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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제발 돌아와 (69/105)


69. 제발 돌아와
2022.11.26.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하준이 수아가 선물한 시계를 손목에 차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의 전화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너 혹시 지금 수아랑 같이 있어?]

“아니. 나는 집이고 수아 씨는 병원에 있지. 그건 왜?”

[병원에 없다는데?]

“뭐? 병원에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간호사가 링거 교체 때문에 병실에 갔는데 환자가 없더래. 혹시 어디 있는지 아냐고 원장님께서 전화하셨어.]

“화장실이나 병원 근처에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갔겠지.”

[잠깐 가는데 환자복까지 벗어놓고 갔다고?]

“……!”

환자복을 벗어놓고 갔다는 말에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럴 리 없는데. 어제 분명 병원까지 데려다 줬는데.”

하준은 수아에게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빠르게 달려 도착한 한국병원. 하준은 병실을 향해 달렸다.

거칠게 열고 들어간 병실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와 그 위에 놓여 있는 봉투였다.

하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보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잠깐 하준 씨 곁을 떠나요.

하준 씨 옆에 있으면 너무 행복해서 어쩐지 이기적인 결정을 내릴 것 같아 두려워서 도망가는 거예요.

미안해요. 이런 비겁한 나라서.

우리의 시간을 담아둔 시계 잘 간직해줘요. 사랑해요.]

떠난다고? 지금 나를 떠나겠다는 거야?

편지를 들고 있는 하준의 손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그녀의 편지에 하준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숨이 막혔다. 내쉬는 호흡, 들이쉬는 호흡.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하아. 하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거친 숨을 들이쉬던 그때.


“민하준!”

“형!”

병실 문이 열리며 지훈과 시우가 뛰어 들어왔다.

지훈의 시선이 비어 있는 침대를 향했다.


“수아는? 수아는 어디 간 거야?”

“…….”

지훈에 물음에 하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준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발견한 지훈은 서둘러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거 수아가 써놓고 간 거 맞아? 왜 떠난다는 건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건데.”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어.”

초점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하준을 바라보던 시우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가방 속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그게 뭐야?”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물었다.


“범인은 분명히 수아 선배를 찾아올 것 같았거든. 그래서 미리 사람을 좀 붙여놨었어.”

시우의 말에 하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의심스러운 사람이 찾아오면 대화 내용을 녹음해달라고 부탁해놨었거든. 뭐라도 녹음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시우는 서둘러 노트북에 카메라 메모리칩을 꽂았다.


[우리 곧 결혼할 거야.]


[너의 그 대단한 사랑이 하준 오빠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데?]

날카로운 김지수의 목소리 뒤에 들려오는 수아의 목소리.


[분명히 말하지만 만약 내가 하준 씨를 떠난다면 그건 순전히 하준 씨를 위해서야. 네 협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던 하준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


“김지수 도대체 왜…….”

김지수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하준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문을 향해 발끝을 돌렸다.


“어디 가려고?”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하준의 모습에 지훈은 급히 그를 붙잡았다.


“어디라니! 당연히 김지수한테 가야지!”

“지금 가서 뭘 어쩌려고?”

“왜 이런 거짓말을 했는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물어봐야 할 거 아니야!”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하준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갈라졌다.


“이렇게 흥분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흥분 가라앉히고 우선은 다은이한테 연락받은 게 있는지 물어보자. 김지수는 그다음에 찾아가도 늦지 않아.”

지훈은 서둘러 다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은의 집 앞 카페.


“다은 씨! 수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

하준은 다은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저도 아침에 문자로 연락받은 거라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생각할 게 있어서 잠깐만 다녀오겠다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만 보내왔어요.”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없음에 다은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금방 돌아온다고 했다고요?”

“네.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서.”

하아. 믿었던 다은에게서도 그녀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하준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수아가 지수에 대해 말한 건 없어?”

옆에 앉아 있던 지훈이 녹음 내용을 떠올리며 물었다.


“지수요? 지수가 왜요? 앗. 그럼 혹시 그날 수아한테…….”

자신을 내보내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응. 수아가 떠난 게 김지수 때문인 것 같아서.”

“하아.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다은이 그날의 일을 후회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탓이 아니야. 김지수 탓이지.”

지훈이 다은의 시무룩하게 축 처진 다은의 어깨를 토닥였다.


“혹시 수아한테 연락 오면 우리한테 바로 좀 알려줄래? 너한테는 금방 연락을 해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네. 그럴게요. 연락 오면 어떻게 해서든 어디 있는지 알아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은 씨. 부탁할게요.”

하준과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

TF팀 사무실에 들어선 박 비서의 시선이 지수를 향했다.


“김지수 씨. 부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박 비서의 말에 지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준 오빠가요? 무슨 일로요?”

하준 오빠라니. 공사 구분을 하지 않는 지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박 비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가셔서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빠진 기분이 말투가 되어 무심결에 튀어나왔다.


“네. 그러죠.”

