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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미치도록 사랑해 (70/105)


70. 미치도록 사랑해
2022.11.29.



 
그 시각 수아는 바닷가에 앉아 물결치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수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지수에게 금방 대답해주겠다고 했으니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를 떠나야 할지. 아니면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의 곁에 남을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려 해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작정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질 것 같아 급하게 떠나왔는데.

수아는 무엇이 하준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하준 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집안끼리는 벌써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다는데, 자신에게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얼마나 끙끙 앓았을지. 그가 안쓰러웠다.


‘나만 없었다면 고민하지 않고 지수와 결혼을 했겠지?’

수아는 자신 때문에 그가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것 같아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번 혼자만의 여행은 수아 자신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하준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고통스럽지만 한 번쯤은 꼭 거쳐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편지를 읽었을 텐데. 혹시 화났으려나?’

수아는 문득 말없이 편지만 남기고 온 것을 떠올렸다.

편지 말고 직접 말을 하고 올 걸 그랬나? 생각하다가.


‘아니지. 얼굴 보고 말했다가는 바로 붙잡혔을 거야. 잠깐 떨어져 있자는 걸 하준 씨가 허락했을 리 없잖아.’

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편지로 전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음을 합리화했다.


“그래.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 하루 열심히 고민해보자.”

이내 그녀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나타났다.

*



“뭐? 그게 정말이야?”

현성을 찾아온 지훈과 시우는 지수가 벌인 일에 대해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현성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래서 지금 하준이는 어떻게 하고 있는데?”

“혼자 있고 싶다고 하길래 잠깐 자리도 비켜줄 겸 큰아버지께 도움도 청할 겸 해서 들른 거예요. 다시 가봐야죠.”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절대로 혼자 두지 마.”

“네. 그럴게요.”

“그나저나 내가 진성에 투자한 게 얼만데. 이런 은혜도 모르는 것들. 당장 투자금부터 회수해야겠다.”

“그건 조금 기다려주세요.”

현성이 휴대폰을 집어 들자 지훈이 그를 황급히 막았다.


“왜? 뭘 더 기다려? 그런 것들은 아주 그냥 쫄딱 망하게 해버려야 해.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현성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빠. 그건 하준이 형한테 맡겨주세요. 투자금 문제는 수아 선배부터 찾고 나서 처리해도 늦지 않아요.”

시우의 말에 지훈도 거들었다.


“맞아요. 진성에 대한 문제는 하준이가 결정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긴. 하준이가 직접 해야지 분이 풀리겠지.”

현성은 일이 해결되는 대로 하준의 뜻을 물어 그대로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경찰서에 보내고 싶다 하면 있는 비리 없는 비리 탈탈 털어서 아비와 딸을 한꺼번에 경찰서에 보내버릴 것이고,

회사를 망하게 하고 싶다 하면 진성이란 기업이 처음부터 없었던 회사인 것처럼 만들어줄 것이다.

현성의 눈동자는 매섭게 날이 서 있었다.

가족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현성이기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잔인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큰아버지 저희는 그만 가볼게요. 아까 부탁드린 거는 바로 진행해주실 거죠?”

“그래. 걱정하지 마. 바로 사람 풀어서 찾아볼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혼자 있는 하준을 위해 지훈과 시우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혜선과 현성의 얼굴에 걱정이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하준이가 걱정이네요. 이제야 겨우 아픔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그러게요. 빨리 그 아가씨를 찾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 시각 하준은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성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입술을 굳게 닫고 있던 하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수만 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하준을 괴롭히고 있었다.

무사히 있다는 말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준은 휴대폰을 들어 수십 번도 넘게 눌렀을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Rrrr.


“……!”

당연히 전원이 꺼져 있음을 알릴 줄 알았던 수아의 휴대폰 에서 느닷없이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아직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준의 심장은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여보세요.]

통화 연결음 끝에 웬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이수아 씨 휴대폰 아닌가요?”

[아. 제가 휴대폰을 주웠는데 혹시 이 휴대폰 주인이세요?]

남자의 말에 하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거기가 어딥니까?”

[여기요? 여기 속초인데요?]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서울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어차피 저희는 1박 2일 여행이라 계속 여기 있을 예정이거든요. 좀 늦으셔도 괜찮아요.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하준은 자동차에 올라 빠르게 액셀을 밟았다.

혹시나 수아를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3시간은 되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하준은 곧장 속초해변으로 내달렸다.

그리고는 다시 수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좀 전에 전화 드렸던 사람입니다.”

