시계를 채워주었다.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 그리고 행복했던 시간을 모두 이 시계에 담아두고 싶어서.”
이것이 하준에게 시계를 선물한 의미였다.
“시간을 담아둔다.”
하준은 중얼거리며 시계의 의미를 곱씹었다.
“의미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지금까지의 시간과 지금부터의 시간을 모두 담으면 되겠네요.”
수아의 손목에 시계를 채우는 하준의 입꼬리가 예쁘게 밀려 올라갔다.
‘지금부터의 시간…….’
행복해하는 하준과는 달리 그를 바라보는 수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수아와 하준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만 더 여기에서 자면 안 됩니까? 걱정이 돼서 그래요.”
“안 돼요. 오늘은 집에서 편하게 자요.”
“여기가 집보다 더 편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겁니까.”
자꾸만 억지를 부리며 떼를 쓰는 하준의 모습에 수아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하준 씨한테 자꾸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자꾸 저 미안하게 만들 거예요?”
“…….”
그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는데. 하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은 씨한테 바로 전화하는 겁니다. 절대로 혼자 자면 안 돼요. 알겠죠?”
“네. 네. 걱정은 이제 그만하시고 어서 집으로 가시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하준의 모습이 사라지고 수아는 곧장 병실로 돌아왔다.
수아는 침대 위에 봉투 하나를 올려두고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