지수 또한 박 비서의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 듯 그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회장님. 김지수 씨 오셨습니다.”

박 비서가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네 들여보내세요.”

박 비서가 문을 열자 지수는 보란 듯이 당당하게 걸으며 부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부회장실 안에는 지훈과 하준이 앉아 있었다.


“오빠. 나 불렀다며? 무슨 일이야?”

“앉아.”

평소에도 그리 살가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좀 더 차갑게 들려오는 하준의 목소리에 지수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로 지수가 소파에 다가와 앉을 때까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잠시 후 지수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소파에 앉았고, 그와 동시에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지수.”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수는 뒷골이 서늘해졌다.

바닥을 향하던 하준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이윽고 그의 시선과 지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하준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지수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가슴 가득 들어찬 분노를 여과 없이 비추고 있었다.


“오, 오빠 왜 그래? 사람 무서워지게.”

“무서워?”

“그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안 무섭겠어?”

“하!”

순간 하준의 입술 사이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거짓말할 때는 무섭지 않고, 고작 이렇게 쳐다보는 게 무섭다니.”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아 씨한테 내가 너와 결혼할 사이라고 거짓말할 때는 무섭지 않았냐고!”

갑작스러운 고함에 지수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오빠가 알고 있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이수아가 말했나?


“뭐,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결혼하면 되는 거잖아. 우리가 결혼하면 사실이 되는 거잖아.”

“김지수!”

하준이 서둘러 지수의 말을 막았다. 더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놓고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너의 그 잔인한 거짓말에 수아 씨는…….”

하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수아 혹시 떠난 거야?”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수아가 떠났다는 사실에 지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럴 줄 알았어. 이수아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김지수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지수의 웃음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훈이 물었다.


“왜? 웃음이 안 나올 건 또 뭐야? 어쨌든 이수아는 떠났고, 하준 오빠는 이렇게 내 옆에 있는데.”

“헛소리하지 마. 네 옆에 있을 생각 추호도 없어.”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듯 확고한 목소리였다.


“내가 이수아보다 못한 게 뭐야!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던 지수가 잔인한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그때 확실하게 보내버렸어야 했어!”

순간 하준과 지훈의 시선이 동시에 지수를 향했다.


“문서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 네가 한 짓이었어?”

“그래! 나였다. 왜? 지훈 오빠도 그 민시우라는 자식도 이수아만 감싸고도는 꼴이 같잖아서 내가 그랬다! 왜? 뭐가 잘못됐어?”

“사람이 죽을 뻔했어.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안 죽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지수를 바라보던 하준은 책상에 있던 결재판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결재판을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현성 그룹과 진성 그룹이 협력하여 브랜드를 론칭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하준은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으로 손에 들린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키웠다.


“너 같은 인간이랑 브랜드 론칭 함께할 생각 없어.”

“고작 이수아 때문에 프로젝트를 엎는다고? 이게 말이 돼?”

하준이 지수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애초에 진성과 우리 현성 그룹의 합작이라는 게 말이 되는 거였나?”

하준의 살벌한 말투에 지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저 숟가락 하나 얹어보겠다는 너희 속셈 알고도 넘어가 준 거야. 애원하는 네 아버지 때문에.”

“…….”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아니면 네 회사 하나쯤 없애버리는 거 어렵지 않다는 걸 내가 직접 보여줄 테니까.”

그의 얼굴에 가득한 한기가 지수의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두, 두고 봐! 오빠가 나한테 한 짓 후회하게 될 테니까.”

지수는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하준을 노려보며 부회장실을 나섰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던 건지 지수가 떠나자마자 하준은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지훈은 그런 하준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 너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어떤 말이 너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이제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너에게는 언제쯤 평범한 행복이 찾아오는 걸까.


“하준아.”

가만히 기다리던 지훈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한데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쇳소리에 가까운 하준의 목소리에 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부회장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훈이 형!”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우가 지훈을 불렀다.


“이 정도로 쓰레기 일 줄은 몰랐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냥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거야? 창고 사건에 대한 자백도 받아냈잖아.”

“일단은 수아를 찾는 게 먼저야. 어차피 증거야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신고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하아. 진짜 수아 선배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무엇보다 하준이가 걱정이야. 어떻게든 빨리 찾아야 해.”

“그럼 아빠한테 도움을 청해볼까? 사람을 좀 풀어서 찾아보면 금방 찾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래. 진성에 대해 얘기도 할 겸 일단은 큰아버지한테 가보자.”

지훈과 시우는 걸음을 재촉하며 현성의 집으로 향했다.


“나 때문이었어. 나 때문에 아픈 몸으로 떠난 거였어.”

적막이 내려앉은 부회장실. 후회로 가득한 하준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무겁고 짙은 한숨과 함께 하준의 시선이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향했다.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 그리고 행복했던 시간들 모두 이 시계에 담아두고 싶어서.]

그 말의 의미가 이거였어?

내 곁에서 계속 함께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떠나겠다는 뜻이었냐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아야. 제발 돌아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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