[우와. 서울이라고 하시더니 엄청 빨리 오셨네요.]

“혹시 어디쯤 계신가요?”

[여기 해변가인데요. 어? 혹시 네이비 정장 입고 계세요?]

“네. 맞습니다.”

[찾았어요. 잠시만요.]

잠시 후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하준을 향해 다가왔다.


“이 휴대폰 찾으러 오신 분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앞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커플은 휴대폰이 떨어져 있던 위치까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하준은 적당한 사례를 한 뒤 수아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휴대폰이 여기 있다는 건 그녀도 이 근처에 있다는 뜻.

어쩌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하준의 심장이 또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



“어디 간 거지? 분명 아까 바닷가에 앉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펜션에 들어서자마자 휴대폰이 사라졌음을 알아 챈 수아는 서둘러 바닷가로 향했다.


“없어지면 안 되는데. 하준 씨 사진들 어떻게 하지?”

수아에게는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그 안에 담긴 하준의 사진을 못 보게 된다는 것이 더 큰 두려움이었다.


“어디 있는 거야. 이리 나와라. 제발. 제발.”

수아는 좀 전에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와 열심히 모래를 거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모래를 파내기를 몇 분.

수아의 머리맡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혹시 이거 찾는 겁니까?”

이 목소리는…….

귓가를 맴도는 익숙한 목소리에 수아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아.”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자신의 휴대폰을 든 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하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준 씨?”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내 휴대폰은 왜 저 사람 손에 들려 있는 거고?


“지금 열심히 찾고 있는 게 이거 같은데. 아닙니까?”

수아가 당황해하는 사이 하준은 어느새 거리를 좁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 맞아요.”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는데, 하준이 손을 등 뒤로 보내며 휴대폰을 감췄다.


“주지 않을 겁니다.”

“왜요? 제 휴대폰이잖아요.”

“이거 주면 또 도망칠 텐데. 어떻게 줍니까?”

“도망 안 칠게요. 그러니까 이리 줘요.”

믿지 못하겠다며 하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여기는 모래사장이라 빨리 뛰지도 못해요.”

음. 그건 그렇네. 하준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천천히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윽고 휴대폰이 수아의 손에 닿았고, 휴대폰을 붙잡은 그녀는 재빨리 몸을 틀어 뛰기 시작했다.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수아를 향해 달렸다.

100미터나 뛰었을까. 보폭으로나 속도로나 어느 것 하나로도 하준을 이길 수 없었던 수아는 금세 그에게 붙잡혔다.

그것도 아주 치욕스럽게 뒷덜미를.


“도망 안 간다면서요.”

“이건 도망이 아니라 잠깐 거리를 좀 두려는 거예요.”

“우리 둘 사이에 거리가 왜 필요한데요?”

“그건…….”

“제가 김지수랑 결혼해야 하니까요?”

정곡을 찔린 듯 수아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 제가 깨버렸습니다.”

뭐를 깨버렸다고? 느닷없는 그의 발언에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바짝 들어올렸다.


“프로젝트를 깨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 제가 깨버리고 왔다고요.”

“어쩌려고. 대체 어쩌려고 그랬어요. 회장님이 하준 씨한테 화나셨으면 어떻게 해요.”

수아가 둥글게 쥔 주먹으로 하준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회장님이랑 하준 씨 어렵게 가까워졌는데. 또다시 멀어지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할 거냐고요.”

내가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가 뭔데. 당신을 위해서잖아. 당신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잖아.

수아가 원망 섞인 말투로 따져 물었다.


“아픈데. 그만 좀 때리죠.”

말없이 바라보던 하준이 수아의 두 손목을 붙잡았다.


“수아 씨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김지수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너무 놀라 순식간에 수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전부 다 김지수가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럼 투자금을 회수한다는 건요?”

“진성 그룹에 투자했으면 했지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결혼을 약속했다던 말도.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말도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고?

수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을 잃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당신을 떠나왔는데. 당신을 붙잡아야 하나 보내줘야 하나. 그 고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지수의 거짓말이 원망스럽고, 그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자신이 한심스러워 울컥 눈물이 났다.


“수아 씨가 시계를 선물할 때라도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렇게 아프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하준은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럼 저 하준 씨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계속 옆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수아의 눈빛은 고인 눈물에 담겨 빛나면서도 슬프도록 간절했다.


“네. 계속.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겁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무 다행이야.”

수아가 하준의 목에 팔을 걸어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수아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하준 씨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수아는 마치 몇 년 동안 사랑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사람처럼 절절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준도 그녀의 말에 보답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더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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